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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젬마 May 18. 2022

첩첩산중, 미국에서의 세 번째 이사

항상 현실은 시트콤을 능가하지

    꿈자리가 뒤숭숭하다 했다. 그런다 한들 이제 와서 이삿날을 바꿀 수도 없었기 때문에 미신 따위 신경 안 쓰는 쿨한 현대 여성인 척하면서 출근을 하는 게 최선이었다. 그렇다, 나는 이사 당일에 출근을 했다. 학생일 때부터 아르바이트를 하던 곳이긴 했지만 졸업하고 처음 정식으로 출근하는 주였다. 친절한 나의 상사는 한 주 쉬고 그다음 주부터 나와도 된다고 했지만 의욕이 앞서서 그러고 싶지가 않았다. 시급을 받는 계약직이긴 하지만 석사를 땄다고 페이가 그럴듯하게 올랐기 때문에 한주라도 더 일찍 시작해서 자동차 할부금에 보태야 하기도 했다. 대신 직장을 옮기게 된 남편이 집에 있었다. 벌써 세 번째 이사이니 유홀에서 트럭을 빌리는 것도 무버들을 고용하는 것도 경험이 있었다. 짐은 다 싸 두었다. 그러니 남편이 트럭을 렌트해 집에 오면 예약한 무버들이 와서 짐을 싣고, 남편이 트럭을 운전해 새 동네까지 짐을 운반하면 새 동네에서 예약한 무버들이 와서 짐을 내린다는 계획이었다. 국제학생 오리엔테이션 주간이라 한 시면 퇴근하는 내가 합류해 짐 정리를 함께할 테니 괜찮을 것 같았다. 그리고 괜찮았어야 했다. 그게 전혀 괜찮게 흘러가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은 오후 한 시였다. 오리엔테이션이라 부산스러웠던 데다가 새로운 사람들을 너무 많이 만나 이미 파김치가 된 채 주차장으로 걸어가면서 남편한테 전화를 했는데 이제야 짐을 다 실었다는 게 아닌가. 아침 8시부터 일을 시작했는데 어째서 한시가 되어서야 짐을 다 실었다는 건지 짜증이 날 뻔했는데 이미 짜증이 날 대로 난 남편이 한숨을 푹푹 쉬며 이제부터 13톤 트럭을 몰고 두 시간을 갈 참이라고 하여 잠자코 끊었다.


1. 길을 잃었다 뚜비두밥뚜밥

    한 시간 반을 달렸다. 점심도 제대로 못 먹고 이미 피곤한 데다 아직 익숙하지 않은 새 차였다. 초행길이고 혼자서 한 시간 이상 운전을 하는 건 처음이기도 했다. 도대체 8시부터 1시까지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걱정도 됐다. 영 좋지 못한 상태로 새 아파트 단지에 도착했는데 게이트 문이 닫혀있었다. 게이트 키든 비밀번호든 뭐든 필요했는데 열쇠는 남편한테 있을 테고 나는 아직 받은 게 없었다. 짐을 내리느라 정신이 없는지 남편은 전화를 죽어도 안 받았다. 슬슬 짜증이 날 때쯤 겨우 통화가 됐고, 그렇게 게이트를 넘자마자 나는 길을 잃었다.


    그렇다, 나는 지옥의 길치다. 사전에 딱 한 번 집 위치를 보러 왔을 때도 이사 갈 집이 건물의 뒷면에 꽁꽁 숨어있어서 한참 헤맸다. 거길 나 혼자 찾아가기는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아파트 단지의 입구에서 출구까지 수도 없이 뺑뺑 돌아도 우리 집이 안 나왔다. 배는 고프지 목은 마르지 안 하던 장거리 운전에 허리는 아프지 슬슬 서러워졌다. 무슨 아파트가 104호도 있고 106호도 있는데 105호가 없나. 100단지를 넘어가면 200 단지가 나올 뿐이었다. 남편은 이미 무버들과 짐을 내리고 있어서 나를 데리러 나올 형편이 아니었다. 주차장에 커다란 유홀 트럭이 있을 테니 찾아보라고만 했다. 거의 울기 일보 직전 건물 뒤쪽으로 걸어가야 나오는 우리 집을 드디어 발견했을 때 나보다 더 울기 직전인 표정의 남편을 보았다.


2. 결국 혼자 나른 짐들

    남편은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온몸은 땀에 절고 얼굴은 붉으락푸르락 했다. 만나면 내가 오늘 일도 하고 길도 잃고 얼마나 힘들었는지 눈물의 하소연을 해주려고 했는데 무슨 일인지 묻지 않으면 큰일 날 것 같은 꼬락서니였다. 도대체 이게 다 어떻게 된 일인지 물었더니 그의 설명은 이랬다. 예산을 좀 아껴보려고 저렴한 신생 업체에서 무버를 예약했더니 초짜도 이런 초짜가 따로 없었단다. 짐을 나르는 순서도 방법도 몰라서 잡동사니부터 다 싣더니 가구가 들어갈 차례가 되니까 실었던 걸 다시 다 내렸단다. 부부였는데 자기들끼리 일하는 방식을 가지고 옥신각신하다 말다툼까지 했단다. 그 와중에 내 책상은 부서졌다. 하지만 지금 부서진 책상이 문제가 아니었다. 남편은 다음 예약 시간을 못 맞출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들었다. 일부러 예약 앞뒤에 여유시간을 한참씩 두었지만 이렇게라면 오늘 내로 짐을 싣지도 못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그는 팔을 걷어붙이고 짐을 나르기 시작했다. 먼젓번 이사 때는 전문 무버 두 명이서 한 시간 반 내로 착착착 쌓아서 실어주던 짐들을, 초짜 무버들이 부부싸움을 하는 동안 혼자 나르기 시작했다. 물이고 컵이고 다 싸버려서 마실 물도 없었다. 점심? 당연히 못 먹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무사히 새 집까지 갈 수만 있다면.


3. 고양이, 탈출!

    무버들은 부부싸움을 하고 남편은 짐을 나를 동안 고양이들은 화장실에 있었다. 이사하는 동안은 주위가 산만하고 문도 계속 열어둬야 할지도 모르니 하룻밤만 빈 집에 애들끼리 재우고 다음날 와서 데려가기로 했다. 짐을 싣는 동안은 현관문을 열어놔야 하니까 비좁은 이동장 대신 물도 마실 수 있고 볼일도 볼 수 있는 화장실에 잠시 넣어둔 것이다. 그리고 무버들에게 신신당부를 했다. 이 화장실에는 실을 짐은 없고 겁먹은 고양이들만 있으니 절대로 문을 열지 말아 달라고.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무버가 그만 문을 열어버린 것이다. 밖에서 나는 낯선 소리에 이미 겁을 먹고 문을 박박 긁고 있던 슈가는 문이 열리자마자 튀어나왔다. 폭주하는 슈가가 나가지 못하도록 남편은 아슬아슬하게 안방 문을 닫았지만 안방엔 아직 짐들이 남아있었다. 어떻게든 슈가를 다시 화장실에 넣어야 했다. 그러나 겁먹은 고양이가 그렇게 만만할까. 어르고 달래고 하다 하다 안 돼 붙잡으려 해도 슈가는 요리저리 도망 다니며 요지부동인 것을. 문밖에는 책상을 부수는 무버가 있고 문 안에는 까딱하면 집 밖으로 도망칠 기세인 고양이가 있다!


탈출한 고양이
데려오던 날 고속도로에서 한 시간 반을 내리 쿨쿨 자던 무던 왕 고양이
둘다 너무 고생했어

4. 설치는 셀프

    이 모든 것을 수습한 뒤 우리는 부러진 책상과 덩그러니 놓인 상자에 둘러싸여 배고프고 지친 채로 앉아있었다. 손 좀 씻고 온다던 남편은 화장실에 들어가더니 헛구역질을 했다. 일단 밥을 먹자고 했다. 뭐라도 먹어야 짐을 풀 것 같았다. 그런데 인터넷 기사가 오기로 했다는 것이 아닌가.


    “몇 시에?”

    “두 시부터 여섯 시 사이에…”

    

    ... 지난번 이사에 새로 산 세탁기를 배달시켰을 땐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 사이에 온다고 했었으니 이만하면 양반이다. 그래서 물도 없고 음식도 없이 6시까지 널브러져 앉아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도착한 기사는 택배 상자 하나만 안겨주고 돌아갔다. 설치는 셀프란다. 그걸 설치하는 데 이틀이 걸렸지만 일단은 밥을 먹기로 한다.


5. 대형사고

    밥을 먹으려면 우선 트럭을 반납해야 했다. 남편은 트럭을 나는 내 차를 운전하여 반납소에서 만나 내 차를 타고 식당으로 가기로 했다. 반납소에 도착했는데 남편 차가 안보였다. 여기서 혼자 오래 기다리고 싶지가 않았다. 허허벌판에 허름한 건물 하나 덜렁 있는 곳이었는데 영업시간이 지나 지점은 이미 문을 닫았고 옆에는 공동묘지였다. 점점 어두워지는데 사람 한 명 없는 공동묘지 옆에 차를 대고 있기는 싫었다. 전화를 걸었다. 15분 늦는단다. 이유는 와서 설명해준단다. 왠지 이유를 알 것 같았지만 이 강렬한 직감이 틀리기만을 바라며 팟캐스트 볼륨을 높였다. 뒤늦게 도착한 남편은 내가 가장 듣고 싶지 않았던 말을 전했다.


    “차를 빼다가 주차된 이웃 차를 박았어.”


6. 초대형 사고

    나는 이제 탓할 기운도 없고 수습할 정신도 없었다. 배고프고 힘들어서 기절할 것 같았다. 도저히 햄버거 따위론 힘이 안 날 것 같아서 큰맘 먹고 가격대가 있는 K바비큐집에 가기로 하고 급히 차를 몰았다. 그사이 5년쯤 늙은 남편은 옆자리에서 핸드폰으로 보험 정보를 찾고 있었다. “보험 처리하면 될 것 같아” “얼마나 커버될 것 같아?” “조금만 긁은 거라 많이 안 비싸지 않을까” 같은 말만 간간히 주고받는데 갑자기 남편이 불길한 소리를 했다.


    “아파트 열쇠가 어디 갔지?”


    남편은 점점 당황하더니 시트 밑, 수납장 안, 바지 뒷주머니까지 샅샅이 뒤졌다. 엄습하는 직감을 애써 모른 체하며 당황하지 말고 잘 찾아보라고 침착하게 말했다. 남편은 땀을 뻘뻘 흘리면서 극적으로 절망했다.


    “없어…”

    “… 트럭에 두고 내린 것 같아?”

    “응…”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일단 고속도로를 계속 달렸다. 남편은 옆에서 한숨을 쉬다가 마른세수를 하다가 “바보 같은 새끼… 난 진짜 멍청한가?”같은 말들을 중얼거렸다. 극도의 피로와 스트레스에 목소리가 울먹울먹 했다. 하지만 얘가 이대로 정신력을 놓아버리면 난 혼자 집에 가서 침대와 세탁기를 조립할 수 없었다. “괜찮아, 무슨 방법이 있을 거야. 너무 힘들어서 실수한 거지” 하고 침착한 위로의 말을 전했으나 내 속은 아비규환이었다. 아파트 오피스도 문 닫고 트럭 반납소도 문 닫았는데 모텔을 잡아야 하나? 나 내일 출근인데? 더 늦기 전에 매니저한테 연락할까? 그러게 물건 좀 평소에 잘 챙기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지금 그렇게 쏘아붙였다간 우리 길바닥에서 이혼할 수도 있겠지? 와, 어떡하지?


    우리의 이사는 자물쇠공을 불러 쓰지 않았어도 될 70달러를 쓰고 집에서 여분의 키를 챙겨 나온 뒤 9시가 넘어서야 첫끼를 먹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물론 건조기를 설치하려니 무슨 규격이 안 맞아 부품을 사 오고, 그게 또 안 맞아 교환하러 다녀오고, 침대 나사를 잃어버려 퍽 치면 쓰러지는 엉성한 뼈대 위에 아슬아슬하게 매트리스를 올려놓고 며칠을 지낸 건 또 다른 얘기다. 다시는… 다시는 이사 같은 거 안 하고 싶다.


새 동네 길이 참 푸릇푸릇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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