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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혜린 Jul 21. 2021

영자 씨 머리에 노을이 진다

8유형 - 이화경, 《천하무적 영자 씨》, (달그림, 2020)


천하무적 영자 씨


  함께 책을 보는데, 아이가 제목을 “천하무적 영자 아저씨”라고 읽었다. 앞뒤 표지를 쫙 펼치니, 파란 얼굴에 짧은 머리가 꼭 남자 같단다. 그렇다. ‘천하무적’이라는 수식은 영길 씨나 영식 씨에게 더 잘 어울린다. 힘은 남성의 것이다. 하지만 영자 씨는 할머니이다. 지는 법이 없고, 밥을 많이 먹으며, 힘이 세고, 눈빛으로 누군가를 제압한다. 에너지가 넘치는 남성은 사회의 리더가 되지만, 강한 여성은 ‘기가 세다’는 말을 듣는다. 아마 영자 씨도 어린 시절 엄마에게 “남자처럼 굴지 마!”라며 엉덩이를 맞았을 것이다. 결혼 후 시어머니에게서 “네가 드세니까 아범이 주눅 들잖아.”라며 한 소리 들었을지도 모른다.



영자 씨는 지는 법이 없다.


  흰 벽 앞으로 붉은 계단과 파란 다리가 보인다. 영자 씨는 이런 말을 하고 있을 것이다. “이깟 계단, 내가 질 줄 알지?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닌 거야.” 젊은 시절 영자 씨의 삶은 흑과 백이었다. 세상을 좋은 것과 나쁜 것, 강한 것과 약한 것, 친구와 적으로 나누었다. 어떻게든 이겼고, 웬만해선 사과하지 않았다. 살기 위해 부딪히고, 싸우고, 반대했다. 그렇게 부모를 모시고, 자식을 키웠다. 이제 영자 씨는 혼자다. 남편을 하늘로 먼저 보낸 것일까. 만약 이른 나이의 사별이었다면, ‘남편 잡아먹은 년’이라는 비난까지 견뎠을 것이다.



김치만 있어도 누구보다 밥을 많이 먹고,

수박 여섯 통을 머리에 일 정도로 힘이 세다.


  영자 씨는 먹는 것도 투쟁적이다. 손으로 김치를 집어 들고 입을 쫙 벌린 모습이 우악스럽다. 김치 하나로 밥을 해치우고 얼른 밭으로 나가야 한다. 여섯 식구  굶기지 않으려면 방법이 없다. 책 제목을 “천하무적 영자 아저씨”라고 읽은 아이는 이 장면에서 그녀가 남자라고 우겼다. 수박 여섯 통을 머리에 가뿐히 이는 영자 씨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쉴 새 없이 몸을 굴린 탓에 밤이 되면 허리는 우지끈하고 다리는 퉁퉁 부었을 것이다. 그래도 괜찮다며 잠이 들었겠지. 가끔 아들이 “다 엄마 때문이야.”라며 대들면 흠씬 두들겨 주었다. 옴쏙한 아들에게 “사내자식이 어딜 울어”라고 윽박지르고 무심히 지나쳤을 것이다. 물론 돌아선 가슴에 구멍이 숭숭 뚫렸다.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아서 자신도 몰랐을 뿐.


눈빛으로는 옆 동네 김 이장 불만을 단숨에 제압해 버린다.

     

  “재활용 쓰레기는 월요일에 내놔야….” 김 이장은 영자 씨 눈빛에 말꼬리를 내린다. 영자 씨는 크다. 바탕을 가득 채운 파란 얼굴만큼 존재가 묵직하다. 김 이장은 작다. 발그레한 얼굴은 이미 겁을 먹었다. 이장 아들이 영자 씨 손녀를 괴롭혔을 때 단번에 원수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보는 것도 아까운 손녀한테….”라며 손부터 나갔다. 영자 씨가 부녀회장이었다면 김 이장과 여러 번 싸웠을 것이다. 잔치 날이면 영자 씨는 가장 늦게까지 남았다. 신나게 놀고 말끔히 치웠다. 김 이장은 영자 씨 앞에 서면 모든 것을 들킨 듯 머리칼이 쭈뼛 섰다. 속에 있는 말을 거침없이 쏟아내는 그녀를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처음에는 김 이장도 대들고 따졌다. 몇 살 차이 안 나는 영자 씨가 어른 행세하는 것이 못마땅했다. 하지만 영자 씨는 아버지 없는 순식이를 자기 자식처럼 챙겼다. 김 이장에게는 돌처럼 단단했지만, 순식이에게는 풀처럼 산들거렸다. 김 이장은 영자 씨에게 지기로 했다.


오토바이보다 말이 빠른 이 씨 할머니


  영자 씨와 이 씨 할머니에 대한 상상을 해본다. 이 씨 할머니는 반백 년 함께한 동무다. 같은 해 한 동네로 시집을 왔다. 한 번은 이 씨 할머니 강아지가 영자 씨네 고추밭을 망가뜨렸다. 이 씨 할머니는 영자 씨에게 멧돼지 만난 셈 치라고, 그물망을 왜 안 쳤냐고 지청구를 쏟았다. 영자 씨는 기가 차서 물을 한 바가지 퍼부었다. 자주 옥신각신했지만 그런 다툼은 처음이었다. 다시는 안 볼 줄 알았는데, 며칠 뒤 두 사람은 원래대로 돌아왔다. 영자 씨에게 이유를 물으니 이렇게 답했다. “화해를 뭘 해. 싸우면서 정드는 거야. 한 번 내 사람은 내 사람이지. 이 씨 그렇게 주관이 뚜렷한 게 마음에 들었어. 속에 켕기는 게 없어서 좋아.” 마을 월례회 때, 영자 씨와 이 씨 할머니 모두 언성이 높아지자 김 이장은 안절부절못했다. 걱정하며 말리니 두 사람이 눈을 치켜뜨고 말했다. “누가 싸운다고 그래. 우리 대화하는 거야.”




그런 영자 씨도 쉽게 이길 수 없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늙어 간다는 것


  영자 씨는 상추밭을 엉망으로 만드는 달팽이를 두 동강 내고, 무서운 거미, 날아다니는 나방을 맨손으로 처치한다. 태풍으로 엉망이 된 논 앞에서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언제나 이기고, 기운이 넘쳤다. 하지만 세월의 무게에 몸이 버석거리기 시작했다.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기 어려웠다. 늙어 가는 것은 냄새나는 것이다. 씹는 것, 읽는 것, 걷는 것이 조금씩 힘에 부쳤다. 아들과 손자의 도움이 필요했다.


  젊은 시절 영자 씨는 손가락질을 많이 받았다. “그래, 내가 팔자 센 년이다”라고 큰소리쳤지만, 모두 잠든 밤 홀로 흐느꼈다. 외로우면 서방 생각이 났다. 그를 처음 보고 몽글몽글했던 마음, 바람 난 여자를 보고 죽이고 싶었던 마음까지. 나긋한 그 여자가 꿈에 어른거렸다. “신경 안 써.” 목청을 돋웠지만, 마음은 이미 자신이 졌다고 부르짖었다. 절대 고집을 꺾지 않는 여대장부 속에 풀썩 꺾이고 싶은 계집아이를 숨기고 살았다.


천진무구 정희 씨


  책을 덮으니 엄마가 남았다. 엄마는 강했다. 아버지가 주저앉아도 엄마는 삶을 지켰다. 무엇이든 잘 먹고, “몸 힘든 건 일도 아니야”라며 부단히 움직였다. 싸움 끝에 입을 다물었지만, 웬만해선 미안하다고 사과하지 않았다. 엄마 뒷모습에는 언제나 회색빛 층운이 뿌얬다. 결혼 전까지 엄마는 상처 받지 않는 무쇠 인간인 줄 알았다. 어느 날 엄마가 손자, 손녀와 숨바꼭질을 하는데, 까르르 넘어갔다. 그때 보았다. 오래 감춰둔 엄마 안의 ‘아이’, 평생 보호하며 살았지만, 가장 보호받고 싶었던 천진한 아이 말이다. 엄마는 약한 것을 바라보는 눈이 각별했다. 어쩌면 자기 안의 아이를 찾기 위해 먼 곳을 헤맨 것인지도 모른다. 천하무적 정희 씨, 아니, 천진무구 정희 씨.


쉽지 않은 결투임에도 포기를 모르는 영자 씨는 결국

     

  영자 씨는 늙음을 포기하지 않는다. “닦지 않아도 썩지 않는 이, 깨알 같은 글자도 읽을 수 있는 눈, 비가 와도 젖지 않는 다리”를 장착한다. 영자 씨는 아침마다 틀니를 끼며 “사람은 밥심이야.”라고 말할 것이다. 영자 씨의 힘은 몸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읽지 못하면 의지해야 한다. 영자 씨의 돋보기를 보며, 할머니가 떠올랐다. 할머니가 한평생 읽은 책은 성경뿐이었다. 아는 글자 몇 개와 숫자를 더듬었지만, 까막눈으로 공예배를 드리기는 역부족이었다. 교회에 가면 할머니의 성경, 찬송을 찾는 것이 내 일이었다. 영자 씨는 안경을 코끝까지 내릴 망정 읽기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휠체어가 아니라, 보행기를 밀며 산책을 나가는 마음처럼.


  이미 늙어 버린 인생과 늙음에 지지 않은 인생은 다르다. ‘젊다’는 형용사인데, ‘늙다’는 동사이다.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늙어가지만, ‘젊음’은 상태로서 언제든 가능하다. 과연 ‘자라다’와 ‘늙다’의 경계는 몇 살일까. 그림에서 자주 사용한 노란 바탕은 아이처럼 명랑하다. 선명한 원색, 크레파스의 거친 질감이 어린이 작품 같다. 영자 씨는 늙음의 종착지에서 태초의 자신이었 ‘아이 만났다.


  면지에 그려진 초록 줄무늬가 싱그럽다. 나무의 숨결 같다. 마지막 장면에서 영자 씨가 입고 있는 옷이 면지와 똑같다. 영자 씨는 아직 자라는 중일까. 두 팔을 번쩍 들고, 한 다리를 치켜세운 모습은 응석을 부리는 영아이다. 눈과 입에 장난기가 가득해서 주름마저 개구져 보인다. 진분홍 머리와 파란 몸은 보색을 이룬다. 흔히 분홍은 소녀, 파랑은 소년의 색이라고 한다. 영자 씨에게 삶은 곧 힘이었지만, 약함을 받아들이는 과정이기도 했다. 세월 따라 짓궂은 파란색에 수줍은 분홍을 더했다. 앞면지의 배꼼 내민 진분홍 머리와 뒷면지의 치켜든 파란 발이 하나인 듯 다정하다.


여전히 매일 아침 눈을 번쩍 뜨는 천하무적 영자 씨


  에릭 에릭슨은 성격 발달 단계를 여덟 단계로 나누고, 노년기 과제로 ‘자아 통합’을 꼽았다. 노년기는 신체적, 경제적, 사회적 쇠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생의 의미를 찾는 시기이다. 영자 씨는 편해 보인다. 팔은 번쩍, 다리는 사뿐, 해맑게 웃는다. 그녀는 이제 지는 법을 안다. 파란 몸은 스머프처럼 장난기 가득하지만, 언제든 멈출 준비가 되어 있다. 늦은 나이에 자신의 이름을 갖고 살기는 쉽지 않은데, 영자 씨는 이름을 잃지 않았다. 철수 엄마나 순천댁이 아니다. 문득 미야자와 겐지의 ‘비에도 지지 않고, 눈보라에도 여름의 더위에도 지지 않고’라는 시 구절이 떠올랐다. 그 시구를 영자 씨에게 보낸다.


  영자 씨의 젊은 시절이 열정적이고 공격적인 빨강이었다면, 노년은 따뜻하고 녹녹한 분홍이다. 나이를 먹으면서 영자 씨 삶에 빨강, 파랑이 들어왔다. 삶은 웃고 울며, 달리고 넘어지며, 모자란 자신과 마주하는 일이다. 온통 빨갰던 영자 씨에게 하양과 파랑이 더해진다. 영자 씨의 머리에 노을이 진다. 붉은 태양이 옅어지면서 다홍, 선홍, 꽃분홍, 진분홍이 된다. 대기 중에 미세한 먼지나 연기 입자가 많을수록 빛의 산란은 더 크다. 파랑이 섞인 노을은 보랏빛으로 더 깊고 넓다. 세월 따라 묽어진 영자 씨의 파마머리에서 푸시아 꽃향내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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