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년생 방과후 교사입니다
적지도 많지도 않은, 시간당 3만 5천 원
“무슨 일 하세요?”라는 질문에 멈칫한다. 나를 어떤 말로 설명할까 망설이다 “프리랜서 강사예요.”라고 답한다. 가장 모호하고 넓은 범위의 답이다. “어떤 강의하세요?”라는 질문이 이어지면 잠시 눈알을 굴린다. 그림책, 글쓰기, 독서 토론, 방과후 중에 무엇을 꺼낼까 고민한다. “학교랑 도서관에서 그림책, 글쓰기 강의해요.” 가장 그럴듯한 수식이다. ‘방과후 강사’는 숨긴다. 일주일에 3일, 가장 많은 시간을 쓰는 일이지만, 나를 밝히는 말에 ‘방과후 강사’라는 표현은 감춘다.
하교하는 아이들을 거슬러, 2시 반에 출근한다. 중앙 계단을 오르며, 마음이 한 칸 한 칸 작아진다. 멀리서 걸어오는 선생님의 얼굴에서 ‘정규직 교사’라고 읽는다. “안녕하세요.” 그들의 화사한 인사가 불편하다. 내 얼굴에 ‘계약직 교사’라고 쓰여있는 것 같다. 계약은 1년 단위, 12월이면 이력서를 내고, 면접을 봐야 한다. 계속할지 말지 고심 끝에 지원서를 내는 이유는 돈 때문이다. 적지도 많지도 않은, 시간당 3만 5천 원이라는 금액은 나의 가장 안정적인 수입원이다.
거창한 ‘나’를 바랐다. 기자, 아나운서를 꿈꿨지만, 그 끝은 요원했다. 경쟁률 2000:1, 시작부터 실패를 예감한 싸움이었다. 1차 면접 탈락, 2차 필기 탈락, 3차 임원 면접 탈락 등 수많은 불합격 마주하며, 나라는 사람 자체가 오답이 되어갔다. 소설가 등단이라는 희망마저 무너졌을 때, 남은 탈출구는 ‘임용’뿐이었다. 대학 졸업과 동시에 입학한 교육대학원은 최소한의 안전장치였다. 둘째가 세 살이 된 무렵, 국어 교사를 다시 꿈꿨다.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엄마로만 남은 내가 초라했다. 돌고 돌아 결국 ‘임용’이라니….
몇 달 전, 책 정리를 하며 전태련 교육학과 송원영 국어교육론을 버렸다. ‘임용’과의 완전한 결별이었다. 5년 전 나는 기로에 섰다. 시험 준비를 시작한 지 석 달쯤 되었을 때, 인근 초등학교에서 ‘방과후 교사’ 제안이 왔다. 나는 호기롭게 세 마리 토끼를 모두 노렸다. 가사와 육아는 물론, 낮에는 방과후 강사, 밤에는 임용 준비생으로 살고자 했다. 현실은 냉혹했다. 무엇 하나 제대로 하는 것이 없었다. 아이를 재우고 눈 뜨지 못하는 날이 늘었다. 밤의 ‘나’를 놓아야 했다. 그때 깨끗이 접었는데, 왜 국어 교과서와 기출 해설서는 버리지 못했을까.
국어교육을 전공한 나를 설명할 때면 에둘러 “임용고사를 제대로 준비한 적은 없어요.”라고 덧붙였다. 그 주위를 맴돌며, 책을 사고, 강의를 들으며, 시간과 돈을 쏟은 것은 비밀이다. 올해 2월에도 면사무소 앞에 ‘경축, 이선진 임용 고시 합격’ 현수막이 달렸다. 누군지도 모르는 이선진에게 눈을 흘겼다. 한때 품었으나 내 것이 되지 못한 소망은 나를 옥죈다. 분명 내가 버린 시험인데, ‘임용’이라는 글자가 아프다.
“선생님 다른 학교로 갈 생각 없어요?”, “선생님은 얼마나 벌어요?” 방과후 수업 시간, 아이들의 질문이 당돌하다. “자리에 앉아.”, “떠들지 말고….”라며 답변을 피하지만, 아이들의 말과 행동은 거칠다. 그럴 때면 어김없이 ‘내가 방과후 교사라서 무시하나?’ 자책이 퍼뜩 고개를 든다. 아나운서, 작가, 교사라는 화살이 차례차례 내 삶의 과녁을 비껴갔을 때, 나는 나에게 가장 혹독했다. 아무도 나를 ‘계약직 교사’라며 얕보지 않는데, ‘고작 방과후 교사 주제에….’라는 비난을 내가 나에게 퍼부었다. 요즘 아이들이 선생님을 대하는 방식이 다 그런데, 유독 나만 쉽게 여긴다고 오해했다.
‘작가’라는 어엿한 수식에 안도한다. 임용이 사라진 밤, 글을 썼다. 품었다가 사라진 희망들이 나를 꾸역꾸역 ‘에세이스트’에 닿게 했다. 나를 소개하는 자리에서 스스로 ‘작가’라고 말하지 못한다. 가장 사랑하는 페르소나를 아끼는 마음이다. 호들갑스럽게 내 책을 검색하며 으스대는 상황도 부담스럽고, 아무 관심이 없을까 봐 겁이 난다. “프리랜서 강사예요.”라고 말하며 태연한 척하지만, 사실 ‘작가’임을 들키고 싶어 안달이다. 마음 깊은 곳에서 ‘네이버 검색창에 ‘윤혜린’ 치면 나오는 《엄마의 책장》이 제 책이에요. 윤혜린의 브런치도 제 거예요.’라고 아우성이다. 1년 중 강사로 사는 날이 150일이라면, 작가로 사는 일은 30일쯤 될까. 초라함과 과분함 사이를 날마다 오간다.
《나는 87년생 초등교사입니다》(송은주, 김영사, 2020)라는 책을 읽었다. ‘나는 85년생 방과후 교사입니다.’라고 말해 본다. ‘작가’라는 이름이 너무 성스러워, ‘방과후 교사’라는 말이 상스러워졌다. 가볍고 맑은 눈으로, “작가이자 강사입니다.”라고 나를 설명한다. ‘작가’인 ‘나’도 대단하지 않고, ‘방과후 교사’인 나도 창피하지 않다. 어떤 말로 나를 설명해도, 나보다 작다.“선생님, 몇 살이에요?”라는 질문에도, “응, 서른여덟 살.” 투명하게 답한다. 나이를 밝히는 것 또한 가뿐한 일이다.
이른 아침, 딸아이가 터덜터덜 학교에 가며 물었다. “엄마, 오늘은 무슨 수업해?” “응, 오전엔 수업 없고, 오후에 독서 논술.”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그윽했다. “나도 커서 엄마처럼 방과후 선생님 할 거야.” “그래, 좋네….” 고맙다. “나는 85년생 방과후 교사입니다”라고 말해본다. 웃음이 나올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