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에서 내가 아무 글도 쓰지 않은지 몇 달이 지났다며 계속 알림을 보내왔는데 무시했다. 요샌 엄마랑 통화하다가도 한국어 단어가 생각이 안 나 "그거 뭐지?"를 반복하는데 내가 뭘 어떻게 쓸까. 한국어로 쓰인 책은 6개월간 한 권도 읽지 못했다. 새 직장에 적응하고 있어 그간 너무 바쁘기도 했고 뭘 쓰는 게 이제 별로 재미도 없다. 내 얘기 하나도 특별할 것 없고 그 특별할 것 없음이 지나치게 안락하다. 30대인가 보다. 앞으로도 별 걸 쓰게 될 것 같지 않긴 한데 오늘 새삼스럽게 블로깅을 하는 것은, 자기 글을 봐달라는 내 친구 피슈에게 "글을 썼다니 멋진 일이지만 내가 그걸 봐서 어쩌지? 나 문학 손절한 지 500년짼데" 하고 농담을 했더니 그가 "담배를 끊지..."하고 대답해서이다. 내가 문학과 뭐 그렇게 절친했던 적도 없다는 건 둘째 치고, 나는 비흡연자이므로 이 대답을 "(네가 그걸 끊느니 내가) 담배를..."로 받아들였다. 하기사 취미 좋다는 게 뭐라고. 못해도 즐겁고, 안 즐거우면 쉬고, 휴식 후 전보다 더 못해도 또 얼렁뚱땅 즐거운 게 취미인데 내가 오늘 나의 근황에 대해 쓰지 못할 게 또 뭔가. 아무도 읽지 않는다 해도!
매일매일 일희일비하면서 살고 있고 매번의 희와 매번의 비가 너무 피곤하고 너무 버겁고 근데 또 너무 재밌고 그렇다. 너무 큰 슬픔(이를테면 할머니가 돌아가신 것)이나 남과 얽힌 일(이를테면 직장 내 드라마)에 대해서는 쓰고 싶지 않으니 병원비 얘기부터 좀 해볼까. 때는 바야흐로 작년 8월. 직장도 생겼겠다 병원에 간단한 정기검진 정도는 받으러 다니며 살고 싶어졌다. 이사 간 직후라 새로운 병원을 찾아야 해서 산부인과 검진을 위해 5월부터 동네 병원에 전화를 돌리기 시작했다. 새로운 환자는 안 받는다는 병원과 리뷰가 너무 안 좋은 곳을 거르고 한 군데에서 3개월 후인 8월에 예약을 잡아줄 수 있댔다. 닥터 오피스가 따로 나와있을 뿐 인근의 대학병원 소속인 것은 나중에야 알았다. 통근이 워낙 장거리라 이 검진을 위해 반차를 써야 했다. 간단한 팹스미어를 했다. 그리고 며칠 후 전화가 왔다. 세포가 충분히 채취되지 않아 재검사를 위해 다시 방문해 달랬다. 혹시 몰라 재검을 받으면 내가 돈을 두 번 내냐고 물어봤다. 병원 실수라 그럴 필요 없다고 했다. 직장 일정과 겹쳐 두 번째 방문은 겨울방학에 맞춰 12월에 했다. 1월에 병원비 고지서를 받았다. 해달라고 하지 않은 성병검사까지 하고 해당 금액만큼 청구되었지만 어쨌든 성병이 없다니 좋은 일이고 가뜩이나 바쁜데 이것 가지고 따지고 싶지 않아서 그냥 냈다. 500달러가 꽤 넘는 금액이었다. 예전에 다른 병원에서 팹스미어만 했을 때는 100달러 언저리에서 끝났기 때문에 의문점이 많았지만 따지기 시작하면 인생이 피곤해질 거라서 병원을 바꿔야지 다짐만 했다. 그런데 얼마 전에 같은 금액과 같은 내역이 적힌 청구서가 또 날아왔다. 그러니까 병원 측 실수로 두 번 방문하게 해 놓고 그 두 번의 검사비용을 몽땅 청구한 것이다. 그리고 이 고지서를 받아보던 순간에 나는 이미 극도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것이 그랬고 그와 관련한 서류 처리를 위해 재외공관과 씨름을 해야 했던 일이 그렇고 자동차 문제가 그랬다. 이 하나하나가 일일이 슬픔이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것이 3월. 멀리 있느라 실감이 채 나기도 전에 가족들한테 전화가 왔다. 짐작 가능한 그런 이유로, 상속포기 신청을 해야 한단다. 다들 별로 어렵지 않은 절차라고 했다. 감사하게도 사촌오빠가 총대를 매기로 했으므로 변호사를 통해 전달받은 양식에 사인만 하고 가족관계증명서와 함께 제출하면 된단다. 가족들 모두 하루이틀 만에 끝냈다. 그런데 나는 해외에 거주 중이므로 영사관 공증이 필요하단다. 방문이 어려우면 아포스티유 공증이라는 것도 있단다. 그런데 그걸 받으려면 공동인증서가 필요했다. 가족관계증명서를 받을래도 공동인증서가 필요했다. 공동인증서를 받으려면 영사관 방문이 필수였다. 영사관은 차로 세 시간 반에서 네 시간 정도 걸리는 곳에 있는데 휴가를 쓰는 건 문제도 아니었다. 예약을 안 받아주는 게 문제였다. 상속포기는 사망일로부터 3개월 내에만 하면 된다며 가족들이 아직 시간 많으니까 천천히 하라고 달랬다. 하지만 영사관 예약은 그 시점에서 3개월 후까지 단 하루도 열린 날이 없었다. 가족관계증명서라도 한국에서 가족들이 해결해보려고 했지만 신청인의 신분증 원본이 필요하대서 그것도 잘 안 됐다. 너무 예민해지니까 방법이 있을 거라는 가족들의 말까지 그저 순진한 소리로만 들려 신경질이 났다. 당신들은 한국에 거주하는 한국 시민으로서 한국에서 일처리를 하려니까 그렇지! 타국에서 재외공관과 뭘 하는 건 차원이 다른 얘기라고! 하고 소리 지르며 하루이틀은 엉엉 울었다. 가족관계증명서는 영사관에 우편 신청을 해놓았지만 4월에 신청한 이것은 6월 말에야 도착하게 된다. 결국 가족관계증명서는 대행사를 통해 한국에서 pdf로 받고 영사관 예약은 가까스로 누가 취소한 자리를 잡으면서 이 일은 해결되었다. 나는 내내 할머니가 보고 싶어 슬프다가 할머니한테 견딜 수 없이 화가 나다가를 반복하며 봄을 보냈다.
자동차는 또 무슨 일이었는고 하니... 아무리 중고라지만 연식도 얼마 안 되고 구입한 지도 몇 달 안 된 내 차가 출근길에 다짜고짜 멈췄다. 한 시간 반의 출근길 중 고작 30분쯤 왔을 때였고 양 옆으론 울창한 숲밖에 없는 고속도로 한복판이었다. 액셀을 밟아도 속도가 점점 주는 차를 갓길에 대고 직장에 전화를 했다. 남편한테도 전화를 했다. 내 차는 견인됐고 나는 남편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당장 출근을 하려면 렌터카가 필요했다. 그런데 서비스센터에서 비록 수리를 위해 내 차를 가져갔지만 앞에 대기가 길어 실제 수리에 들어가기까지는 3주 이상 걸릴 것이고 렌터카 비용은 수리기간 동안만 커버해 줄 수 있기 때문에 대기하는 동안의 비용은 내줄 수 없다고 했다. 이 한 문장의 결론을 위해 서비스 센터와 보험사와의 숱한 전화가 있었지만 어쨌든 그랬다. 그렇다고 출근을 안 할 순 없으니 일단 생돈을 내고 차를 빌렸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한 달이 가고 두 달이 가도록 차를 돌려줄 생각은 않고 시답잖은 일로 전화를 해댔다. 직업 특성상 나는 낮에 전화를 받기가 어려우니 남편하고 통화했으면 좋겠다고 내가 분명히 말했다. 그런데도 "갖고 계신 차 키가 총 몇 개인가요?" 따위를 물으러 수업 중에 끊임없이 울려대는 애플와치의 진동과 쌓여가는 부재중과 보이스메일에 편두통이 올 지경이었다. 정작 남편이 전화를 하면 받지도 않거니와 받았다가도 남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전화를 끊는다고 했다. 나는 할머니가 돌아가신 지 얼마 되지 않아 밥 먹다가도 울고 자다 깨서도 우는 시기였고 슬퍼할 겨를도 없이 상속포기도 준비해야 했는데 제발 남편하고 통화하라고 백 번 천 번 말해도 집요하게 나만 괴롭히는 이 브랜드에서 다시는 차를 사지 않겠노라 결심했다. 차는 얼마 전에야 돌려받았다.
말할 수 있는 위 두 가지의 일과 말할 수 없는 몇몇 다른 일들로 심신이 지쳐있을 때 저 병원 고지서를 보고 나는 아주 오랜만에 주저앉았다. 주저앉아 울면서 나는 지쳤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고 밥도 먹기 싫다고 했다. 슬픔 뒤에 슬픔 뒤에 또 슬픔이었다. 무슨 영광을 누리겠다고 괜히 본국을 떠나 이런 일을 겪는 슬픔. 한국에서 보던 의사 선생님들, 따지고 보면 생면부지의 남들이 사무치게 보고파지는 슬픔. 저녁에 만나 함께 맥주 한 잔 하면서 욕해줄 친구들이 바다 건너에 있는 슬픔. 괜찮다고 자기가 전화해 보겠다고 하는 남편을 향해 "다 필요 없어!"하고 쩌렁쩌렁 소리를 지르곤 방에 들어와 이불을 푹 뒤집어쓰고 울었다. 혼자서는 해결을 못해서 남편이 전화를 걸어 "우리 아내가 부당한 일을 겪었다는데요!" 하게 만드는 일은 어쩐지 유약하고 의존적이며 좀 구리고 다소 반페미니즘적으로 보이기까지 해서 싫었다. 그렇다고 이것까지 감당할 여력은 내게 없었다. 결국 일련의 사건들 후 최근 들어 보기 시작한 상담사가, 주위의 서포트 시스템을 적극 활용하는 것은 결코 잘못된 일이 아니며 오히려 팀워크가 좋고 도움을 주고받는 일에 마음이 열려있는 사람과 가까이 있다는 것은 행운이라고 나를 설득한 후에야 이 안건을 남편에게 토스했다. 이 일은 아직도 해결이 안 났다. 더구나 2주 전쯤 160달러에 상당하는 새로운 청구서가 날아오기까지 했다. 하도 통화가 안돼 답답한 나머지 남편이 찾아가기까지 했었는데 담당자가 없다고 돌려보내졌다. 어쩌다 연결이 되면 담당부서가 아니라며 폭탄 돌리기 하듯 다른 곳으로 넘겨졌다. 나의 상담사는... 미국에서 종종 있는 일이라며 해보는 데까지 해보고 안되면 그냥 돈을 내버리는 해결책을 제시했다. 하지만 산부인과 검진 한 번 하고 150만 원이 넘는 돈을 낼 수는 없다. 내 실수도 아니고 저쪽 실수로.
그럼에도 매일 나를 웃게 하는 기쁨들도 많다. 집 앞의 커다란 나무 덕분에 거실 창문이 온통 초록인 것. 계속 속 썩이더니 영상편지 보내기 활동에서 나에게 진심 가득한 영상편지를 보내온 중학생. 옆에 가만히 누워있는 토실토실한 고양이들. 썸머캠프 마지막 수업에 서운한 나머지 울어버린 7학년과 걔를 안아주며 "너 학교 앞에 살지 않아!? 우리 또 볼 건데 왜 그래!" 하며 달래던 일. (매번 피곤하다고 손사래를 쳤지만서도) 사방에서 왁자지껄 "선생님! 선생님!!"하고 앞다투어 나를 부르던 목소리들. 알게 되어 감사한 좋은 동료들. 독립기념일을 맞아 불꽃놀이를 보러 간 것. 다른 도시에서의 여름휴가를 계획하고 있다는 것. 이번주는 내 생일 주간이고 내가 농담처럼 말했던 케이크를 남편이 주문제작 맡겨둔 사실과 엄마아빠로부터 날아온 생일 축하한다는 짧은 영상메시지. 생일선물로 구입한 닌텐도를 기다리는 일. 해고당하지 않고 1년 차를 잘 마무리했다는 사실. 나를 보고 싶어 하는 친구들이 있다는 사실. 모든 것이 너무 생생하고 너무 강렬한 것. 많은 것이 아름답고 내 안에 아직 사랑이 많이 남았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