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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떠나 Apr 19. 2021

사패산 베짱이

야! 너두베짱이 할 수 있어!



 아는 동생의 인스타그램에 사진 한 장이 올라왔다. 양재천 벚꽃길을 배경으로 달리기를 하는 사진이었다. 마라톤이 대세인가 보다. 피드에서 종종 마라톤 인증샷을 보곤 한다. 대단하다는 댓글을 달았다. 몇 분 후 휴대폰 알람이 울렸다. 그녀는 댓글 대신 톡으로 답장을 해왔다.

 "언니, 이번에 서울 마라톤 열리는데 같이 할래요?"

인증과 명패에 관심 많은 (소심한 관종인) 나는 짧은 고민 후 그녀의 제안을 수락했다. 코시국에 맞게 모바일 GPS로 5km 완주 인증만 하면 되는 마라톤이다. 10km였으면 오래 고민했겠지만 5km라면 할 만하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분명 오래 달리기를 위한 기초 체력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짧은 시간 안에 급속도로 체력을 올릴 수 있는 방법이라면 역시,

 "Y야, 등산부터 안 갈래?"


 우리가 오르기로 한 산은 사패산이었다. 일요일 오전 10시 회룡역 3번 출구 앞에서 그녀를 만났다. 역에서 산 입구까지는 20분 정도 걸어야 하는 거리였다. Y와는 오랜만에 만난 터라 할 이야기가 많았다. 20분 정도 근황을 주고받으며 사패산 등산로 입구이자 북한산 국립공원 입구에 도착했다.  우리가 정한 등산 경로는 회룡역-등산로 입구-회룡사-사패능선-정상-범골 능선-회룡역 순서였다. 


날씨가 다 했던 사패산 산행


 전날 봄비가 살짝 왔던 터라 길이 촉촉했다. 봄비에 젖은 흙냄새는 언제나 일품이다. 사패산 등산로는 좁은 오솔길로 시작된다. 오른쪽으로는 계곡물이 흐르고 밧줄로 만든 간이 손잡이가 있다. 아주 힘든 경사가 아니라 가족 단위의 동네 주민도 많이 보였다. 봄비 덕에 미세먼지는 없고 해는 맑았다. 아직 벚꽃 잎들이 채 떨어지지 않았던 터라 뜻밖의 선물을 받은 듯 꽃비를 맞으며 걸을 수 있었다. 작은 계곡 위로 정돈된 다리가 있다. 빛이 잘 들어 대부분의 등산객들이 그곳에서 인증샷을 남기는 듯했다. 우리도 마찬가지. 뒤에 줄을 선 우리 또래의 다른 산행 무리와 서로 단체 사진을 찍어주었다. 산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훈훈한 사진 품앗이. 이럴 땐 짧고 묘한 전우애를 느낄 수 있다.


 사패산은 겸손한 크기의 계곡과 감당할 수 있을만한 돌계단이 이어진다. 높이가 낮은 철계단이 나오기도 한다. 길이 대체적으로 매우 안전하게 닦여있어 초안정형인 나는 마음 놓고 산을 오를 수 있었다. 정상을 1km쯤 남겼을 때 깔딱 고개가 나오는데, 특이하게도 깔딱 고개에도 손잡이를 설치해둬 오르기 부담스럽지 않았다. 등산객들에 대한 배려가 곳곳에 묻어난다. 깔딱 고개를 지나면 능선이 이어진다. 모자와 이마 사이 촘촘 맺혔던 땀이 싹 마르는 구간이다. 벗었던 바람막이를 다시 챙겨 입고, 목을 적신 뒤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거대한 바위들이 보이기 시작하면 정상에 가까워진 것이다. 밧줄을 잡고 오를 수도 있고, 오른쪽으로 돌아 돌계단을 걸어 올라 정상에 도착할 수도 있다. 어느 길로 기도 위험하지 않다. 역시 사패산은 친절하다.


회색빛 거대한 바위들이 보이기 시작하면 곧 정상이다


 딱 1시간 40분을 올라 552m 정상에 도착했다. 마당바위라고 해도 될 정도로 널찍한 공간이 펼쳐진다. 정상석에서 호다닥 인증사진을 찍었다. 본격적으로 정상의 경치를 즐기기 위해 정상석 역으로 옆으로 이동했다. 왼쪽엔 굽이굽이 수많은 봉우리들이, 오른쪽엔 의정부 도시가 한눈에 보인다. 탁, 마음이 트이는 전경이다. 밝은 회색의 바위는 어느 곳으로 가도 위험하지 않다. 드넓고 듬직하다. 산 공기를 음파 음파 마시다가 바람이 너무 차가워서 나무로 둘러싸인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같이 간 동생이 간식으로 참외와 거봉을 싸왔다. (센스쟁이!) 답례로 음악을 틀었다. 참외를 아삭아삭 씹으며 여름을 미리보기 했다. 과일을 다 먹고는 등산화에서 뜨거워진 두 발을 빼냈고, 가방을 베개 삼아 벌렁 누워버렸다. 하늘엔 송송 박힌 구름이 천천히 흐르고 있었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연둣빛 여린 잎들이 흔들리고 있었다. 바람은 청량했고 하늘은 청명했다. 시원한 바위 위에 누워 음악을 듣고 있자니 베짱이가 따로 없었다. 연주할 줄도 모르는 우쿨렐레가 왜 자꾸 생각나는 건지. 콧구멍에서는 왜 자꾸 음표들이 흘러나오는 건지. 그 순간 우리에겐 지켜야 할 시간표도, 신경 써야 할 사람도 없었다. 그날 우리의 행복은 사패산 정상 552m 소나무 아래 있었다.


호암사 도착하기 전 마지막 경치 구경


 한 시간쯤 시간을 보내고, 땀이 완전히 말라 으슬으슬 추위가 느껴져 하산을 했다. 범골 입구로 가려면 정상 같은 길로 내려오다 왼쪽으로 방향을 틀면 된다. 이 길도 능선과 낮은 경사로 이루어진 돌계단이라 무릎에 무리가 가지 않는다. 그래서 그런지 트레일 러닝을 하는 사람도 종종 보였다. 연둣빛 숲 사이로 연분홍 진달래인지 철쭉인지가 생생하고 건강한 얼굴을 내보이고 있었다. 그 생명력이 어여뻐 사진을 찍었다 (쓸 데는 없지만 일단 예쁘면 저장). 30분쯤 내려오니 전망대 역할을 하는 바위가 있다. 훨씬 가까워진 도시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코스는 호암사에 도착하는 것으로 끝이 났다. 호암사에 도착해 다시 포장도로를 한참 걸어 내려오면 아파트 단지가 나온다. 이렇게 내려오면 지하철 역으로는 범골역이 가깝다. 우리는 1호선을 타야 했기에 조금 더 걸어 다시 회룡역에 도착했다.


사패산은 그야말로 찬란한 햇빛이, 산뜻한 봄바람이,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난 여린 이파리들이 우리를 자꾸자꾸 우리를 불러 같이 놀자고 하는 산이었다. 이건 뭐 체력 기른답시고 노오력 하러 갔다가 베짱이 정체성만 찾고 왔다고나 할까. 뭐 아무튼 베짱이 두 마리는 잠시나마 행복할 수 있었답니다. 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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