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이렇게 화나는 일이 몰려온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평정심을 잡기가 어렵다. 응당 화내야 할 일들인데 물러터진 마음이 '그래도 내가 잘했어야지' 하고 자꾸 스스로를 괴롭힌다. 나를 지키지 못하는 물러터진 마음 따위에 휘말리지 말아야 할텐데. 이런 상황에 어울리는 대사를 담은 대본집을 읽고 위안을 얻는다. 비슷한 마음을 일찍이 글로 영화로 만들어준 사람들이 있었기에 그나마의 평화를 찾을 수 있다.
학부졸업은 다가오는데 아는 것도 확신도 없어서 매일이 괴롭던 날이 있었다. 그 때 우리는 매주 옛날 영화를 한 편씩 보곤 했다.어느 날, 괜히 오랫동안 궁금했던 올드보이를 봤다. 그리고 그 다음 주에는 짝꿍이 추천한 공동경비구역JSA를 봤다.
영화를 다 보고 기숙사로 돌아오던 길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세상에 이런 게 있다니. 이런 걸 만드는 사람이 동시대에 있는데, 의미없는 고민에 질식하느니 이런 걸 더 봐야겠다. 우주의 먼지가 되더라도 이런 작품을 많이 보면 행복할 것 같았다.
그로부터 만 5년이 되어간다. (운좋게 무탈한 경우) 석사를 따고 경력까지 쌓을 수 있는 시간. 어떤 동년배 지인들이 고시를 합격하고 전문대학원과 약대를 졸업하고 박사 디펜스를 하는 데 걸린 시간. 나는 여전히 우주의 먼지다. 놀랍도록 한/된 게 없다. 그나마 결혼은 했는데 결혼도 애인덕질의 일환으로 보면...정말이지 남은 건 덕질뿐이다.
덕질은 나에게 뭘 주나... 오늘 동거인은 기분이 꿀꿀한 나를 욕조로 밀어넣어 내 위생과 심적안정과 체온유지와 혈액순환을 챙겨줬다. 영화감독/작가 덕질은 작품 속 대사를 하나하나 음미하고 흡수하는 즐거움과 내가 어렴풋이 느끼던 걸 누가 대신 말해줄 때의 짜릿함을 알려줬다. 주파수맞는 누군가/무언가로부터 받는 응원과 위로의 효과는 엄청나다는 것도.
좋아하는 창작자의 작품세계에 빠져드는 게 내 인생의 모든 고뇌를 날려보내진 않았다. 지난 5년 중 불안감에 시달리지 않은 날이 없다. 관계의 피곤함으로부터 나를 대피시키지도 외국인으로서 이곳에 적응하는 걸 직접적으로 도와주지도 않았다. 나의 생산성에 기여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좋은 게 나쁜 걸 상쇄하지 않는 것 처럼 나쁜 게 좋은 걸 상쇄하지도 않는다. 몇 편의 영화대사를 통째로 외우고 이 창작자들과 영향을 주고받은 다른 창작자의 작품을 읽으면서 느낀 행복감이 있었기에 이만큼이라도 살아있다.
그럼 우주의 먼지인 나도 완전히 무용하지는 않을거야. 누군가에게는 아무런 의미 없는 영화와 책을 보고 내가 살아갈 힘을 얻는 것 처럼, 자본주의적 생산성이 전무한 나도 누군가의 삶을 충만하게 만든 적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면 덜 괴로워진다. 무력감에 지지 않고 더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어진다. 빛을 멋지게 산란시킬 수 있는 먼지가 되자고 결심한다.
오늘도 이렇게 좋아하는 작가들에게 고마운 영향을 받았다. 그 자리에 존재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당신을 좋아하는 우주의 먼지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