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록, 『당신이라는 가능성』을 읽고
신이 세상을 만들 때 가장 먼저 빛을 창조했다. 빛은 낮이, 어둠은 밤이 되었고, 우리는 날마다 낮과 밤이라는 순환 속에서 지난날을 보내고 새날을 맞이한다. 나는 낮에 강사이자 대표, 엄마이자 아내로 산다. 보다 큰일을 해내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보다 큰 사람이 되기 위해 열성을 다한다. 낮의 나는 착하고, 잘 웃고, 친절하고, 책임감이 강하다.
밤의 나는 낮의 나와 다르다. 밤의 나를 만나기 위해 책으로 들어간다. 메모리폼 매트리스에 누워 이불을 덮고 소설을 읽기 시작하면, 작고 비루한 ‘나’가 고개를 든다. 가까스로 동그란 모양을 지키고 있다가 한순간 뭉개지는 상한 과일처럼 소설을 읽다가 나도 모르게 눈물이 터지고 화가 솟구친다. 밤의 나는 못되고, 잘 울고, 사납고, 도망칠 궁리를 하는 쭈글쭈글한 인간이다.
11월이 되자 하루가 다르게 기온이 내려가더니, 퍼런빛이 남은 은행잎마저 오소소 떨어졌다. 누가 가을을 독서의 계절이라고 했던가. 겨울은 소설의 계절이다. 밤의 계절인 것이다. 소설이 있다면 동짓달 기나긴 밤이 외롭지 않다. 소설은 삶에 부대끼며 살아가는 나를 다그치지 않고 기다려준다. 작은 이야기들 곁에서 잠시 숨을 고른다.
이록의 단편소설집을 펼쳤다. 『당신이라는 가능성』은 2023년 봄, 시인이자 그림동화 작가인 이록이 처음 펴낸 소설집이다. 이록을 알게 된 것은 소흘읍 프로방스 빌리지에 위치한 문학서점 ‘무아의 계절’(현재 잠시 운영을 멈춘 상태) 덕분이다. 이록은 나에게 소설가이기 이전에 책방지기였는데, 음악과 꽃, 커피와 디퓨저 향이 어우러진 보랏빛 책방은 그녀처럼 다정했다.
처음 『당신이라는 가능성』을 읽었을 때는 소설 속에 감춰진 이록의 이야기를 살폈다. 책모임을 하기 위해 두 번째로 봤을 때는 회원들과 어떤 이야기를 나눌까 연구했다. 세 번째 다시 읽을 때는 최 씨, 고애정, 필환, 현서 같은 인물들이 조그만 내 가슴속으로 들어왔다. 온통 아프고 모자란 이야기뿐이었지만 한결같이 맑은 영혼들. 상처 입은 이들이었기에, 상처 입은 나를 위로할 수 있었다. 그들이 나에게 건넨 ‘당신이라는 가능성’이 바스러지지 않고 내 심장으로 전해졌다.
『당신이라는 가능성』에는 겨울이 배경인 이야기가 여러 편 나온다. 「걷는 사람」에서 출판사를 운영하다가 파산한 박우영은 겨울이 되자 김장용 비닐을 사서 땅굴 집을 마련한다. 「둥근 것이 빛날 때」에서 희영이 ‘나’에게 ‘기대할 만한 사람’을 소개하는 날도 겨울이다. 「자카란다에 꽃이 피면」은 ‘시드니는 겨울의 끝자락이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바깥의 계절과 상관없이 겨울 같은 마음으로 사는 인물들도 있다. 「뼛속의 바다」에서 유리는 영소가 떠나자 죽음을 집어든다. 「그날의 애정은」에서 열여덟이 되어 보육원을 나온 영희는 자신이 지닌 나쁜 피에 대해 숱하게 의심한다. 「사월의 눈처럼 파도치는 바다로」에서 영심은 부모 잘 만나 돈 걱정 없이 산다는 주위 시선과 달리 마음속에 거대한 파도가 인다. 「현욱의 동화」에서 현욱은 엄마를 대신해 자신을 키운 할머니에게 가시 돋친 말을 내뱉고 집을 떠난다. 버리거나 버려진 이들의 이야기는 불편했다. 불편함을 감수하면서 소설을 읽고 또 읽었던 이유는 소설 깊은 곳에 내 가슴속 이야기가 숨어있었기 때문이다. 소설을 읽을 때면 머리는 꺼지고 가슴이 켜진다.
『당신이라는 가능성』에는 은은한 격려가 담겨있다. 뭐든지 할 수 있다고, 어서 힘내라고, 당장 일어서라고, 떠미는 듯한 지지가 아니라, 달빛처럼 그윽하고 거룩한 응원이다. 달은 밤에 뜬 낮이다. 어두운 삶에서 헤어 나올 수 없을 때, 달은 저만치 떠서 우리를 돌본다. 「둥근 것이 빛날 때」에서 ‘나’는 희영과 ‘너무 느슨하지도 팽팽하지도 않은 관계를 유지하며’ 지낸다. ‘서로의 삶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달을 올려다보듯 지켜만’ 보면서…. 「현욱의 동화」에서 현서와 현욱은 얇게 뜬 초승달 아래 달콤한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함께 걷는다. 아이스크림 한 번에 초승달 한 번 바라보면서….
소설을 읽으면 누군가가 떠오르고 그이를 다시 보게 된다. 수치심이든 분노든 두려움이든 마음 깊은 곳엔 그를 향한 사랑이 있다. 사랑하는 것은 불편하지만, 그러기에 아름답다. 밤이 빚은 소설의 시간 동안 충분히 슬퍼하면, 낮에는 다시 웃을 수 있다. 서툰 나와 당신을 사랑할 수 있다. 「걷는 사람」에서 최 씨가 박우영 옆에 도란도란 누워서 “이제 그만 돌아가세요. 사연은 여기까지면 되지 않겠어요? 어둠을 들여다보면, 잘 보여요. 어둠이….”라고 말할 때, 「그날의 애정은」에서 고애정 씨가 영희에게 호흡을 가다듬고 “심심하면 내 딸로 살아볼래?”라고 물을 때, 우리의 긴 겨울밤이 따듯해진다. 어둠을 이기기 위해 어둠을 비난하고 몰아붙여도 소용없다. 다만 한 줄기 빛이 비칠 때 어둠은 저절로 사라진다. 괜찮다고, 그만하면 되었다고, 잘하고 있다고…. 오늘도 창가로 달빛이 흘러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