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1971년, 고작 50년 전인 영화 <더 포스트> 속의 시간에는 많은 것들에 남성 혹은 여성만의 것이라는 딱지가 붙어 있었다. 남성은 일을 하고 여성은 가정을 돌보는 것이 당연했으며, 함께 식사를 하다가도 정치 얘기가 나오면 여성들은 '남자들끼리 이야기하라'며 자리를 옮겼다. 남녀가 각자의 자리에서 역할을 다 하는 것, 너무 자연스러워 아무런 문제 없이 흘러가던 두 세상이 있었다.
영화는 이 두 세상을 '문'으로 구분했다. 문을 기준으로 남성은 내부, 여성은 외부에 존재했으며, 프레임을 꽉 채운 문의 형상으로 그 경계를 굳건히 했다. 당시 남성과 여성의 영역이 얼마나 달랐는지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 견고한 문
캐서린 그레이엄(메릴 스트립)은 문을 열어야하는 사람이었다. 남편이 죽은 후 가족 경영 방침에 따라 신문사 '워싱턴 포스트'의 오너가 된 것이다. 캐서린은 그 시대 보통의 여성이었다. 남성만이 일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고, 또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런 그녀가 남성들의 세상인 회사 경영진 중에서도 가장 높은 위치가 된다는 것은, 그녀와 주변 인물 모두에게 이질적이고도 인정하기 힘든 것이었다.
영화에서 문은 두 번 등장한다. 모두 캐서린이 문을 열고 다른 세상으로 들어가는 장면을 통해서다. 그녀가 처음 문을 열었던 이사회장, 연설을 위해 캐서린은 전날부터 모든 자료를 공부하고 친한 이사 프리츠(트레이시 레츠)와 함께 내용을 연습했다. 하지만 캐서린은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이사진들은 그녀에게 시선을 주지않았고, 그녀의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프리츠의 도움으로 회사 주식을 판매해 현금을 확보하기로 결정되었다. 주식장 입구로 다가가는 캐서린 양 옆에는 문 밖에서 남편을, 혹은 지인을 기다리는 여성들이 있었다. 그녀는 그들 사이를 지나 두번째 문을 여는 유일한 여성이었다. 하지만 캐서린은 여전히 환대받지 못했다. 단지 첫번째로 워싱턴포스트의 주식을 구매한 사람으로서 카메라 세례를 받을 뿐이었다. 캐서린에게 문 너머의 공간은 낯선 세상에 대한 압박감이자 다가올 편견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 그저 견디는 것
한편 편집국은 펜타곤 비밀 보고서의 원본을 입수했다. 경쟁사 ‘뉴욕타임스’가 이미 일부를 보도한 후 국가의 제재를 받아, 모두가 조심스러운 상황에서였다. 편집국장 벤 브래들리(톰 행크스)는 언론의 자유를 외치며 막무가내로 기사 쓰기를 지시하고, 이사진들과 변호사들이 반대하며 팽팽히 맞섰다. 이들은 캐서린에게 자신들의 의견을 들어달라 주장했다. 캐서린에게 아주 버거운 결정의 순간이 온 것이다.
“Let’s publish. let’s go, let’s go.”
캐서린은 보고서 발행을 승인했다. 나아가 이사진들의 항의에도 주눅들지 않고 충고와 협박을 섞어가며 의견을 관철시켰다. 한 마디도 하지 못했던 그녀의 반란같은 성장이었다. 하지만 캐서린의 손은 이것이 성장이 아님을 말한다. 영화는 캐서린의 손을 비춤으로서 그녀의 마음을 대변했다. 이사회장에서 한 마디도 못하며 적어놓은 종이를 만지작거릴때, 보고서를 발행하기로 결정한 후 이사진과 얘기할 때, 영화는 그녀의 손을 비췄다. 두 장면 모두 그녀는 손을 벌벌 떨었다. 그녀의 마음은 똑같이 흔들린다. 하지만 인정받지 못해도, 없는 사람 취급을 당해도 무너지지 않고 자리를 지키다보니, 그저 예전보다 상황을 더 '잘' 견디게 된 것이다.
- 그녀, 문을 열다
이사진들과 기자들이 자연스레 캐서린 곁으로 모여들기 시작하면서부터 영화에 ‘문’은 등장하지 않는다. 여전히 손은 떨어도 그녀는 문을 열고 경계 속에 녹아든 것이다. 50년이 지난 지금, 이제 시대는 변했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노력하고 있고, 두 세상의 교집합은 커져가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시대의 캐서린을 잊지 않아야 한다. 자신도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세상에서 끝까지 자존을 지켜냈던 그녀를, 영화 <더 포스트>를 통해 다시 한 번 응원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