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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핸곰곰 Jan 28. 2019

사는 재미가 없으니 사는 재미라도 있어야지

스위스에서 산 지 이제 4달. 소비의 즐거움을 잊어버렸다.


물가 비싸기로 유명한 도시에서 소품샵이 널려있기를 기대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외국인생활의 기념품 하나를 못 살거라고 예상하지도 않았다. '사람 사는 동네인데 공예하는 아티스트들이 설마 없겠어. 적당히 적응하고 나면 그런 아티스트들의 고장에 가서 아이쇼핑도 하고 맘에 드는 물건 한두가지도 사는 산책/쇼핑 데이트를 종종 해야지.' 그렇게 생각했다.


12월 중순, 스위스에서 규모가 크기로 유명한 크리스마스마켓에 갔다. 이 동네의 미감이 드러나면서 내가 소장하고 싶어지는 장식품, 하나못해 엽서 한 장이라도 건지기를 기대했다.


1분마다 나타나는 츄러스, 와플, 뱅쇼, 깨지기 쉬운 크리스마스 트리 장식, 츄러스, 와플, 뱅쇼, 2인가정에는 다소 부담스러운 크기의 초콜릿공예, 츄러스, 와플, 뱅쇼, 몸 둘 바를 모르겠는 사이즈의 드림캐쳐, 원목 가구에나 어울릴 것 같은 목각 동물, 분명 여기에서 사는게 현명한 선택이 아닐 것 같은 캐시미어 스카프.....이런 식으로 1시간.

살 게 없다. 


어디 소품뿐인가, 이 근처에선 무형의 즐거움을 사는 것도 쉽지 않다. 비싸고 맛없는 음식. 괜찮은 미술관 없음. 영화관 별로 없고 표값 비쌈. 노래방 당연히 없음. 수강비가 무서워서 학원은 알아보지도 않았다. 하다못해 성당도 어쩜 그리 수수한지. 우리가 주로 기억하는 유럽의 성당들은 카톨릭성당이었음을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그래, 여긴 청교도 국가였지....' 허탈하게 동네 산책을 하다 종교개혁 지도자의 동상을 마주칠지도 모른다. '당신들 때문이야!' 동상에 역정을 내고 싶어진다. 사는 재미가 없으니 너무 우울했다. 

이보세요. 이러기야?

한국에서는 어떻게 지냈더라?

나는 외출을 좋아해서 짝꿍을 데리고 단골 카페에 나가 몇시간씩 앉아있으면서 주말을 시작했다. 그러다가 나와 동네 아트박스에 가서 예쁜 것들을 구경했다. 항상 똑같은 물건들인데도 그걸 구경하는 게 그렇게 재미있었다. 좋아하는 소품샵이 사라지기 전에는 사흘에 한번은 거기에 들러, 1주일에 한번쯤은 뭔가를 샀다. 가끔은 걸어서 30분 거리에 있는 대형서점에 가서 책 구경을 하거나, 동네에서 제일 맛있는 빵집에 들어가서 다음 날 아침에 먹을 빵을 미리 골랐다. 그리고 보통 그 빵은 그날 간식이 되었다. 페어나 마켓에 참가해 좋아하는 그림작가들의 굿즈를 사고 나의 팔찌컬렉션에 새 팔찌를 추가하기도 했다. 일주일에 세 번은 발레학원에 갔다. 보컬 트레이닝을 받거나 드로잉클래스를 가기도 했다.


몰랐다. 내가 이렇게 (아이)쇼핑을 즐기는 사람이었다니. 나의 우울은 소비할 게 없어서, 남아도는 시간을 어떻게 써야할 지 몰라서 생겼다. 


알아서 사는 재미를 만들어야 한다. 유학생활의 고됨을 요리로 달래고 있는 친구처럼. 미국에서 박사과정을 밟는 동안 그린 그림을 오피스에 걸어두신 교수님처럼. 웨이트트레이닝을 열심히 해서 타지생활의 외로움을 잊었다던 지인의 지인처럼.. 산책과 조깅을 했다. 점심을 차려먹기 시작했다. 인스타그램에 그림일기를 그려 올렸다. 아주 오랜만에, 독서가 취미가 됐다.


소비를 덜 하면서 중심을 잡는 삶은 정말이지.... 시시하다. 늘 그렇듯 자급자족에는 전문성이 없다. 왜 이 나라는 즐거움의 전문화와 분업화에 이토록 인색한지. 역시 칼뱅 때문인가, 불만이 차오른다. 하지만 불만이 가득해봐야 그걸 해결할 사람은 나뿐이다. 별 방도가 없으니 다시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산책을 한다. 넷플릭스와 구글플레이와 아마존 킨들과 리디북스의 즐거움까지 막히지는 않아서 다행이지. 이 시시함에 적응하면 외로움에 덜 흔들리는 사람이 되려나, 괜히 기대한다. 여기엔 예쁘고 아늑한 카페도 소품샵도 아트박스도 발레학원도 보컬학원도 없지만, 잘 살고 있다. 사는 재미를 찾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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