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의 작은 한국에 삽니다
스위스에 산다고 하기는 쫌 그렇네요.
한동안 상승세였던 프랑스어 실력이 다시 고꾸라지고 있다.
이게 다 인터넷이 제공하는 작은 한국의 안락함에 푹 빠져버린 탓이다. 전자책 구독 서비스, 이메일 일간 연재, 트위터, 인스타그램, 유튜브, 팟캐스트... 심지어 내가 직접 그려 올리는 인스타그램 그림일기 100일 챌린지까지. 한국에서도 이렇게 한국어에 몰입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없다고 한들, 나에게는 이미 7년 넘게 아무말 상대로 서로를 길들인/서로에게 길들여진 짝꿍이 있다.
기껏 외국인 체험을 하는데 왜 일상을 한국어로 채우고 있는지, 스스로 생각해도 한심하고 이해가 안 간다. 하지만 내가 사랑하는 영화 <미쓰 홍당무>의 양미숙이 말했다. “사람이 비상식적인 행동을 할 때는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잖아요. 선생님.”
비상식적인 행동도 그럴진대, 이건 그렇게까지 비상식적이지도 않다.
(현지 언어에 익숙지 않은) 외국인 체험은 한국어권에서 내가 얼마나 많은 말에 둘러싸여 살아왔는지 알려준다. 학교에서 마주치는 친구들과 나누는 5초도 안 되는 짧은 인사 (안녕. 밥 먹냐? 먹고 온다. 그렇군, 연구 파이팅. 심심하면 커피나 마시자.) 단골 카페 사장님과 나누는 이야기 (오늘은 제가 뭘 먹고 싶을 까요. 아이스 더치커피? 네, 맞아요. 역시 사장님이야.) 그 카페에 앉아있으면 들려오는 옆 테이블 대화 (주로 교회 얘기나 대학원생의 연구 이야기. 학기 중에는 학부생들의 과제 앓이.) 학교 식당에서 틀어놓은 YTN 뉴스가 들려주는 세상 돌아가는 소리 (‘뉴스 선정 참 뭐같이 하네’) KBS 클래식 FM에서 들려주는 음악과 DJ의 멘트.
이 모든 것들이 내가 아직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로 바뀐 세상은 아주 적막하다. <먼 나라 이웃 나라 - 스위스>로 예습을 하고 영어를 잘하고 프랑스어를 조금 하는 정도로는 이 적막감을 예습할 수 없다. 나는 생각을 하기 위해선 뭐라도 말하고 써야 한다는 걸, 그렇지 않으면 생각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도 겪어보지 않으면 모른다. 인터넷을 타고 건너온 한국어조차 존재하지 않는 클린룸에서 나는 건강히 지낼 수 없다.
안다. 프랑스어를 못 해서 한국어에 빠져봤자 프랑스어를 더 못 하게 될 뿐이란 거. 그럴수록 ‘성공적인 해외 체류 경험’에서 멀어진다는 것. 하지만 당장 내가 아픈데 해외 체류가 성공인지 실패인지가 뭐가 중요할까. 나는 나의 건강하지 못한 상태에 큰 관심이 없지만,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동거인의 삶이 망가지는 건 절대 용납할 수 없다.
언젠가는 이 작은 한국에서 나갈 걸 안다. 나는 비비크림의 답답함도 못 견디니까. 하지만 그건 이 작은 한국이 답답하게 느껴지고 난 다음 일이다. 나에게 성공적인 해외 체류란 유창한 외국어나 현지 경력이나 학위나 출산/육아(!) 따위로 증명되는 뭔가가 아니라 짝꿍의 행복이다. 그러기 위해선 내가 건강해야 하고, 아직까지는 약간의 한국어가 필요하다.
프랑스어 감각은, 언젠가 다시 돌아올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