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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설이별이 Jul 25. 2019

기쁨과 슬픔 사이. 그리고 여행.

나를 죽이지 못 하는 고통은 나를 성장시킨다.

"색약 있는 애들은 나가"


1학년 방학식 날, 우리는 1년 간 준비한 현대자동차, 삼성전자 추천서를 받기 위해 모였다. 물론 성적이 부족한 친구들은 기숙사의 짐을 싸서 집으로 갔고, 몇 명만 남아 선생님이 무슨 얘길 할까 두근거리던 마음으로 앉아 있었다. 모두가 그렇듯, 모두가 꿈꾸던 자리였다. 나는 안타깝게도 추천서를 받을 수 없었다. 색약 때문이었다. 처음엔 화가 났다. 이게 취업과 무슨 상관이 있냐고 따져 물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그래도 추천서를 줄 수 없다는 말이었다. 선생님은 나를 보건실로 끌고가 색약 검사 책을 읽어보라고 시켰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나 돼지가 된 기분이었다. 난 당연히 아무 숫자도 읽을 수 없었고, 다른 색을 따라 선을 잇지도 못했다. 눈물이 흘렀다. 고등학교에 입학해서 보냈던 나의 하루하루가, 나의 1년이, 나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었다. 나는 아무도 없는 기숙사에 들어와 한참을 울었다. 처음으로 좌절을 느꼈다. 취업한 친구들이 얘기해주길, 합격자들 중 색약인 학생도 다수 있었고, 색약 있는 친구들에게 추천서를 줄 수 없다고 한 선생님은 이미 교육청으로 전근 간 이후였다. 따져 물을 대상이 사라진 울분은 나 혼자 감당했다.


회사에 지원한 친구들은 희비가 갈렸다. 합격한 친구들은 기뻐했고, 떨어진 친구들은 슬퍼했다. 다른 친구들은 축하와 위로를 동시에 건넸다. 나는 그 사이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진심으로 축하해주지 못했다. 그리고 진심으로 위로해주지도 못했다. 아직 나의 상처도 아물기 전이었다.


학교 기숙사, 2015년




나는 그 사이 한 번의 여행을 다녀왔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었다. 그저 친구와 서울여행을 계획하다 생각보다 비용이나 시간이 많이 들어, 이럴 거면 일본에 가자고 한 것이 시작이었다. 좋은 경험이었다. 우울한 일상을 다시 환기시키고 새롭게 출발할 수 있었다. 이때 여행을 가지 않았더라면, 내가 계속 공부할 의지를 가지지 않았을 거라 생각한다. 그리고 지금까지 떠났던 많은 여행과 인연, 그러면서 느꼈던 감정들. 그 시작이 일본 여행이었다. 물론 지금 일본 여행이 좋다고 말하기엔 시기가 시기이니만큼 조심스럽지만, '일본'여행이 좋았다는 것이 아니라 일본'여행'이 좋았다는 말이다. 그땐 어딜 갔어도 좋았을 것이다.


일본 여행 후 새로운 마음으로 공부를 시작했고, 우연히도 색약 때문에 추천서를 받지 못한 다른 친구와 같은 기숙사가 되어 공부했다. 그러던 중 우연히 본 '청소년 러시아 국제교류' 공고를 보고 지원했다. 서류와 면접을 거쳐 4박 5일 간 블라디보스토크에 다녀왔는데, 나중에 따로 글을 올릴 생각이지만 나에게 있어 매우 중요한 것을 느낀 활동이었다.


내가 생각보다 사람 만나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 마치 어릴 때의 나처럼 말이다. 이때의 경험을 통해 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재밌게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연락을 이어오는 소중한 사람들을 만난 것. 사람. 이것 하나로도 내게 너무나 소중한 경험이었다.




내가 1학년 때 취업을 했더라면 어땠을까. 실패를 딛고 일어선 경험이 없고 성공만 이어갔다면 어떤 사람이 됐을까. 지금과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은 안됐을 것 같다. 아마 내가 1학년 이후로 경험했던 것들과 느꼈었던 감정은 없었지 않았을까. 1학년 때의 나는 눈을 가리고 앞만 보며 달리는 경주마였다. 그러다 그 가리개를 벗어던지니 또 다른 세상이 보였다. 오로지 취업, 대기업, 공부, 자격증... 이런 것들에서 벗어나 나 자신을 돌아볼 기회가 돼준 나의 '실패'에 감사하다. 



나를 죽이지 못 하는 고통은 나를 성장시킨다.

-니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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