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점이지만 서점 아닌 것 같은 서점 같기도 한 공간
작년에 진행했던 프로젝트들 중에 꽤 긴 시간이 걸렸던 프로젝트에요.
정확히 말하면 스타트를 끊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려서 남다른 기억이 있네요.
기다리다 지칠 뻔
삼성동 코엑스 맞은 편에 가시면 요렇게 생긴 건물이 하나 있는데요. 새롭게 리모델링한 하나은행의 슬로우 뱅크 프로젝트입니다. 지금은 이미 이 건물이 꽤 알려져 있을 거에요. 더시스템랩의 김찬중 소장님이 리모델링 프로젝트를 맡았고, 얼마전에 서울시 건축상 대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최근 은행 업계의 흐름에 대해 간략히 말씀드릴게요. 최근에 많이 다루어지고 있는 슬로우 뱅크라는 개념이 있는데요. 이 개념의 시작은, 말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은행은 보통 오후 4시가 되면 문을 닫잖아요? 그 공간을 영업시간 외엔 닫은 상태로 그대로 두는 것이 인프라적인 측면에서 낭비가 아닌가? ... 하는 지극히 상식적인 물음에서 출발했다고 볼 수 있어요. 슬로우 뱅크들의 특성은 무의미하게 지점 수를 늘리는 대신 지역 경제에 공헌할 수 있거나, 은행 공간과 시너지를 낼 수 있는 컨텐츠를 은행 내부에 기능적으로 구현하고요, 또 딱딱한 창구형 디자인을 탈피해서 좀 더 편안하게 머물 수 있는 디자인을 추구합니다.
결국 이렇게 해서 얻고 싶은 것은 사람들이 머물고 싶은 은행을 만든다는 것이에요. 예를 들어 독서 혹은 요가 프로그램을 운영하거나 내부에 코워킹 스페이스를 만든다거나, 전시 공간을 만들어 지속적인 기획전을 운영한다거나 해서 사람들이 그 공간들을 활용하면서 머무르는 시간이 길어지면 자연스럽게 은행의 고객이 될 수 있고 브랜드 가치 역시 상승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에서 나온 것이지요.
국내에서는 하나은행이 슬로우 뱅크를 시도하는 업계의 선두주자라고 볼 수 있고요. 결국 이 프로젝트는, 슬로우 뱅크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시도된 것임이 중요하다고 볼 수 있어요. 단순히 영업적 이익을 위한 공간이라기 보다는 서비스 개념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 포인트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저희는 지하 1층의 일부 공간을 맡았는데요. 오피스도 하고 싶었습니다만 안 시켜주더라고요. 클라이언트의 요구를 한 줄로 요약하자면 이렇습니다.
“음악을 즐기며 책을 구입하고 전시 공간 처럼 가볍게 즐길 수도 있는 서점 공간”
(인데 너무 캐주얼하면 안 되고, 너무 있어보여도 안 되고.. 복잡해요)
서적 컨텐츠는 국내 유수의 잡지를 출판하는 디자인하우스에서, 음악 컨텐츠는 국내 유수의 mp3를 만들어내는 아스텔앤컨에서, 공간 디자인은 국내 유수의 공간을 만들어내는 아티펙트에서니;ㄴ암;니아;ㅈ
저도 한번 묻어가보고 싶었어요. 민망하지만 네, 그렇습니다.
국내 유수들끼리 모였으니 진행도 청산유수로. 저희는 부푼 꿈을 안고서 현장으로 달려가 봅니다.
??????
??????
꿈에 너무 부풀어 있었던 것 같습ㄴ이ㅏㅂ니안비아ㅣ나디ㅏㅠㅠ 리모델링이 끝난 직후의 사진인데, 굉장히 자투리 공간 같은 느낌이에요. 단 위에 올라서면 머리가 부딪힐 것 같은 높이네요. 애매하게 남은 공간이라 당황스럽긴 하지만 혹시나 하는 기대를 가지고 천장을 열어 봅니다.
다시 닫아두기로 합니다 -_-
이유는 모르겠지만 사진에서 전해져 오는 정체불명의 난감함
위 사진은 진입 공간인데 입구라기에는 조금 애매한 느낌이 있죠. 건물의 가장 구석진 공간에 위치해 있고, 지하 1층에서도 다시 한번 계단으로 걸어 내려가야 해요. 건축 규정상 유지해야 하는 것들, 손댈 수 없는 것들이 있고요. 가장 끝에 있는 자투리 공간까지 들어갈 수 있는 동기를 유발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어떻게 풀어야 할 것인가? 고민이 되는 부분도 있고요.
오늘 할 이야기는 크게 톤앤매너, 조명 계획 그리고 디자인 포인트로 나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먼저 톤앤매너를 어떻게 설정할까, 고민을 해 봅니다. 건물은 화이트 톤이고, 실내로 들어왔을 때 테라조로 이루어진 벽체가 전반적으로 차가운 느낌이었어요. 아스텔앤컨은 한남동에 스트라디움이라는 청음 공간을 운영했었고, 참고하길 원했습니다만, 구석진 곳으로 굳이 찾아 들어가야 도달할 수 있는 공간에 너무 진중한 무게를 더하고 싶진 않았어요. 가급적이면 우드 소재를 철저하게 배제하고자 했고, 일부 디테일을 제외하고는요. 건물의 외관이 가지고 있는 강력한 아이덴티티가 있기 때문에 이를 해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톤은 흡사하게, 텍스처로 차별화 하는 방법도 고려해 봅니다.
기본적인 아이디어는 뭐랄까. 저러한 단일 구조에 동일한 물성으로 서가와 공간이 이루어져 있으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우리가 서점에 가면, 책을 손에 넣기 위해 거쳐야 하는 물성의 종류가 너무 많거든요. 이를테면 유리문을 밀고 들어가고, 타일이 깔린 홀을 지나, 카펫으로 마감된 서가 공간 내부로 가서, 나무 혹은 금속으로 만들어진 서가에서 책을 꺼내는 식이죠.
날 때려죽여도 책을 반드시 사야겠다는 목적이 있거나, 서점에서 시간을 죽이겠다는 의도가 있다면 모를까. 온전하게 책에 집중하기엔 모든 감각이 피곤해질 것 같은 느낌이에요. 최근엔 흐름이 조금 달라졌지만 서점은 기본적으로 책에 온전하게 집중하기 위함보다는, 책을 판매하기 위한 판매자 측의 상업적 의도가 강하게 개입된 형태의 공간이기 때문이지요.
우리가 만들어 나가야 하는 공간은 입구가 어찌보면 존재하지 않는 곳이고 또한 슬로우 뱅크 내 서비스 공간으로서의 개념 역시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홀을 지나, 홀과 같은 톤이나 물성을 가진 서가에서 책을 꺼내는, 말하자면 보다 더 간결한 느낌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대형 서점이 아니기 때문에 기능적 요구사항으로부터는 자유로울 수 있었으니까요. 충분히 가능하겠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감각적으로 덜 피곤한 느낌이죠.
주변에서 이러한 형태의 공간을 흔히 볼 수 있는데요. 네, 바로 전시 공간입니다. 전시물과 관람자 사이에 존재하는 매개를 최소화 하고, 그로 인해 온전하게 보여주고자 하는 것에 집중할 수 있도록 기능하는 식이에요. 그래서 전시라는 개념에서 시작하고 점점 확장해 나갔어요.
‘서점이지만, 팝업 공간 같은 느낌도 있고 하지만 너무 가볍지는 않은 곳’ 정도?
추후에 설명하겠지만 이 공간에서 책은 판매되는 컨텐츠이면서, 동시에 아트월의 요소로 작용합니다.
그리고 매우 중요한 톤, 특히 벽의 마감이 중요했어요. 도장과 미장의 중간 형태로 콘크리트톤을 내기 위해 시행 착오와 샘플링을 거쳤고요. 많은 면적을 차지하는 부분이라 굉장히 신중하고 꼼꼼하게 작업 했습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실내에서 거푸집을 짜서 타설하지 않고 콘크리트톤의 느낌을 내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추후에 보시겠지만 실내 공간은 색온도가 높은 온전한 주광색의 조명을 활용하게 되는데, 이는 보다 완성도 있는 콘크리트톤을 위함이기도 해요. 사람들이 흔히 보는 노출 콘크리트의 쎄~한 톤이라 함은 주광 하에서 보고 또 인지하는 감각적인 그 무엇이기 때문이죠. 굳이 설명하자면 쿨톤이라고 부르는 것의 어딘가쯤 되겠습니다.
주 조명의 색온도가 낮아져 따뜻한 느낌이 지나치게 강해지면, 미장과 도장으로 만들어낸 콘크리트톤이 썩 아름답지만은 않거든요. 같은 마감이라도 색온도가 낮아지면 인위적인 도장 느낌이 강해집니다.
공간을 개략적으로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아래 쪽에 좁은 입구를 통해 계단을 내려가면 홀이 나오고, 아까 사진에서 살펴본 ??????? 스러운 자투리 공간으로 이어지는 구조에요.
빨간 스툴이 거슬리네요. 쓰러져 있으니까 더 거슬리네요 -_.
이러한 구조의 형식에선 조명 계획에 좀 더 집중해야만 했습니다. 곧 살펴보겠습니다만, 조명의 양식이 동선을 규정하는 요소로 활용될 수 있기 때문이고, 효율적이지 않은 공간 구조를 보완하는데에 큰 도움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손을 댈 수 없는 천장 구조 때문에 조명은 가급적 볼륨감이 적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제한적인 환경을 조명의 구조로 극복하고자 하는 의도로 연구를 해 나갔습니다.가급적이면 볼륨감이 적고, 가능한한 미니멀한 형태이길 원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장 기본적인 구성 요소인 선을 떠올려 봅니다.
개념적 이미지이지만 기본적인 선을 활용해서 어떤 흐름을 만들고 있는데요. 선의 형태를 활용한 조명을 적절하게 구성하는 것만으로도 공간에 적당하되, 과하지 않은 볼륨감을 줄 수 있을 거라 기대했습니다. 자투리 공간 같은 느낌 때문에, 자잘한 디테일을 부가하는 것보다 큰 흐름에 집중하기로 했지요. 또한 선으로 이루어진 조명군의 형태만으로도 사용자들에게 어떤 의도된 행동 양식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한 번 살펴볼까요?
아 클럽가고 싶다
자, 그리하야
메인이 되는 선형 조명의 배치도 입니다. 높이도, 방향도 불규칙하지만 전체적인 구성은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집니다. 알 수 없는 허전함 대신 풍성함을 더해주고, 내부까지 동선이 이어질 수 있도록 의도했어요.
입구 계단에서 시작된 조명의 흐름은 불규칙 속에서 어떤 일관된 방향을 만들어 갑니다. 내부의 죽어있던 구조로 향하는 동선이 설득력을 얻기 위한 어떤 당위성이 필요했어요. 단순해 보이는 흐름만으로도 짧지만 강렬한 메시지가 됩니다.
가장 기본적인 요소를 사용하여, 단순하되 묵직한 하나의 조명 구조를 구성했다면 이에 더한 포인트가 필요했습니다. 그리 넓지 않은 공간이라 불필요한 디테일은 제거하고 싶었고, 다만 주 컨텐츠인 책과 동떨어지지 않는 무언가가 필요했지요. 그 요소로 우리는 책을 사용한 아트월을 떠올렸습니다.
정면에 보이는 서가입니다. 서가와 아트월로 구성된 형태. 구매할 수 있는 책을 만져 볼 수 있는 공간이면서, 동시에 출입구가 없는 이 공간의 파사드 역할을 하고 있어요.
입구에서 이어지는 조명의 흐름과 함께, 가장 먼저 마주하는 공간의 첫 인상이에요. 그래서, 서가 벽면 상부에 책을 이용한 일종의 Art Wall을 조성하고자 했습니다. 입구 칼럼에도 마찬가지로 책을 이용한 설치 미술 요소를 그대로 활용했어요.
책을 이용해 한땀한땀 만들어낸 아트월에 대해서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정말 많습니다만
일단 엄청난 수량의 책이 필요했어요. 벽면과 기둥을 보시면 짐작하시겠지만. 뒷면이 보이는 책들도 있습니다만 표지 단면이 보이는 책들이 굉장히 많기 때문에 아무 책이나 대충 고를 수는 없었고요.
설계상으로 책 단면 기준 30미터가 필요했어요.
책방 사장님, “몇 권 필요해요?”
“30미터요”
“......”
“단면 기준이요”
“......”
사장님은 말 없이 창고문을 열어주셨고, 계산을 하기 전까지 사장님과는 아무 대화가 오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과정은 고되고 힘들었지만 책으로 보물찾기 하는 기분으로 끈기를 가지고 완성했어요. 며칠에 걸쳐 미장으로 덧칠하고, 또 그걸 망치와 정을 들고 깨고,
수차례 반복.
공간이 완성된 후 방문한 외국 사람들이 가장 흥미를 보인 포인트가 책을 이용한 아트월이었다고 합니다.
공간 내에서 판매될 책의 범주도 예술, 문화, 건축, 패션, 문화이기 때문에, 책을 소재로 한 아트월을 조성한 의도와 잘 맞아 떨어지는 부분이 있습니다. 갖다붙인 건 아니고요.
자투리 공간이었던 내부 공간은 앉아서 음악을 들을 수 있고요. 입구에서부터 이어지는 조명의 흐름에 더해 형광색 벽면이 호기심을 이끄는 컬러 포인트 되겠습니다.
그리고 청음 공간에 들어가는 MP3는 아스텔앤컨이라는 하이엔드 브랜드의 제품인데요.
“제품의 외관은 스위스의 암벽 산 마테호른의 입체적인 형상을 따왔다” 라고 하네요.
저희는 시간이 없어서 마테호른까지 다녀오진 않았지만 서가에도, 개인 청음 공간에도 브랜드의 디자인 요소를 반영했습니다. 비틀어진 사선과 엣지를 활용해서 사용자 경험에 있어서 색다른 느낌을 줄 수 있도록 했고요. 이로 인해 지나치게 플랫하기만 할 법한 공간에 한 떨기 엣지; 같은 느낌이 부가되길 바랬어요.
바닥에 놓인 서가대 집기 역시 일반적인 서점에서 쓰이는 형태보다 낮게 유지하고, 또 엣지 디자인을 적용해서 단순한 판매대처럼 보이지 않도록 의도했습니다.
핑크색 컬러 큐브는 홀 영역에 있는 유일한 컬러 포인트입니다. 아티스트 Sabine Marcelis의 Candy Cube 라는 제품인데요. 레진으로 만든 가구 오브제의 일종입니다. 컬러가 참 아름답습니다. 오랫동안 소장하고 있던 제품인데, 드디어 활용할 일이 생겼습니다. 으하.
굉장히 재밌는 작업을 많이 하는 아티스트이니 관심이 있으신 분은 http://sabinemarcelis.com
디자인 페어에서도 주목받고 있고, 이미 너무 핫해졌고요. 인스타에 눈이 즐거운 이미지도 많이 올라와요.
이리하야,
전시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서점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라운지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그런 애매모호한 것 같지만 의도는 분명한 공간이 탄생했습니다.
은행에 왔다가 엘리베이터 버튼을 잘못 눌러 지하로 내려간다면 편하게 시간을 보내기 좋은 공간이죠.
많은 실험과 시도가 있었던 점에서도 굉장히 의미있었던 프로젝트 였습니다.
공간의 전체 사진과 디테일 샷을 보시면 조금 더 와닿는 부분들이 있을 거라 생각됩니다.
- Project Management : 김형진 / ARTEFACT
- Spatial Designer : 강예경 / ARTEFACT
프로젝트 문의 : contact@artefact.co.kr
인스타그램 : @artefact.kr
웹사이트 : http://artefac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