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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na Han Jun 07. 2019

퀸의 보컬리스트 프레디 머큐리의 고향으로 가다.

2010.05  탄자니아 잔지바르 섬

[탄자니아- 잔지바르 이야기]


케냐 나이로비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공항에서 잔지바르 섬의 비행기 일정을 알아보니, 시간이 얼추 여행일정에 조율해서 넣을만 하여 잔지바르행 왕복 항공권을 공항에서 급구매 했다.


동아프리카 인도양의 웅구자와 펨바의 두 섬으로 이루어진 잔지바르.

나는 이곳을  나이로비에서 잔지바르행 비행기를 타고 몸바사를 경유하여 도착했다.

대부분의 여행자들은 스톤타운이 있는 웅구자섬을 돌아보며 펨바는 아직 덜된 개발로 인해 조용하고 때가 덜 탄 곳이 많다고 했다.


이곳은 옛날 노예무역으로 악명과 유명세를 떨치던 섬이었고, 반투계의 아프리카 문화와 아라빅 문화가 만나 아프리카의 동쪽 해변을 중심으로 형성되기 시작한 스와힐리 문화가 남아 있는 곳이다.

페르시아의 후손 국가인 이란은 고대로부터 이 섬과 교역이 있어 왔으며, 13세기경 많은 페르시아인들이 이주하게 되었는데 잔지바르의 어원은 원래 이란에서 쓰는 페르시아어에서 온 것으로 검은 해안, 흑인의 해안이라는 뜻을 가진 말이지만 , 아랍인들이 발음을 제대로 못한 데다, 유럽 사람들이 그 발음을 변형하여 오늘날 잔지바르로 불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노예 무역항으로도 악명이 높아 데이비드 리빙스턴과 같은 노예제도 반대자들이 노예제도 금지의 캠페인을 펼쳤던 기지이기도 하며 수 세기에 걸친 아시아 중동 아프리카 사이의 향식료, 노예무역등 해상무역활동의 역사가 건축양식과 도시 구조 속에 담겨 있어 2000년쯤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기도 한 곳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잘 알려진 영국 그룹 퀸의 리드 보컬리스트 프레디 머큐리가 태어난 섬이기도 한데, 첨엔 영국 국적이긴 했지만 원래 페르시아계 인도인(파르시)인 이 남자가 왜 아프리카 탄자니아의 섬에서 태어났을까 궁금했지만, 파르시의 이력과 이 섬의 역사를 알게 되니 그가 이곳에서 태어났다는 것이 그리 생뚱맞은 이력이 아닌 란 걸 알 수 있게 되었다.


과거 이슬람 세력에게 정복당한 조로아스터교를 믿는 페르시아인들은 인도로 망명하게 되는데, 그 난민들이 인도의 유대인으로 불리는 파르시였다.

인도가 영국의 지배를 받았던 시절, 영국이 동인도회사를 설립하자 이들에게 적극 협조하며 상업을 하였고, 식민지까지 따라다니면서 무역업에 종사하여 경제력이 커진 엘리트 층이 되는데, 프레디의 집안도 이런 파르시였다.  

그의 아버지는 이곳 아프리카 잔지바르의 영국 총독부 공무원이었고, 1946년 프레디는 그렇게 이곳 잔지바르 섬에서 태어나 자라다가, 8살 때  아버지의 교육 철학에 의해 인도 뭄바이에 있는 영국계 학교로 유학을 가서 교육을 받게 된다.

잔지바르는 오만 치세에도 있었고, 영국과 아랍, 포르투갈의 점령과 지배를 받기도 했었다. 그러다 공산혁명으로 1963년 탕가니카의 앞글자(Tan)와 잔지바르의(Zan)를 합쳐 탄자니아(Tanzania) 연합공화국으로 통합되었는데, 이해 잔지바르에 돌아왔던 프레디는 유혈혁명으로 인해 인도, 파키스탄인들이 학살을 당하자 생명의 위협을 느꼈고, 1964년에 가족 전체가 잔지바르를 떠나 영국으로 이주를 하여 17살부터 영국에서 이민자의 삶을 시작하게 된다.

그의 음악들을 들어보아도 느껴지지만, 인도, 중동, 유럽, 아프리카 문화가 뒤섞인 그런 다채로운 이력과 문화적 배경이 프레디의 음악성에 많은 영향을 준 것이라 생각지 않을 수 없다.



잔지바르 섬에 도착하자마자 공항에서 처음 향한 곳은 스톤타운.

바다는 바다일 뿐이기에 아름다운 해변의 모습이야 세상 어딜 가나 많기야 하지만 잔지바르 해변의 모습은 물 빚도 아름답지만 바다와 어우러진 이곳의 검은 사람들의 느낌으로 왠지 첫 분위기부터 다르게 인상적으로 다가오는 곳이었다.

이사진은 스톤타운에서 가까운 항구가 있는 해변의 부산해 보이는 모습이고 왼쪽 상단에 돛단배처럼 작게 보이는 배는 바람을 이용해 항해하는 이곳의 전통선 "다우"의 모습이다.


그렇게  스톤타운에서 짐을 풀고 오후 시간을 보내기 위해 배를 타고 프로즌 아일랜드로 가보게 됐다.   

손님을 위해 뜨거운 태양을 피할 수 있게 둥그런 지붕을 씌운 배를 타고 바다로 나아가면, 바다에서 스톤타운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었다.


과거 감옥이었던 섬인, 프로즌 아일랜드.

조용하고 한적 한 자그마한 섬이었다.

스노클링 장비를 두고 오는 바람에 구경만 했는데, 감옥이 왜 이리 경치가 좋을까?

조용하고... 물이 상당히 맑아 불가사리들도 보이고.

과거 노예 죄수들이나 황열병 환자들을 가두었다던 고립된 섬인데, 한스러움과 아픔이 담겨있는 이 섬이 이방인의 눈에는 그저 한적하고 아름답기만 보인다.

역지사지가 안되고 공감능력이 떨어지는 탓이지만, 때론 모자른 것이 다행일때도 있는 듯 싶다.


이 섬엔 자이언트 거북이들이 많이 살고 있다.

이름처럼 상당히 크고 식성도 좋은데,  그냥 사진으로는 크기 가늠이 안되니, 사람과 크기를 비교해보면 얼마나 큰지 짐작할 수 있다.

해가 떨어지기 전에 다시 배를 타고 스톤 타운으로 돌아간다.

일몰이 만들어주는 따듯한 빛의 풍경이 좋은 시간이었다.


해가 지면 스톤타운의 바닷가 주변에 야시장이 시작된다.

밤이 되면,  한낮의 뜨거운 열기가 조금씩 식어가니, 시원한 저녁 바람을 맞이하러 사람들이 북적이기 시작하며 이런저런 즉석 먹거리들이 야시장에 나타난다.

야시장 구경을 하다 간단한 먹거리들도 사 먹고.....


아프리카계 아랍계와 인도계까지 뒤섞인 이곳. 그래서인지 탄자니아 본토인들도 이곳으로 여행을 오는 모습을 보게 된다. 아마 우리나라의 탐라국이었던 제주여행쯤 되려나??


좁은 골목골목 지나는 거리마다 인사를 많이 하는 이곳에선 어쨌든 이런 이력 때문인지 스와힐리어 인사 Jambo 나 Mambo, 혹은 Shikamoo 뿐 아니라 아랍어 인사인 Sallam도 뒤섞여 자주 들을 수 있었다.  



저녁은 "몬순"이라는 식당에서 먹어 봤다.

이름도 좋다. 계절풍.

잔지바르가 향식료와 노예무역 중개항으로 번성했던 곳이니, 순풍에 돛을 달고 무역을 하러 가기 좋은 계절풍이 중요했을 것 같다.

좌식이었고, 탁자에는 이국적인 이곳의 냄새가 나는 향수가 얹어져 있는데, 식당에 온 손님들에게 이 향수를 뿌려 준다.  

분위기는 일단 만족, 하지만 배고픈 내게 중요한 건 밥이었건만, 어찌나 늦게 나오던지, 식당에서 한잠 자도 될 정도...^^

배고프고 성격 급한 사람에게는 고문의 시간이 되시겠다.

손님이 오면, 식탁에 놓여 있는 향수를 뿌려 주는데, 향기가 꽤나 이국적이다.


다음날은 향식료 투어를 위해 숲으로 들어가 봤다.

오만 치하 시대의 건축물도 있고, 하늘과 풍경은 열대 우림스러웠으며 사람들의 느낌이 달랐다.


향식료 투어 중 식사를 할 수 있었는데 돗자리를 깔고 이것저것 싸온 반찬들과 밥통을 내어 놓으니, 우리네 오래전 소풍 풍경과 별반 다를 바가 없는 분위기.

투어를 마치고 다시 스톤타운으로 돌아와, 해변으로 가기로 한다.

교통이 불편하여 숙소 주인장에게 비용을 지불할 테니, 차 좀 태워 달라고 하고 빨간 닛산 사륜구동 차를 타고 북쪽 해변으로 달렸는데, 그 시간이 마침 하교 시간이었다 보다.

많은 남학생 여학생들이 교복을 입고 집으로 간다.

무슬림들이라 여학생들은 하얀색 히잡을 쓰고.


섬 북쪽의 능귀 해변 풍경.

바다와 해변은 예뻤지만, 한낮은 너무 뜨거워 해수욕은 엄두도 못 낼 일이었기에 일단 이층의 카페로 대피.  경치도 바다도 다 좋지만, 빛이 너무 강해 눈과 피부가 염려될 정도라 일단 뜨거운 시간은 피해 있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곳이다.


너무 뜨거운 시간에는 이방인들 뿐 아니라 현지인들도 늘어진 엿가락처럼 되는 풍경이 낯설지 않은 곳이다.


능귀 해변에서 시간을 보내다 돌아가기 전 켄드와 해변을 들러 봤다.

뜨거운 시간을 어느 정도 지나고 간 해변이라 쉬기에 딱 좋았다.

해변에는 신나게 축구하는 섬 아이들도 보이고.

신나는 해변 축구.
무슨 이야기 중일까?


이곳에서 떨어지는 해도 맞이해 봤다.

마치 이불을 덮는 듯 몰려와 하늘을 덮어버리던 구름....

해는 그렇게 덮인 구름 이불속으로 들어가 버렸고, 어스름한 어둠이 내려왔다.

돌아가던 길, 달라달라가 앞서 가던 순간.

달라달라는 이곳 잔지바르의 대중교통으로, 다인승 승합차의 모습을 한 개조 트럭인데, 달라달라를 앞세우고 가는 것도 나름 재미났다.

"달라달라"라고 불리는 잔지바르섬의 대중교통.

스톤타운으로 돌아와 숙소의 잔지바리와 함께 거리를 구경했다.

골목골목 사람들이 많은 편이라 위험해 보이지도 않고, 현지인이 옆에 있으니 든든.

밤과 낮의 풍경을 모두 구경할 수 있어 좋았다. 그 풍경 안의 사람들의 모습도 좋았고.

사람 사는 곳의 또 다른 풍경을 보기 위해 스톤 타운의 시장도 들러본다.

오래된 바오밥 나무 아래 가게를 열기도 하고, 복잡한 모습이 영락없는 시장 풍경.


숙소의 잔지바리가 구경시켜주는 스와힐리풍의 호텔을 들러 옛 잔지바르의 풍경을 담은 사진들을 보며, 이곳의 옛 풍경을 좀 더 구체적으로 상상할 수 있었다.

이곳의 전통배 다우,


스와힐리 풍의 숙소.

팅가팅가라는 잔지바르에서 발달한 독특한 화풍이 있다.

띵가띵가~ 놀자~ 이런 말이 아니라 화가 이름에서 시작한 탄자니아 현대미술 화풍이다.

에드워드 사이디 팅가팅가라는 사람이 이곳에 살면서 이곳에서 그림을 그렸는데, 그가 황망하게 죽은 이후, 제자들이 그의 화풍을 이어받아 그림을 그려 퍼뜨리면서 탄자니아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팅가팅가라는 화풍이 됐다.

사실 아프리카라 하더라도 한 장소에서 많은 동물을 볼 수 있는 기회는 꽤 드문데, 이 화가의 그림 속에는 다양한 동식물과 조류 등이 한꺼번에 등장해서 재미난 동화적 분위기가 연출되는 것이 특징이다.

아무튼 팅가팅가를 보면 흥이 많은 사람인 듯한데, 정식 미술 교육을 받지 않은 화가라 여러 가지면에서 순수하고 재미난 느낌의 그림들이 된 듯하다. 그런데, 그가 그린 그림은 정작 외국으로 다 팔려 나가서 탄자니아에서는 볼 수 없다고 하고... 그의 화풍을 이어 받은 다른 팅가팅가들만 만날 수 있는데 그래서인지 잔지바르의 그림 가게에서도 팅가팅가 그림들이 가득했다.

내 취향의 그림들은 아니었지만, 재미난 그림이라 보기 좋았다.

스톤타운의 건축물들을 구경하고 있는 와중에 갑자기 나타난 꼬부랑 할머니.

이 할머니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애워쌓고 있었는데,  숙소의 잔지바리가 말해주기를 왕년에 한참 날리시던 유명한 스와힐리 가수셨다고.

눈도 잘 떠지지 않을 것 같은 분이지만, 목소리만은 쩌렁쩌렁, 스와힐리어로 노래도 불러 주셨는데 그 목소리가 여전히 힘이 있고 쩌렁쩌렁~하셨다.

선율이 단순해서 같이 따라 흥얼 거려보니 할머니가 앞으로 오셔서 더 크게 불러 주셨다. 

어른을 공경하고 할머니를 존경하는 이곳 잔지바리들의 모습을 보았다.

보기 좋았다.

배달중인 썬글라스들..


스톤타운의 골목은 좁고 때론 미로 같기도 하다.

개구장이들이란...혹은 아이들이란??
웬지 버락 오바마를 닮은거 같다는 생각이 든 아이.


잔지바르의 옛 사진들과 비교해 보았을 때, 스톤타운의 골목 모습은 그다지 변한 게 없어 보인다.


짧았던 잔지바르 섬 여행을 마치고, 다시 케냐로 돌아가기 위해 다시 공항으로.

참 아담하고 소박한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다시 케냐로 돌아가며, 하늘 위에서 마지막으로 잔지바르를 내려다본다.


기내 좌석 등판에 붙어 있는 스와힐리어 / 영어 / 아랍어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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