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예쁘지는 않지만
실은 아나운서가 얼마나 되고 싶었는지
“너는 엄마가 예뻐서 좋겠다.” 이 말을 들은 첫째가 입을 삐죽이며 답했다. “화장 안 하면 환자예요.” 나는 옆에서 배를 그러안고 “그래, 맞아.”라며 폭소했다. 화장을 하지 않으면 “어디 아파요?”라는 소리를 듣는다. 다크서클이 볼까지 내려오고, 핏기 없는 입술이 우중충하다. 결혼 전, 아랫집 아주머니가 할머니에게 심각하게 물었다. “손녀딸이 둘 아니에요? 어제 모르는 아가씨가 내려오더라고….” 전날 화장 안 한 모습으로 아주머니와 마주친 것이 사건의 시작이었다. 메이크업 전후로, 나는 동명이인이 된다. 분칠을 하면서 ‘예쁘다’라는 말을 듣기 시작했다. 피부는 하얗게, 눈썹은 까맣게, 입술은 빨갛게 칠하면 한결 화사하다.
동생은 차분하고 예뻤다. 까맣고 이목구비가 오종종한 나와 달리, 하얗고 눈이 컸다. 유치원 시절, 이웃집에 살던 준범이가 말했다. “자동차 사면 내 옆에 혜진이 태워서 놀러 갈 거야.” 뒷좌석에는 준범이의 식구들이 앉아야 하니 내 자리는 없었다. “혜진이랑 결혼하고 싶어.” 새침한 동생은 프러포즈도 자주 받았다. 초중고 시절, 나는 눈에 띄지 않는 아이였다. 내성적인 동생은 어디서나 주목을 받는데, 나대고 싶은 나는 아무리 노력해도 봐주는 사람이 없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엄마가 슈퍼를 했고, 그때부터 살이 쪘다. 엄마 몰래 금전함에서 2백 원을 꺼내 분식집으로 갔다. 금방 튀긴 떡꼬치에 고추장 소스를 바르면 와사삭 세상을 다 얻은 듯했다. 통통했던 나는 점점 뚱뚱해졌다. 중3 때 키 167cm, 몸무게 60kg이었다. 그 시절 나와 동생은 같은 교회를 다녔다. 오빠들의 관심 밖이었던 나와 달리, 마르고 예쁜 동생은 중등부 입학 때부터 반짝거렸다. 동생은 신입생 환영회 날 오빠들에게서 “너 내 동생 해.”, “너 내 딸 하자.” 같은 말을 들었다. 나는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말이었다. 남몰래 ‘저 오빠가 저 좋아하게 해주세요.’ 같은 기도를 드릴뿐 나는 그들의 무대 주위만 맴돌았다.
재수 시절, 선식 다이어트를 했다. 대학에 간 친구들은 해사하게 피어나는데, 재수생으로 살까지 찌고 싶지 않았다. 169cm, 55kg으로 대학교에 입학했다. 큰 키에 적당히 마른 느낌이었는데, 문제는 여드름이었다. 멍게 피부는 대학교 3학년 때 절정이었다. 밤늦게까지 과외로 번 돈을 피부 숍에 쏟아부었다. 잠을 못 자니 피부는 안 좋고, 그래서 더 돈을 벌어야 하는 악순환. 언론 고사 준비를 위해 교정을 시작했다. 좌우상하 작은 어금니 4개를 빼고 돌출된 앞니를 집어넣었다. 아나운서 시험을 준비할 때는 저녁을 안 먹는 게 일상이었다. 169cm, 48kg 드디어 가느다란 여자가 되었다.
이력도 실력도 얼굴보다 중요하지 않았다. 아나운서 공채 시험은 1차가 카메라 테스트였다. 방송사 시험 날이면, 아나운서 메이크업을 전문으로 하는 숍은 새벽부터 북적였다. 머리 뿌리를 띄우고 단발을 가지런히 정리했다. 은은한 섀도를 바르고 속눈썹을 붙였다. 미리 대여한 몸에 딱 붙는 분홍 정장을 입었다. 시험장에 놓여있는 프롬프터는 공포였다. 처음 보는 뉴스 대본을 그 자리에서 읽어야 했다. 프롬프터 뒤에서 채점표를 들고 앉아 있는 현직 아나운서들은 고단하고도 고상해 보였다. 카메라 앞에 서는 시간은 1분도 되지 않았다. 돌아 나오는 길은 허무함은 2차 필기시험조차 보지 못하는 모멸감으로 이어졌다. 1차 탈락의 원인 분명했다. 나의 눈, 코, 입을 포함한 외모의 모든 것이었다.
나만 빼고 모두 꽃이었다. 인형 얼굴로 태어난 그녀들을 나도 모르게 훔쳐보았다. 예뻐서 다정해 보이는 여인들 앞에서 나는 점점 작아졌다. 3000:1이라는 경쟁률은 벽이었다. 아버지가 가난하지 않았다면 안면윤곽 수술을 했을까. 교정 비용을 스스로 충당하는 것만으로 벅찼다. 엄마가 예뻤다면 나도 예뻤을까. 납작한 이마, 각진 턱 위로 불합격 도장이 낭자했다. 나라는 사람 자체가 오답이었다. 다시 태어나지 않는 이상 답이 정해진 게임이었다. 돌아서야 했다.
3차 면접에서 떨어진 날,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숨죽여 울었다. 대낮에 합격자 명단을 확인했지만 울 곳이 없었다. 집 앞 평상에 앉아 넋 놓고 울 때, 어둠만이 나를 위로했다. 그날, ‘이제 그만 하자.’ 뒤도 안 보기로 약속했다. ‘방송 현실이 내 생각과 너무 달랐어. 여기서 멈추길 잘한 거야.’라며 나 자신을 설득했다. 어설픈 안위로 눈물을 틀어막았다. TV를 보지 않았다. 아나운서를 견딜 수 없었다. 뉴스를 안 들었다. 기상캐스터가 너무 아팠다.
아주 예쁘지는 않지만, 예쁘고 마른 모습에 집착한다. “예뻐요.”, “날씬해서 좋겠다.”라는 말을 종종 듣는다.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몸 둘 바를 모르다가 수줍게 미소 짓는다. 용기를 내어 “감사합니다.”라고 인사하기도 한다. 두 아이를 낳고도 169cm, 50kg을 유지한다. “아가씨인 줄 알았는데….”라는 말을 들으면 속으로 쾌재를 부른다.
예쁜 척은 재수 없다. 내가 감히 나를 예쁘다고 여길까 봐 혹독하게 다그쳤다. ‘세상에 너보다 예쁜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너는 예쁜 사람 틈에 끼면 제일 못생겼어. 아나운서 시험이 증명해줬잖아. 날씬하면 뭐해. 가슴이 작은데…. 볼품없이 말라서 딱 배구 선수 같아.’ 예쁘다는 칭찬을 내 것으로 가져오는 것이 교만인 것 같아서, 차라리 악담을 퍼부었다. 아나운서 시험 이후로 내가 나를 진심으로 예뻐한 적이 없다. ‘네 외모는 실격이야.’ 내가 나를 버렸다.
여성들이 있는 새로운 집단에 가면 홀로 기싸움을 한다. ‘여기 나보다 더 예쁜 여자는 누구지?’ 레이더에 포착된 그녀와 나를 비교한다. 경쟁하듯 키, 몸매, 얼굴을 살핀다. 깨끗이 패배를 인정해야 하는 상대가 나타나면 그곳을 떠나고 싶다. 아름다움을 선망하다가 남모르게 질투했고, 시기심은 종종 미움으로 번졌다. 내가 나의 단점만 골라내니, 남에게서도 단점만 보였다.
예쁜 소녀들은 강남으로 시집을 갔다. 호박에 줄을 그어도 수박이 되지 않으니, 나는 애초에 강남권은 아니었다. 강남 아파트를 욕망했으나, 포천 주택에 산다. ‘공부하면 아내 얼굴이 바뀐다.’라는 고3 교실의 표어는 이 사회를 대변한다. 예쁘면 “너희 어머니가 누구시니?”, 잘나면 “너희 아버지는 뭐하시니?”라는 질문을 받는다. 엄마의 얼굴과 아버지의 재력이 금수저를 만든다. 깨끗한 피부, 고운 이목구비가 권력인 세상이다. 왜곡된 세상에서 예쁘면 착하다고 배웠다. 예쁜 얼굴보다 더 잘 먹히는 페르소나는 없다.
“예쁘다.”라는 말은 온전히 타인의 언어이다. 타자에게서 발화되었을 때 그나마 의미 있고 안심이 된다. 이효리 정도는 되어야 “제가 예뻐요.”라는 말을 할 수 있다. 어색하지만 나도 그 말을 해본다. “아주 예쁘지는 않지만 저 예뻐요.” 내가 좋아서 그냥 화장을 한다. 예쁜 공간이나 예쁜 말처럼 예쁜 얼굴을 보면 기분이 좋다. “예쁘다”라는 칭찬에서 도망치지 않는다. 그래야 예쁘지 않은 ‘나’도 품을 수 있다. 주름이 늘고, 흰머리가 생긴 늙어가는 나를 안아준다. 예뻐서 주목받고 싶었다. 걸어만 다녀도 흠모의 대상이 되고 싶었다. 외부를 향하던 시선으로 내면으로 돌린다.
공주병 같아서, 이 사치스러운 이야기를 쓰기 싫었다. 이 글을 쓰며 많이 울었다. 실은 아나운서가 얼마나 되고 싶었는지, 아나운서가 되지 못한 나를 내가 얼마나 멸시했는지 정직하게 직면해야 했다. ‘이제 그만하자.’ 아무도 모르게 아나운서 시험을 접었던 그 밤, 그 평상으로 돌아가 나를 토닥였다. “예쁘지 않아도 괜찮아. 예쁜 것도 너고, 예쁘지 않은 것도 너야. 넌 그보다 훨씬 큰 존재야.” 울지 못해 생기를 잃었으니, 이제라도 실컷 울어야 했다.
겸연쩍지만 다시 말해본다. “저 예뻐요.” 이 말을 내가 나에게 진정으로 하기까지 얼마나 돌아왔을까. 나를 보던 눈으로 당신을 본다. 마음을 담아 “당신 참 예뻐요.”라고 말한다. 우리는 모두 예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