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이 서른, 연애도 삼세판
이 한 줄이야말로 내 서른의 시작을 알리는 서문이었다. 누군가는 애진작에 깨달았을 이 뻔한 진리를 나는 안타깝게도 서른이 다 되어서야 깨우쳤다. 이유를 갖다 붙이자면 전부 나의 오만함 때문이었다.
나는 태어나서 무려 이십 구년을 지극히 거만하게 살아온 탓에 언제나 신은 나의 편이라고 굳게 믿었으며 그래서 인생도 내 뜻대로 움직인다고 착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때까지 나의 인생은 무서울 정도로 탄탄대로를 달리고 있었다.
아 잠깐. 여기서 말하는 인생의 정의는 다소 편협하고 왜곡되어 있음을 미리 밝힌다. 동시대 한국 사회를 헤쳐나가는 많은 이십대들은 흔히 '스펙'이라 부르는 것을 인생이라 착각하기 때문이다. 유감스럽게도 나 또한 그런 사상에 충실한 일원이었을 뿐이다.
아무튼 나는 누가 봐도 미래가 창창한, 아주 잘 나가는 (것처럼 보이는) 여자 사람이었다. 신여성이니 알파걸이니 존잘녀니, 시대만 달랐다 뿐이지 상위 몇 프로 안에 꼽히는 여성을 칭하는 단어는 모조리 날 위한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타고난 복이 많아 어릴 때부터 예술이란 예술에는 능통했고, 그 유전자 빨로 온갖 백일장 사생대회 콩쿨을 휩쓸었다. 라고 말하면 당연히 그짓말이고 아무튼 어디가서 빠지지 않을 정도의 재주는 늘 갖추고 있었단 뜻이다.
하고 많은 예술 중에서도 가장 자신 있던 항목은 작문이였더랬다. 그리하야 열 살 때부터 시나리오 작가를 꿈꿨으나, 초장에 밝혔듯 신은 공평했기에 내게 그 타이틀까지 쉽사리 내어주진 않았다. 물론 시도는 오질나게 했다. 공모전을 열 번 넘게 떨어지고 나니 갑자기 정신이 확 들었다. 인마 너 재능 없다니까. 어느날 꿈에서 신이 말했다.
결국 이야기를 포기하진 못했다. 창작자가 못 될 거라면 연구자라도 되자. 그게 내 이십대 인생을 통틀어 가장 겸허하고 올바른 결정이었다. 나는 진로를 틀어 서사학을 공부하는 대학원에 진학했다. 그리고 보란 듯이 만 스물여덟에 박사학위를 거머쥔 후 바로 다음 해에 한 기업의 팀장이 되었다.
나는 그 덕에 마치 기고만장함이라는 반찬을 꽉꽉 눌러담아 채운 도시락 같은 사람이 되어버렸다. 이미 학위를 받던 순간, 나는 휘황찬란한 금색 술이 대롱이는 박사모를 쓴 채로 하얀 조명이 쏟아지는 강단에 오르며 활짝 웃었다. 가끔씩 접지를지라도 완전히 엎어지는 삶은 절대로 없을 거라 확신하면서.
물론, 그 생각은 아주 크나큰 실수였다.
사실 지금까지 얘기는 전부 쎈 척이었고 지금부터가 리얼한 민낯이다. 누구나 그런 경향성이 조금은 있겠으나 나는 특히 합리화의 대마왕이고 답정너의 끝판왕이다.
앞서 얘기했지만 객관적으로는 빠질 것이 없다고 착각할 법한 삶이었기에 난 그냥 이대로만 살면 될 줄 알았다. 차곡차곡 커리어 쌓아 적당히 몸값 올리고, 스카웃을 거쳐 어깨에 별 정도는 달아준 후, 고상하게 대학으로 돌아가 교수를 할 계획이었으니 말이다. 놀랍게도 나의 모든 계획은 소름이 끼치도록 변수 없이 실행되고 있었다. 어어, 이쯤이면 한 번쯤 망할 법도 한데? 싶은 것이 전혀 없었다는 얘기다. 거짓말 조금 보태서 사람이 이렇게까지 잘 나가도 되나 싶은 불안감에 휩싸일 만큼.
그래서 더더욱 신이 공평하단 말을 하고 싶다. 내가 이렇게 잘나가도 되나, 하고 넉살좋은 의문을 뻑뻑 해대고 있을 때에도 이미 나의 연애사는 초토화를 맞고 맞고 또 맞아 시궁창 밑바닥을 훤히 드러내보이고 있었다. 다시 말해 나는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연애를 해 본 적이 없었다. 여기서 '제대로 된 연애'라 함은, 웃고 울고 사랑하고 싸우고 뭐 그렇게 지지고 볶고 미운정 고운정 들어서 유행가 두어 개 쯤은 이거 내 얘기잖아 하고 공감할 수 있는 그런 연애를 뜻한다.
그럼 도대체 나라는 인간은 무슨 짓을 했길래?
연애에 표준이 어디있겠냐만은, 나의 연애는 모두 눈물 겨울 정도로 기구하고 또 드라마틱했다. 참고로 이쯤에서 친구들 사이에서 나의 공식적인 별명이 <쓰마>였다는 사실을 전하기로 한다. 쓰레기 마그넷. 참으로 별스럽고 찝찝한 단어이건만, 그만큼 나를 정확하게 짚어내는 표현이 또 없을 것이므로 반박은 않겠다.
아, 한 가지 더. 연애가 인생의 전부는 아니잖아요, 라고 말 할 위인들도 물론 있겠다. 근데 어쨌든 연애가 인생의 일부인 건 맞으니까. (뭐, 적어도 나한텐 그렇다.) 애석하게도 난 뼛속까지 타고난 사랑꾼이라 더더욱 그 행위 자체를 포기할 수 없게끔 설계가 되어 있는 인간인지라.
여하튼 나는 '일하는 자아'와 '연애하는 자아'가 철저하게 분리된 채로 열렬히도 살아왔다. 내 일하는 자아가 승승장구를 할 때마다 내 연애하는 자아는 북치고 장구치다 바닥까지 쳤고, 내 이력서에 한 줄씩 추가될 때마다 내 연애사에는 빨간 줄이 자꾸만 늘어갔다.
이 놈도 아웃, 그 놈도 아웃, 저 놈도 아웃. 반전 한 번 없이 줄줄이 내리 아웃이었던지라 스포츠 경기로 치면 '처참한 연패'였고, 아무 무협지의 표현을 빌리자면 '새빨간 피바다'였다. 그렇게 내 자아들끼리 적벽대전을 일으키는 동안, 그 자아들이 공존하는 평행세계는 점점 더 견고해졌다. 한 쪽이 잘 되면 한 쪽이 망하고, 한 쪽이 내리막길이면 한 쪽은 오르막길을 달리며. 마치 정반합의 원리로 우주의 균형이라도 찾으려는 헤겔의 후예처럼 말이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을 나이 서른이 되기까지, 나는 총 세 명의 남자친구를 만났다. (스쳐 지나간 남자까지 치면 족히 서른 명은 될 것이다. 다만 개중에서도 핵심이 되는 새끼들부터 추리기로 한다.)
장장 오 년을 만난 나의 첫 번째 남자친구(4살 연상, 프로그래머)는 내가 박사과정에 입학한 후 바람이 났다.
장장 십 년을 나를 쫓아다닌 나의 두 번째 남자친구(동갑, 의사)는 내가 박사논문을 쓰던 중 바람이 났다.
장장 이도 저도 아닌 나의 세 번째 남자친구(2살 연상, 바텐더)는 내가 박사학위를 따자마자 바람이 났다.
그들이 바람 피운다는 소식은 모두 제3자 혹은 소셜미디어를 통해 유추했다. 그래, 풍문에 의거해 때려맞췄다. 근데 화가 나게도 내 예상이 죄다 똑 떨어지게 맞았다. (여자의 촉은 항상 옳다. 이건 정말 사이언스다.)
그들의 외도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 나는 하릴없이 멍을 때렸다. 지랄, 염병, 개판. 따위의 단어들이 머릿 속을 맴돌았다. 처음엔 충격을 받았고, 두 번째엔 어이가 없었으며, 세 번째가 되니 웃음도 안 나왔다. 어떻게 세 번 다 끝이 똑같냐. 그냥 그런 생각을 했을 뿐이다. 물론 그 뒤엔 막심한 고뇌가 있었다. 서당개도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데 피바람자(?)도 세번이면 원인을 알아야 할 게 아닌가.
그래서 독하게 분석했다. 나의 성향과 상황을 말이다.
1) 나는 남자친구와 싸워본 적이 없다.
여기서, 나는 무조건 져준다. 참고로 나는 평소에 아주 호전적이고 전투적인 여성이다. 근데 놀랍게도 남자한테는 이겨본 적이 없다. 지고 싶어서 지는 게 아니다. 이기고 말고를 떠나서 어떻게 싸워야 할 지를 모르겠는 거다. 분명 화는 나는데, 뭐가 화가 나서 어떻게 화를 내야 겠는지 나조차도 모른다. 그러다보면 왜 화가 났는지를 잊어먹는다. 또는 화를 낼 타이밍을 놓쳐버린다. 그러면 자연히 싸움은 일어나지 않는다. (단언컨대, 이러한 상황은 나의 기본적인 아이큐나 논리력과는 무관하다. 나는 그저 남자친구와 직면한 상황에선 번번히 압도당해 패하는 1인일 뿐이다.)
2) 나는 남자친구의 장점만 본다.
여기서, 나는 엄청난 긍정충이다. 사람의 좋은 점을 하나 발견하면 백겹의 콩깍지를 끼고 영원히 그 사람을 핑크빛으로 묘사할 줄 아는 엄청난 능력의 소유자다. 다른 말로는 그냥 잘 속는 호구다. 그러니 문제상황은 좀처럼 발생하지 않는다.
3) 나는 남자친구를 위해 최선을 다한다.
여기서, 나는 미쳐버린 강박증 환자다. 남자친구를 기쁘게 하고, 즐겁게 하며, 그래서 그가 영원히 내 곁에 머물게 하고 싶어 한다. 그가 화날 만한 일은 만들지도 않고, 그와 부딪힐 만한 일은 애초부터 피해버린다. 그게 곧 숨막히는 소유욕인 건 미처 깨닫지 못했다. 더불어 그게 곧 무시무시한 정복욕이라는 것도.
그 결과, 이런 불미스런 사건의 원인은 당연히 '나'인 줄로만 알았다. 그래서 죽도록 스스로를 자책하고 힐난했다. 왜 자꾸 똑같은 일이 발생할까. 내가 그 원인을 제공하는 걸까. 내가 충분한 매력이 없나. 내가 노력을 덜 한 걸까. 또는 내가 자기관리를 너무 안 했나. 역시 방심했던 걸까. 등등. 별 개 거지 같은 생각들이 끊임없이 뇌리를 더럽히고 어질렀다.
재밌는 건, 이런 모든 생각의 기저에는 <어째서 나는 그를 충분히 만족시키지 못했는가>라는 노예적인 사상이 깔려 있었다는 거다. 나의 생각의 주체는 나여야 하거늘, 남자친구와 관련한 일련의 생각들을 할 때면 나의 생각의 주체는 사라지고 없었다. 그저 '남자친구'라는 목적어만이 둥둥 떠다니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결론은 늘 처참했다. 정신을 차려보면 나는 구천을 떠도는 영혼마냥 이미 떠난 남자친구가 남겨놓은 잔해 속을 떠도는 미저리 전여친으로 낙인찍히게 되는 것이었다. (심지어 나는 그들에게 매달려본 적 조차 없었다. 자존심이 상해서가 아니다. 앞서 밝혔듯, 나는 마지막까지 그의 행복을 바라는 + 그의 장점만 기억하는 + 그와 싸울 전투력조차 없는 사람으로 스스로를 규정했으니까.)
무슨 이딴 개 같은 경우가. 내가 무슨 그 옛날 옛적 열녀도 아니고. 봉사란 봉사는 신나게 다 해놓고 엿 같은 뒷감당은 혼자 해야 한다니. 이런건 드라마로 만들어도 재미가 없을 게 뻔했다. (요새는 사이다 캐릭터가 대세다. 고구마 답답 캐릭터는 빡만 치게 할 뿐이다.) 암튼 그래서 나는 최대한 단순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나의 성향과 상황을 뒤집는 방식으로.
1) 나는 필요하다면 남자친구와 싸워야 한다.
2) 나는 남자친구의 단점도 볼 수 있어야 한다.
3) 내가 최선을 다 해야 하는 상대는 바로 나다.
라는 결론이 나오더라. 그리고 이런 새로운 생각의 기저에는 <나는 나도 만족할 수 있는 연애를 추구한다>가 깔려 있더라는 게 요지다. 어처구니 없을만큼 쉬운 얘기일 수도 있겠다. (이걸 이제야 알았냐고 말씀 하실 분들께서는 창 닫기 누르지 마시고요, 부디 다음 편도 읽어주시길 강력하게 소망합니다.) 근데 또 누군가에겐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얘기라니까요? 진짜로.
그렇다. 연애에 정답이란 없다. 그러나 '나'에게는 사실 정답이 있다. 그래서 쓰는 글이다. 미리 말하건대 이것은 야물딱진 연애 가이드도, 똑부러지는 모범 답안도 아니다. 나는 누군가에게 훈수를 둘 만큼 훌륭한 인간도 아니거니와 내게는 누군가를 가르칠 정도의 혜안도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이것은 나를 차버린 모든 남자들에 대한 뒷담 모음집도 아니다. (아 물론 읽다보면 무지하게 욕 나오실 거에요. 다행히 그때마다 제가 아주 찰진 욕파티를 시전할텐데 소리내어 함께 욕해주시면 되겠습니다.)
제법 긴 기간 이어질 이 <기막힌 연애담> 시리즈는 정말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나의 연애사에 관한 것이다. 그러니 시작부터 창대하고 그 끝은 더 창대한 엉망진창 시트콤이 될 예정이다. 다만, 그 끝이 허무하진 않을 것이다. 마지막 한 방은 막판에 보여드려야 재밌으니까 그건 비밀에 부치겠다. (네, 영업전략입니다.)
모든 게 완숙한데 딱 연애에만 미숙한 여자들을 위하여. 나와 같은 이유로 연애에 데인 사람들을 위하여. 그리고 나처럼 사랑에 서툰 우리들을 위하여 이 글을 바친다.
다행스럽게도 어설프게나마 학부 시절 심리학을 전공했고, 어찌보면 그런 지식을 이야기로 풀어내는 것이 나의 과업이라 생각하는 중이다. 모두가 <기막힌 연애담> 시리즈를 통해 함께 성장했으면 좋겠다. 필자 본인의 성장과 함께 말이다.
고상하고 우아한 단어들은 여기까지다.
다음 편에선 보다 적나라하게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