나의 첫 요리는 라면이었다. 열 살쯤이었을까. 불 켜는 것이 위험해 엄마는 반대했지만, 아버지의 도움으로 가스레인지 다루는 법을 익혔다. 라면은 만들기 쉽고 맛있다. 물에 면과 스프를 넣고 5분만 끓이면, 완벽한 한 끼가 완성된다. 글쓰기도 처음에는 쉬운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좋은 문장이 있으면 그대로 따라 쓴다. 조금 발전시켜 자신의 이야기로 바꿔 쓰면 더 좋다. 라면에 무엇을 넣느냐에 따라 해물라면, 치즈라면, 김치라면으로 달라지듯, 타인의 문장에 나의 언어가 들어가면 한결 풍요롭다.
2. 떡볶이처럼, 내가 좋은 것부터
나는 떡볶이 한 입을 베어 물면 주양념이 고추장인지 고춧가루인지 알 수 있다. 올해 초등학교 1학년인 딸은 엄마 떡볶이가 가장 맛있단다. 떡볶이는 라면과 비교하면 훨씬 어렵다. 고추장과 고춧가루, 설탕과 물엿의 양을 조절해야 하고, 양배추, 양파, 파, 마늘 등 재료도 손질해야 한다. 하지만 떡볶이 만들기는 늘 즐겁다. 매일 저녁 떡볶이를 먹어도 질리지 않을 만큼 좋아하니까. 글쓰기 또한 내가 좋아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육아를 하면서 에세이와 심리학 관련 책을 많이 읽었다. 에세이를 읽는 것은 한 사람을 만나는 일이었다. 심리학 공부를 하는 것은 ‘나’를 만나는 일이었다. 책을 읽으며 울고 웃던 나는 어느덧 쓰고 있었다. 남편과 싸운 날 밤,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를 손에 쥐고 눈물을 뚝뚝 흘리며 따지기도 했다. 그러곤 다시 책상으로 돌아가 키보드를 두드렸다.
3. 하다 보니 되네, 우선 쓰기
결혼과 동시에 삼시 세끼라는 숙제가 주어졌다. 결혼 전 나의 요리 수준은 엄마가 해놓은 것을 데우거나 차리는 정도, 직접 찌개를 끓이거나 나물을 무친 적은 없었다. 신혼 초, 황탯국을 처음 끓였다. 계란까지 풀어 모양은 그럴듯한데 맛이 영 밍밍했다. ‘아, 친정 찬장에도 그 갈색 가루가 있었지.’ 어떤 조리법도 ‘다시다 한 숟갈’을 말하지 않지만, 맛이 완성되지 않을 때 마법은 통한다. 요리를 할수록 ‘정말 어려운 건 줄 알았는데, 하다 보니까 되네?’ 신기했다. 글쓰기도 우선 쓰다 보면 된다. 쓰지 않았다면 절대 몰랐을 ‘나’, 꽁꽁 숨겨두었던 ‘나’를 만난다. 사실 누구에게나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하지만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이야기가 있다. 한 사람은 곧 우주이니까. 종이에 써도 키보드를 두드려도 좋다. 친구에게 말하듯, 편하게 쓰면 된다. 쓰다 보면 ‘고향의 맛’ 도움 없이 멸치, 다시마, 양파를 넣고 우려낸 진국 같은 글을 쓸 날도 올 것이다.
나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 정말 미칠 것 같았다…….
그 계기는 뒤늦게 40세가 되어서야 왔다. 그땐 내가 생각해도 그렇고, 남 보기에도 그렇고 살림 외에 딴짓을 생각하는 게 가당찮아 보일 만큼 나이도 들고 주부로서의 관록도 붙어 있었다. 편지를 너무 안 써서 외국 가 사는 가장 친한 친구와도 우정도 끊어질 만큼 비문학적인 환경에 함몰되다시피 하게 살고 있었다. 아이가 자그마치 다섯이었고, 시부모를 모신 맏며느리였다. 가계부도 건망증 때문에 못 쓸 만큼 조로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한 40세의 평범한 주부였다.
그러나 자기표현의 욕구까지 단념할 수는 없었다. 특히 그때까지 내 속에 짓눌려 있던 나의 이야기들은 돌파구를 만난 것처럼 아우성치기 시작했다.
- 박완서, 「글쓰기로 삶을 구원할 수 있을까」
4. 골고루 먹어야지, 균형 잡힌 글쓰기
시골에 살다 보니, 봄이면 냉이, 달래, 취나물 같은 식재료가 생기는데, 해보지 않은 요리는 언제나 막막하다. 원추리, 돌나물 같은 재료가 생겨도 냉장고에 넣어두었다가 버리기 일쑤였다. 내가 먹어본 것, 내가 만들어 본 것이 편했다. 하지만 이제 식재료가 생기면 “이거 어떻게 먹어야 해요?”라고 묻고, 되는 대로 해본다. 의외로 맛있다. 제철의 날 것에서는 땅의 맛이 난다. 글쓰기도 처음에 쉽고 좋은 것을 썼다면 조금씩 그 반경을 넓혀야 한다. 그 시작은 낯선 책 읽기이다. 그럴 때 독서모임은 좋은 도구다. 평상시 잘 읽지 않는 분야의 책을 읽고, 글을 쓰면 생각지 못한 지점에 닿는다. 순간 넓고 깊어진다. 스스로의 힘으로는 이르지 못했을 곳, 함께 읽고 쓰기는 아름답다.
5. 많이 먹어봤는데, 읽기와 쓰기는 천지차이
피자를 많이 먹었다고 맛있는 피자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 먹는 것은 미각에 도움을 준다. 다양한 피자를 맛보면, 도우는 어떻게 만들었고, 재료는 무엇을 넣었으며, 화덕과 오븐 중 어디에 구웠는지 구분할 수 있다. 사람마다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은 더 예민하게 알아차린다. 하지만 단련된 미각은 오히려 요리에 방해가 되기도 한다. 아무리 해도 그 맛이 나지 않기 때문. 그처럼 많이 읽었다고 저절로 잘 써지는 것은 아니다. 책을 많이 읽으면 글의 어휘력이나 구성력 같은 안목을 키울 수 있다. 하지만 높은 기준이 가끔 글쓰기를 막기도 한다. 막상 써보면 내 글이 너무 형편없기 때문. 읽기와 쓰기는 천지차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에서 비로소 글쓰기가 시작된다.
6. 조리법대로, 작문법대로 했는데
된장찌개를 처음 끓일 때 분명 조리법을 따랐는데, 먹으니 소금이었다. 그 시절 나는 집 된장이 더 짜다는 사실을 몰랐던 새댁이었다. 요즘도 오징어볶음을 하기 전에 스마트폰을 뒤적이지만, 취향에 맞게 재료를 가감한다. ‘고춧가루는 좀 덜 넣고, 참기름 대신 들기름으로 마무리해야지.’ 같은 식이다. 글쓰기 기술에 대한 책이 넘친다. ‘짧은 문장으로 써라.’, ‘구체적으로 써라.’ ‘딱 맞는 비유를 찾아라.’ 등 기본 원칙이 있지만, 쓰기 시작하면 기술은 힘을 잃는다. ‘나’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나’다. ‘나’의 글을 가장 잘 이끌어갈 사람도 ‘나’다. 여러 글쓰기 기술을 참고하되, 짧은 문장과 긴 문장 중 무엇이 좋은지, 구체적으로 그릴지 추상적으로 표현할지 처한 상황과 마음에 맞게 결정해야 한다.
7. 식재료가 다 하듯, 소재가 다 한다
얼마 전, 지인덕분에 속초에서 막 잡은 오징어를 먹었다. 그대로 쪘는데, 통통한 살이 새우처럼 탱글탱글했다. 가끔 농사지은 콩으로 두부를 해 먹는다. (시어머니가 하고 나는 조금 돕는다.) 오랫동안 콩물을 끓여 간수를 부으면 콩이 몽글몽글 모인다. 한 국자 떠서 아무 양념 없이 먹으면 여리고 순한 맛이 입안 가득 퍼진다. 막 잡은 오징어, 막 끓인 두부는 사실 재료가 곧 요리다. 글쓰기도 소재가 중요하다. 좋은 소재를 찾기 위해서는 삶을 살뜰히 살펴야 한다. 누군가의 몸짓, 말 한마디는 글 속에서 더 반짝인다. 얼마 전, 첫째가 차 안에서 물을 달라고 하는데, 녹지 않은 얼음물만 있었다. 병을 열심히 흔들어 겨우 한 모금 따라줬더니 아이가 말했다. “물은 조금인데 마음은 많네.” 아이의 고운 마음이 사라질까 얼른 적었다. 언젠가 나는 잊어도, 글은 오래도록 기억할 것이다.
8. 오래된 손맛, 고쳐 쓰기
분명 똑같은 김치인데 시댁에서 먹으면 더 맛있다. 고춧잎을 무칠 때, 같은 양념을 써도 시어머니 맛이 안 난다. 오이지, 깍두기, 장아찌 같은 것은 아예 해 볼 엄두가 안 난다. 나도 어느덧 9년 차 주부라 한 상 차리는 것은 뚝딱이다. 찌개나 국 하나 끓이고, 에어프라이어용 반조리 식품을 데우면 네 가족 입이 만족스럽다. 거기에 시어머니 표 오이소박이나 총각김치, 머위대 볶음이나 부추무침을 곁들이면 한정식 부럽지 않다. 내 손맛이 9년, 시어머니는 50년이니, 결국은 세월의 몫이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손에 익는데 꽤 걸리지만, 시간은 언제나 내 편이다. 나는 초고보다 퇴고에 더 많은 시간을 들인다. ‘꺼진 불도 다시 보자’처럼 ‘쓴 글도 다시 보자’를 되뇌며 고치고 또 고친다. 고쳐 쓰기에 공을 들이면 글쓰기 시작에 대한 부담이 줄어든다. 치열하게 고치며 시간과 싸운다. 완성된 글을 묵혔다 낭독하면, ‘나’라는 타인에게 다시 위로받는 느낌이다. 오래된 손맛처럼, 잘 익은 글맛이라고 할까.
9. 다시 생각해도 맛있는, 다시 읽어도 따뜻한
“엄마는 무슨 음식이 제일 좋아?” “음, 연어롤.” 아이의 질문에 답했을 뿐인데 순간 군침이 돌고 눈빛이 그윽해진다. 롤 위에 얹은 선홍색 연어와 채 썬 양파, 가지런한 무순과 달콤 짭짤한 소스, 상상만으로 와구와구 입이 커진다. 누구에게나 생각만으로 생기가 도는 음식이 있을 것이다. 나는 삶이 무겁고 무서울 때 《엄마의 책장》을 편다. 글을 읽으며, ‘싫다 화난다 하면서도 잘 견뎠구나’ 오래된 ‘나’를 만난다. 내가 잊은 기특한 ‘나’, 지워버린 결핍된 ‘나’를 붙잡고 다시 일어난다. 글은 오래도록 나를 기억해준다. 나에게서 나온 글이 나를 가장 잘 아는 친구처럼 ‘나’를 안아준다. 연어롤만큼 맛있다. 참 고맙다.
10. 차리고, 먹고, 치우듯, 삶을 쓰고, 읽고, 고치고
코로나 19로 개학이 연기되고, 두 아이는 온전히 내 몫이 되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오늘은 뭐 먹지?’라는 생각이 이불처럼 나를 감쌌다. ‘냉장고에 뭐가 있지? 어제 끓인 시래깃국, 냉동실에 동그랑땡.’ 아침을 먹고, 치우고, 아이와 놀다 세탁기를 돌렸다. 잠시 숨을 돌리면, ‘점심은 또 뭘 먹지?’ 공기처럼 나를 둘러쌌다. ‘야채 많으니까 카레.’ 또다시 차리고, 먹고, 치우고, 아이의 공부를 거들었다. 그 틈에도 청소, 빨래 정리 등 할 일은 많았다. ‘저녁은 뭐 먹을 거야?’ 해는 매일 같은 질문을 남기고 저물었다.
매일 차리고, 먹고, 치우듯, 삶을 매일 쓰고, 읽고, 고칠 수 있다면 어떨까. 밥은 몇 끼 굶으면 어지럽지만, 영혼은 오래 굶어도 티 내지 않는다. 다만 무의식 안에 웅크리고 있다가 어느 순간 신경증, 강박, 우울증으로 요동친다. 삶은 예습이 아니라 복습이다. 예전의 나는 삶을 어떻게든 미리 보겠다고 안간힘을 썼다. 끝없이 계획하고, 열심히 뛰었지만 결과는 보통 기대에 못 미쳤다. 주저앉은 ‘나’를 나조차 안아주지 않았다. 사실 나를 가장 매섭게 떠민 사람은 ‘나’였다. ‘넌 정규직 교사도 아니잖아.’, ‘넌 아나운서도 못 됐잖아.’ 한계 짓고 규정하며 스스로의 말끝에 가슴이 베였다. 내 안에 그런 말들이 고여 있었다는 것을, 나를 가장 많이 다그친 사람은 나였다는 것을 글을 쓰며 알았다. 글이 되고 나면 신기하게 흐뭇했다. 오늘도 읽고, 쓰고, 고친다. 살기 위하여. 살았다는 느낌으로 살기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