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젬마 Aug 30. 2020

촌스러운 사람들

진심의 결과가 이런 거라면

    우리는 아마 2017년인지 2018년인지를 떠나보내고 있었다. 술을 잘 못하는 나는 안주를 너무 많이 먹어 토할 것 같았다. 배가 부르면 그만 먹어야 하는데, 이상하게 술자리에서는 남들이 술잔을 드는 템포에 맞춰 멋쩍은 손이 포크를 들게 되었다. 꾸역꾸역 음식을 밀어 넣다가 역시 나는 좀 망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물몇 살이나 먹고는, 주면 주는 대로 다 받아먹고 결국 탈이 나는 엄마네 뚱보 고양이 같은 짓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다 망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 자리에 나 혼자가 아니었다. 모두에게 변화가 많은 때였다. 우리는 진로가 확실하거나 불확실했고, 연애를 했거나 못했으며, 가족들과 사이가 좋거나 나빴고, 친구들과 아주 가깝거나 또 아주 멀었다. 물론 우리의 인생에 아직 망하지 않았고 창창하기까지 한 부분들은 아주 쌔고 쌨으나, 사람이 알딸딸할 때에는 원래 곧잘 비관에 빠지기 마련 아니겠는가. 맥주잔을 부딪칠 때마다 짠! 뒤에 습관처럼 "아, 근데 망했다"를 덧붙였다.


    다 함께 조금씩 망하고 있는 이 친구들이 너무 좋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한 명이 망했다! 하면 아냐, 잘할 수 있어, 하고 토닥여놓고 이내 또 나야말로 망했다! 하는 이 사람들이 갑자기 너무너무너무 좋았다. 원래도 좋았지만 취할수록 더 좋았다. (나는 굉장히 가성비 좋게 취한다.) 너무너무 좋아지니까 동시에 너무너무 무서워졌다. 내가 이걸 다 잃어버리면 어떡하지? 내년엔 여기에 나 혼자 앉아서, 친구들까지 다 잃다니 이젠 정말로 정말로 망했다! 하고 혼술이나 하고 있으면 어떡하지? 살면서 성공적으로 수습했거나 수습하지 못한 수많은 실수들을 떠올렸다. 내가 성인군자도 시대의 현자도 아니고, 아무리 노력해도 얼마든지 또 실수를 할 것만 같았다. 아니, 할 것이었다. 조금 덜 심각한 실수를 하기를 바랐지만 그건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다.


    "내가 뭔가 바보 같은 짓을 해서 친구들이 나를 떠나면 어떡하지?"


    다 같이 큭큭큭 웃고 다시 한번 "망했다! 인간관계도 망했다!"를 외치며 건배한 뒤, 친구가 그랬다.


    "아냐, 넌 할 수 있어. 세련된 사람이니까."


    실수 따위로 떠나지 않겠다는 말보다 나의 노력은 성공적일 거라는 덕담이라니..., 역시 그에게 큰 실수를 했다가는 얄짤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술이 확 깼네. 그러나 그것이 그 말에 무게가 실리는 이유이기도 했다. 나도 확신치 못하는 미래의 내 실수를 그는 별로 가정하고 있지 않았다. 그가 보기에 나는 딱히 그럴만한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겠지? 그의 말을 오래 생각했다. 주변의 세련된 사람들을 보면서 결론짓기를, 세련됨이란 입장의 차이를 고려하는 배려심이고, 사람을 다면적이고 입체적으로 볼 수 있는 통찰력인 것 같았다. 어쨌든 그의 말은 그날의 내게 큰 위로였고, 그 이후를 사는 내게 큰 확신이자 방향성이었다. 관계에 있어 불편한 일이 닥치면 나는 스스로에게 말을 건넸다. "너는 세련된 사람이야! 세련된 사람은 이럴 때 어떻게 할까!?"


    그러나 친구의 사랑 넘치는 믿음을 배반하고, 나는 여전히 촌스러운 실수를 많이 했다. 다정이 앞선 나머지 남이 바라지 않는 호의를 너무 많이 베풀거나, 너무 좋아한 나머지 굳이 모든 것을 다 알고 싶어 졌다. 그리고 이런 촌스러움에서 나의 할머니를 보았다. 할머니는 내가 아는 한 가장 촌스러운 방식으로 사랑을 주는 사람이다. 당사자와 상의도 없이 당신의 호의만으로 많은 일을 결정하고, 입지 않을 옷들과 쓰지 않을 물건들을 비싼 돈을 주고 잔뜩 사서 나에게 안긴다. 속으로만 담아두어야 할 "진심 어린 충고"를 굳이 하거나, 나의 섭섭한 기색에 벌컥 화를 내기도 한다. 왜 나의 사랑을 받아주지 않느냐고.


    촌스러울 때마다 책을 읽었다. 남들이 각자 어떤 방식으로 세련되고 또 촌스러운지,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다음번에는 조금 덜 촌스럽기 위한 묘수가 생각나기도 한다. 스스로의 촌스러움을 못 견디고 괴로워하자면 남들을 향한 화가 조금 풀어지기도 한다. 우리는 모두 각자만의 방식으로 조금씩 촌스러우므로, 선을 넘는 무례함이나 악의라고까지 여겨왔던 것들이 사실은 주체하지 못하는 사랑과 내 사랑을 알아달라 떼쓰는 촌스러움이었을지도 모른다.


    나의 결혼식장에서 웨딩드레스를 입은 나에게 다짜고짜 "아이를 최소한 셋은 낳아야 식구가 다복하게 산다"라고 했던 처음 보는 할머니에 대해 분노의 일기를 적었던 것 같다. 그러나 내 손등을 쓰다듬는 그것도 사실은 다정함이었을 것이다. 아마 그것이야말로, 처음 보는 내가 딸 같고 손녀 같아서 한 얘기였을 거다. 그것이 그녀가 아는 최대치의 행복이고 그것을 나에게 주고 싶었을 테니까. 그녀는 21세기를 사는 27세의 직장인 여성이 원하는 행복을 가늠해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세련됨은 표현 방식을 섬세하게 갈고닦아온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것 같으므로, 명백한 잘못인 무례함이나 악의와는 달리, 세련되지 못함은 누구의 잘못이 아니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동시에, 진심의 결과가 나를 다치게 한다면 포용하지 않기로 한다. 누구의 잘못도 아닌 일에 파들파들 분노하고 싸우면서 살고 싶지도 않고, 세련되지 못한 호의에 불편한 마음이 든다고 해서 부족한 내 아량을 탓하며 살고 싶지도 않다. 삼십 대에는 조금만 더 담백한 태도로 살고 싶다. 나에게도 남에게도 조금 더 너그럽고 보다 더 단호해지기로 한다.


    "아, 이것이 서로의 최선이군요. 진심의 결과가 이런 거라면 유감입니다."

작가의 이전글 **<시인 보호 구역 vol.2>에 에세이가 실렸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