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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핸곰곰 Mar 04. 2019

즐겁지 않은 파리 여행.

여성 예술가들은 어디 갔지.

<비커밍>을 전자책으로 다운로드하고 기차를 탔다. 변호사나 정치가보다는 지역사회 운동가가 적성에 맞는 미국 영부인이었던 사람의 자서전을 읽으며 파리에 도착했다. 늘 그랬듯 내 체력으로 감당하기 조금 버거운 미술관 투어를 했다.


즐겁지 않았다. 내가 좋아하는 그림을 그린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특히 연인 겸 동업자에게 얼마나 고약한 인간이었는지 떠올라서.


'피카소의 여자들'은 괴롭지 않았을까. 까미유 끌로델과 잔에퓌테른은 어디로 사라졌지. 이 작품들에 그 흔적이 남아있을까. 왜 본인 이름이 적히지 않은 작품에서 흔적을 발굴해야 하나.


새로울 것은 하나도 없었다. 초중학생 때 어린이용 명화집과 웹툰 핑크레이디, 핑크레이디 클래식을 읽으며 이미 알았던 사실이다(얄궂게도 핑크레이디 작가도 비슷하게 힘든 시간을 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늘 피카소와 모딜리아니와 로댕을 보며 감탄해왔는데. 요 며칠간은 도무지 집중할 수 없었다. 왜 이제 와서?


숙소로 돌아와서 책을 마저 읽었다. 정치인의 배우자로서 미셸이 선택하고 포기해야 했던 것들을 보며 깨달았다. 내가 지금 포닥 와이프라서 그렇구나. 가만히 있으면 내가 흐릿해질까 두렵구나. 그래서 훌륭한 예술가였던 연인을 지워버린 사람들에게 분노했고, 오랑주리 지하에 마리 로랑생 그림을 보고서야 마음이 가라앉았구나.

그밖에도 나를 지치게 한 게 많았다. 기차에서 악의 가득한 눈으로 나한테 쌍욕을 한 한국 남자라든지 '귀엽다' '어디서 왔냐' '니하오'를 지껄이던 백인 남자들이라든지. 어휴. 파리에 있는 지인들을 만나러 가볍게 떠난 여행에서 내가 여러모로 타자라는 걸 집중적으로 느끼게 될 줄은 몰랐지.


이번 여행의 동반 책이 <비커밍>이라 다행이다. 물론 나는 미셸만큼 강인하지도 똑똑하지도 않지만 - 타자성을 경험하고 배우자의 커리어에 덩달아 삶이 요동쳤고 그럼에도 자신의 자리를 만들어낸 사람의 이야기는 힘이 되고 참고가 되니까. 그리고 미셸이 그랬다. 잘하고 있다고. 솔직히 이게 잘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의심해봤자 실속 없이 피곤해질 테니 그냥 믿자. 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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