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속 순수함을 잃지 않기 위한 멀고 험한 여정
주말과 공휴일을 이용하여 몇 주 후 뉴욕 여행을 홀로 짧게 다녀오기로 했다. 한 방에 8명이 사용하는 도미토리를 이용할 것이다. 4-5년 전을 마지막으로 이용해 보지 않은 것 같은데, 오랜만의 낭만 여행을 해 보려 한다. 고생==낭만이라는 구시대적 발상은 아니지만, 너무 풍요로울 때의 나는 조금 더 게으르고 좀 더 상상력이 부족한 것 같다. 그래서 이번엔 최대한 저예산으로 뉴욕을 다녀오면서 가능한 한 뉴욕을 꽉 채워서 오롯이 누려보고 싶다. 그런 의미에서의 낭만 여행이다. 고급진 식당/bar를 비롯한 편안하고 호화로운 여행 대신에 더 날 것의 상태로 많이 걷고, 많이 보고, 깊게 있다가 오겠다. 솔직히 말하자면 너무 보고 싶었던 뮤지컬을 꽤 괜찮은 좌석으로 두 편이나 이미 예약했기 때문에 '헝그리' 여행이라 하기엔 어불성설인 면이 있기는 하다. 단지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무엇이든 될 수 있을 것 같았던, 지금은 많이 잃어버린 20대 초반의 특권과도 같았던 그 감성과 자신감을 되새기기 위한 아주 작은 시도 중 하나 정도로 생각해 주면 감사하겠다.
입사 이래 내가 순수함과 예술성을 잃어간다고 생각이 들었던 것도 너무나 안정된 생활이 한몫을 했다고 생각한다. 내적으로 끊임없이 노력하지 않으면 특별히 아주 각성할 계기가 없었다. 중간에 무엇을 봐도 열정과 설렘이 생기지 않던 씁쓸한 시기도 있었다. 배가 불러서 매너리즘과 나태함에 나도 모르게 빠져들었다. 그 상태가 내 인생에서 얼마나 많은 기회들과 즐거움을 앗아가고 나의 시간 자체를 삼켜 버리는지에 대해 알고 있기 때문에, 때때로 의식적으로 나를 벼랑 끝으로 내몰고, 외롭게 두고, 치열하게 싸우도록 버려두고 싶어지기도 한다.
이게 웃긴 거다. 성장하려면 끊임없이 나를 괴롭혀야 한다고? 나의 10대와 20대의 역사를 살펴보면 가장 고통받을 때 가장 크게 성장했다. 내가 나를 너무나 괴롭힐 때. 진짜 왜 이러나 싶을 정도로 못살게 굴 때. 정말 큰 성장의 발판은 가끔 그렇게 나한테 당하고만 있다가, 스스로가 가엾어서 문득 울컥하는 순간들에 있었다. 그리고 고백하건대 내가 가장 노력하고 스스로의 가장 나은 버전을 찾아서 고군분투할 때 마음속에는 항상 어떠한 종류의 불안이 있었다.
그렇다면 성장하려면 나는 나의 행복을 의도적으로 일부 제한해 두어야 하는 걸까? 그게 나라는 사람의 작동 원리일까? 분명한 건, 최근 나는 마음이 늙지 않도록 다시 스스로를 괴롭혀서 어린아이의 모습을 깨우고 싶어 하는 것 같다. 안주하지 않도록. 순수함을 잃지 않도록.
순수함을 잃지 않는다는 것은, 나에게 있어 아주 중요한 문제이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순수함을 잃지 않을 수 있을지 모르겠고, 아직 나에게 가장 맞는 방법을 못 찾아서 여러 시도를 하는 중인 거다. 불안을 이용해 보고, 물질적 풍요를 빼앗아 보고, 낯선 곳에 나를 떨어뜨려 보고, 잘하고 있는지 중간중간 시험해 보고. 순수함을 잃지 않는 게 중요한 이유는, 내가 현재를 살아가기 위해서는 순수함이 꼭 필요하기 때문이다.
무언가 큰 목표를 위해 나를 괴롭히다 보면, 혹시 보장되지 않은 미래를 위해 보장된 현재의 행복을 앗아가는 것이 아닌지 생각해 보게 된다. 물론 더 큰 미래의 효용을 위해 현재의 편안함을 자발적으로 포기할 수도 있다. 단기적인 관점에선 분명 괴롭지만 미래를 그리면서 큰 틀에서 그 과정이 행복하다면 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운동을 할 때, 그 순간이 매우 괴로워도 또 다른 어떤 의미에서 진정으로 괴롭지는 않은 것처럼. 그렇지만 현재 순간순간의 행복도 잊은 채로, 마냥 즐거웠던 느낌이 기억이 안 날 정도로 현재를 송두리째 희생시켜 버리는 것은 현명하지 않은 것 같다.
현재를 살기 위해서는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시키는 것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가 서로 도와주는 모양새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음속 남아있는 순수함이 계속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이다. 예를 들면 현재의 내가 미래의 비전 때문에 고통받고 있다고 해보자. 현재는 미래를 그렇게 도와주고 있다. 지금 당장 잠을 줄이고, 놀 수 있는 시간을 줄이고, 휴식 시간을 줄임으로써. 그런데 이때 현재를 살기 위해서는 미래도 현재에게 도움을 주어야 한다. 괴로운 와중이더라도 미래의 모습을 상상하면 그저 마음 한편이 따뜻해진다거나, 가슴 떨려 잠 못 이루는 밤이 있다거나, 무언가 가능태로서의 나를 받아들이고 계속 도전해 보고 싶은 것이 있다거나. 그렇게 어떤 방식으로든 미래의 나도 현재의 나를 도와야 한다.
순수함을 잃는 게 마음이 늙는 것과 거의 동일한 말로 사용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마음이 늙는다는 게 뭘까. 마음이 완전히 늙어버린 순간은 아직 찾아오지 않아서 정확한 시점과 증상은 모르겠다. 그런데 여러 주의해야 할 전조 증상이 있는 것 같다. 최근 가끔 느껴지기도 한다.
<전조 증상>
체념이 빨라지는 것
번거로움, 서투름, 다름 등에 관하여 참을성이 없어지고 게을러지는 것
관계와 실패에 대해 겁이 많아지는 것
새로운 것을 마주했을 때 이전의 데이터로 만들어 둔 분류 기법에 의해 새로운 것을 그 자체로 appreciate하지 못하는 것
마음속의 어린아이를 잃고 싶지 않다. 그 순수함을 어떻게 유지해야 할지, 그래서 대담함, 상상력, 열정을 어떻게 잃지 않고 오히려 더 발전시킬 수 있을지, 어떤 것이 현재의 나와 미래의 내가 둘 다 만족할 수 있는 방법일지 생각하고 있다. 아직은 뾰족한 수를 못 찾아서 이리저리 시도하는 중이지만, 좋은 방법을 찾게 되면 나의 경험을 꼭 공유하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