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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smi Jun 20. 2021

능력주의는 우리 사회를 더 공정하게 만들지 않았다

'정의란 무엇인가'로 유명한 마이클 센델의 8년만의 신작이다.  


선물 받았을 당시에는 따끈따끈한 최신작이었는데, 책을 다 읽고 후기를 쓴 지금은 .. 최신작이라고 말하기엔 좀 머쓱해졌다. 원래 글을 빨리 읽는 편인데, 이 책은 유독 완독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문장 하나하나를 제대로 읽고 이해하고 싶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번역이 정말.. (말잇못)


'정의란 무엇인가' 하버드 수업 영상을 보면 학생들이 손을 들고 자유롭게 의견을 제시하곤 한다. 나도 그 학생 중 한 명이 된 것처럼, 마이클 센델과 대화하고 토론하듯 읽었다.

책이 말하고자 하는 메세지는 분명하다.



오늘 날 우리가 칭송해 마지않는 "능력주의"는 겉으로는

기회의 평등과 공정한 사회를 약속하는 듯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

능력주의 사회는 능력의 유무로 사회 구성원들을 철저히 구분 지으며,

이는 과거의 부유층과 빈민층을 나누는 기준보다 어떤 면에서 더 강력하고 악랄하다는 것.




1. 능력주의가 더 강력한 이유 - 부유층은 능력을 가지기에 더 쉽다. 능력보다는 '학력'이라는 말이 더 맞는 표현이지만, 능력을 판단하는 가장 쉬운 지표는 학력이기에 (이는 또 다른 사회 문제인 학력주의로 이어진다..), 결국 부유층의 자녀들은 기부 입학이나 대학 입시에 철저히 대비하는 준비성으로 명문대 입학으로 대표되는 고학력의 타이틀을 얻기가 부유하지 않은 집안의 자녀보다 쉽다. 그러니 누구든 능력만 있으면 사회의 높은 곳까지 올라갈 수 있다!(이를 계층간의 이동성이라고 부른다)는 말은 반쯤 거짓인 것이다.


나의 의견: 동의한다. 통계적 자료를 봐도 그렇고, 주변을 봐도 그렇다. 요즘 부잣집 애들이라고 해서 돈 펑펑 쓰면서 살아 갈 궁리만 하지 않는다. 선택할 수 있는 다양한 옵션이 있으니 자신의 재능을 찾을 확률도 높을 것이며, 진로를 선택하고 나면 든든한 서포트를 받을 가능성도 크다. 한 때 유행했던, 그리고 아직도 여전히 유효한 '수저론' 만 봐도 알 수 있 듯,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도 능력이지!" 혹은 "전생에 착한 일을 많이 했나 보네" 라고 말하며, 이 부분에 대해 그냥 타고난 운명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크다.




2. 능력주의가 더 악랄한 이유 - 능력주의 사회에서 높게 평가되는 능력이 부재한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 대한 변명을 할 기회조차 없다. 봉건제의 시대에 살던 평범한 농민은 분노했다. "지주로 태어나면 다냐?" 자본주의의 시대에 사는 평범한 서민은 불평한다. "돈 많으면 다야?"

능력주의의 시대에 사는 비엘리트, 무능력자는 그저 수긍할 뿐이다. "능력 있으면 다지. 귀족의 지위나 집안의 부유함은 타고나는 거지만 능력은 본인의 노력으로 일궈낸 것이니 그것을 누릴 자격이 있어."


나의 의견: 능력은 운명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흙수저여도 열심히 공부해서 명문대에 간다면, 사법고시를 통과한다면, 그들은 자신의 운명을 바꿀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가업을 이어 받은 어떤 기업의 후계자보다 더 존경할 만하다고 믿는다. 타고난 운명을 온전히 자신의 능력으로 개척했기 때문이다. 이런 것이 가능한 사회는 더 건강하고 공정한 사회인데, 더 악랄하다니? 동의할 수 없다.


1. 사다리는 마련되어 있고, 그걸 오르는 것은 자신의 몫이니, 오르지 못한 것도 곧 자신의 몫이다. 그러니 불평말고, 이 사회가 원하는 능력을 배우고 갖추면 된다!
2. 사회가 원하는, 그리고 높이 평가하는 능력을 갖추고 태어난 것도, 그 능력을 가꿀 기회가 있었던 것도 온전히 자신의 노력이라고 볼 수 없다. 개인이 컨트롤할 수 없는 상황적인, 혹은 운적인 요소가 크게 작용했을 수도 있다.


1번은 능력주의의 옹호자, 2번은 능력주의 비판자의 입장과 가깝다.


책을 읽기 전, 그리고 중반까지 나의 입장은 1번에 가까웠다. 내가 공부를 꽤 잘 했기 때문일까? 하지만 내가 만약, 펜트하우스처럼 노래를 잘 하는 것이 최고의 명예인 세상에 태어났다면? 롤스라는 철학자는 자신이 사회에서 어떤 계층에 속할지 모르는 상태인 '무지의 장막'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롤스는 무지의 장막 뒤에서 사람들은 어떤 계층에도 특별히 유리하거나 불리하지 않은, 조화로운 사회 계약을 체결할 것이라고 보았다.


인간의 역사에는 수많은 형태의 사회들이 있었다. 신이 인간보다 위에 있었던 중세 시대에서 르네상스를 거쳐 인간을 중요시 하는 근대로 넘어 왔다. 근대에선 강대국이 약소국을 침탈하는 제국주의가 팽배했다. 백인은 흑인을 노예화했다. 노예 해방과 여성 참정권을 시작으로 인간이라면 누구나 누릴 수 있는, 인권이 보장받을 수 있게 되었다. 민주주의가 등장했으며, 대립의 시간 끝에 자본주의가 승리했다.


내가 무지의 장막 뒤에서 인간 역사를 통틀어 어떤 시대에 태어날 지 선택할 수 있다고 하면, 적어도 중세 사회는 아닐 것이며, 여성이 참정권이 보장되지 않는 사회도 아닐 것이다. 공산주의 사회도 아닐 것이다. 아버지의 직업이 자식에게 그대로 대물림되는 사회도 싫다.


내가 이미 역사의 흐름을 다 알고 있고, 인간은 언제나 발전을 거듭해 왔으므로, 지금이 가장 낫다는 말을 하려는 건 아니다. 유토피아가 아닌 이상, 어떤 사회든 문제는 존재할 것이다. 만약 이 글로벌 능력주의 사회가 갖고 있는 문제가 그렇게 심각하다면, 이것 말고 다른 대안은 무엇인가? 책 전반에서 마이클 센델은 능력주의의 문제점을 지적할 뿐, 대안을 제시해 주지 않았다.



그래서 어쩌라고! 어떡하라는 건데??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도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그는 나름의 대안을 제시한다. 제안이라기보단 그가 생각하는 이상향이라고 부르는 게 맞을수도 있겠다. 능력의 유무, 혹은 능력의 정도가 아닌, 사회에 한 기여로 충분히 존중 받는 사회가 바로 그것이며, 나는 이에 어느 정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능력주의 사회에서 부는 재능과 노력의 상징, 가난은 나태의 상징이 된다. 하지만 우리는 부지런하고 성실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을 알고 있다. 우리는 남들에게 뒤쳐지기 않기 위해, 무한히 노력해야 하는 경쟁 속에 산다는 것의 불행함에 대해 알고 있다.


능력으로 운명을 바꾸는 데 성공한 소수의 사람들 말고, 그러지 못한 다수의 사람들의 입장을 생각해 보자. 그들의 삶이 불행한 것은 태어날 때부터 사람의 계급이 정해져 있는 사회 제도 때문에, 혹은 부를 가진 사람이 사회를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시스템 때문이 아니다. 노력하지 않은 나 때문이다. 능력주의적 오만은 정부와 기업이 져야 할 책임을 개인에게 전가한다. 예컨대 공부를 못해서, 혹은 집안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4년제 대학 진학을 하지 못하고 서비스직 아르바이트를 하는 사람은 손님에게 폭언을 듣거나 본사에서 내려온 매니저한테 부당한 대우를 당해도 "내가 못배운 탓이지." 라고 스스로를 패배에 합리화시킨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살았던 아파트의 엘레베이터가 고장난 적이 있었는데, 또래 친구의 어머니가 엘레베이터 수리공을 보고 아들에게 "공부 안하면 저런 일 하는거야~" 라고 했던 기억이 다시금 생각났다. 그런 말을 입 밖으로 내진 않았더라도, 나 또한 비슷한 생각을 한 적이 있다는 사실 또한. 능력주의에, 학력주의에, 그리고 경쟁 사회에 익숙해져 있던 나 자신을 돌아 보는 기회를 준 이 책이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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