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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혜린 Nov 07. 2023

그날의 회초리는 따듯했다

나는 지웠으나 엄마는 가슴에 묻어둔 기억이었다

“나무는 자꾸 부러지니까 회초리로는 이게 좋겠어.” 아버지가 엄마에게 색깔, 굵기, 길이가 다른 아크릴 막대 여러 개를 내밀며 말했다. 막대기는 흰색, 붉은색, 투명색 등 다양한 빛깔에, 젓가락 두께부터 막대 걸레 두께까지, 두 뼘 길이부터 네다섯 뼘 길까지 모두 제각각이었다. 안방에는 8 장롱이 있었고, 장롱과 벽 사이에는 20cm 남짓한 공간이 있었다. 아버지는 그 틈 사이에 기다란 원통을 마련해 막대를 세워놓았다. 십수 개의 아크릴 막대는 언제라도 전쟁터로 나갈 수 있는 대비 태세 병사 같았다.


“여기 있던 거 다 어디 갔어?” 아버지가 장롱과 벽 사이의 틈을 가리키며 물었다. 나와 동생이 두 눈을 끔벅거리며 고개를 젓다가 엄마에게로 눈을 돌렸다. 엄마는 퉁명스럽게 “내가 버렸어.”라고 답했다. 나에게 애당초 회초리가 없는 세상은 없었으니, 잘 마련된 회초리에 반기를 들 수 없었다. 문제가 있다면 아크릴 막대가 아니라, 책상 안 치우고, 눈높이가 밀리고, 동생과 싸운 나였다. 누구나 집에 그 정도의 몽둥이는 있으며, 누구나 잘못하면 그 정도는 맞는 줄 알았다. 매 없는 유년기를 보냈던 엄마만이 그 막대를 치울 수 있었다.


막대는 사라지는 것보다 다시 채워지는 속도가 빨랐다. 아버지 회사에서 자투리 아크릴은 매일 쏟아져 나왔고, 엄마의 삶은 매번 그것을 갖다 버릴 만큼의 여유가 없었다. 어린 날의 집은 빙상에 지은 천막 같았다. 따듯한 기운이 감돌면 금방이라도 얼음판이 갈라져 춥고 깊은 물의 늪으로 사라질 듯했다. 어떤 화목함이 비집고 들세라 우리 가족은 늘 누군가 싸운 상태, 누군가 화난 상태, 누군가 맞은 상태를 유지했다. 그 중심에 아버지가 있었고, 엄마는 가까스로 아버지를 막아냈으나 엄마도 허우적대기는 마찬가지였다. 어느 순간 아크릴 막대는 더 이상 사라지지 않았는데 엄마도 파리채로 맞는 것보다 아크릴 막대로 맞는 편이 더 나을 거라고 판단한 듯했다.


“여자애 걸음걸이가 그게 뭐냐? 슈퍼 모델은 머리에 밥공기를 얹고 걷는 연습을 한 대.” 지루한 오후, 하필 아버지의 그 말이 떠올랐고 나는 밥공기를 정수리에 올리고 집안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아차 하는 순간, 밥공기가 떨어지며 서너 조각으로 갈라졌다. ‘난 이제 죽었다. 어떡해.’ 울상이 되어 엄마를 바라보니 엄마는 “이리 나와.”라며 깨진 밥그릇을 치웠다. 엄마의 눈빛은 푸석했고 손놀림은 묵묵했다. 엄마는 그런 사람이었다. “괜찮아? 다친 데는 없어?” 같은 말로 다정하게 안아주지는 않았지만 “왜 그런 장난을 쳐.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같은 말로 매섭게 다그치지도 않았다. 아주 뜨겁거나 차가운 일들이 엄마 곁에 가면 미지근한 온도로 맞춰졌다.


아버지가 밥공기의 행방을 물었을 때 엄마는 자신이 깼다고 했다. 그런 일은 또 있었다. 내가 아버지 라디오의 안테나를 부러뜨렸을 때도 엄마는 아버지에게 자신의 잘못이라고 했다. 내가 아버지의 펜을 망가뜨렸을 때도 엄마는 자기가 한 것이라고 했다. 나의 소행임이 드러났다면 한바탕 난리가 났을 텐데 엄마의 불찰이었기에 아버지는 미심쩍어하면서도 조용히 넘겼다.


문제는 엄마가 없는 날들이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아버지는 엄마와 아무런 상의 없이 슈퍼(구멍가게)를 계약했다. 엄마가 슈퍼를 보는 동안 나와 동생의 돌봄은 아버지와 할머니에게 맡겨졌다. 내가 첫째를 낳았을 무렵, 엄마가 그때를 회상하며 말했다. “슈퍼 하는 게 처음엔 황당했는데 밖에 나와 있으니까 싸우는 거 안 봐도 되고 돈도 벌고 오히려 편했어. 근데 너희들 목욕시키는데 온몸에 시퍼렇게 멍이 들어있는 거야. 그거 보고 정말 화가 나더라.” 나는 지웠으나 엄마는 가슴에 묻어둔 기억이었다.


엄마가 슈퍼를 할 때, 나는 학업 부진아가 되었다. 두 자릿수 곱셈 빵점을 맞은 날, 수학 익힘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풀어오라는 숙제는 끔찍했다. 밤을 새우지 않는 이상 할 수 없는 양이었고 다음 날 풀다 만 공책을 들고 울다시피 학교에 갔다. 수학뿐 아니라 국어, 사회, 과학까지 무엇 하나 쉬운 과목이 없었다. 60점짜리 시험지를 들고 온 날, 엄마가 살며시 내 방으로 들어왔다. “몇 점 맞았어?” 60점이라고 답하니 엄마 표정이 나보다 더 난감해졌다. “그래도 시험을 못 봤으니…. 몇 대 맞을래?” 다섯 대라고 답하니 엄마가 숨을 크게 들이쉬고 얇은 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하나도 아프지 않아서, 살짝 스치기만 하는 느낌이어서, 정말 이렇게만 맞아도 되나 내 눈이 동그래졌다. 그 눈빛을 알았는지 엄마가 말했다. “네가 시험 못 본 게 엄마 책임도 있으니까….”


엄마가 나간 뒤 닫힌 방문을 보는데 비실비실 웃음이 났다. 그때가 초등학교 3학년이었는지, 4학년이었는지, 시험 점수가 50점이었는지, 60점이었는지, 과목이 수학이었는지, 사회였는지, 회초리를 다섯 대 맞았는지, 열 대 맞았는지는 사실 가물가물하다. 다만 며칠 지나 엄마가 아버지에게 “혜린이 내가 때렸어요.”라고 말했던 것이 기억난다. 그 말이 꼭 나를 사랑한다는, 나를 지키겠다는 다짐처럼 들렸다. 공부를 안 해서, 공부를 못 해서 빗자루 굵기 몽둥이로 아버지에게 수십 대를 맞았지만 나는 맞을 것을 알면서도 여전히 공부를 안 했다. 내가 학력 진보상을 받고, 학력 우수상을 받게 된 것은 아버지의 인정 없는 몽둥이 때문이 아니라, 그날의 엄마 때문이었다. 그 따듯한 매질,  손바닥에 온기가 그대로 남아서 그 이후로 공부하게 된 것인지 모르겠다. 그날의 회초리는 따듯했다.


Photo by vahid kanani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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