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또각 Sep 22. 2019

기막힌 연애담 3

죽 써서 개 주고, 키워서 남 주고.




밥 잘 사주는 헤픈 누나


내게도 첫사랑이 있었듯, 나 역시 누군가에겐 첫사랑이였더랬다. 첫사랑을 찐하게 앓고나니 큐피드도 내가 불쌍했던 모양이다. 바로 다음 해엔 큐피드의 화살이 나를 향해 꽂혔다. 이번 상대는 연하였다. 나는 열일곱, 녀석은 열여섯. 물리적으론 내가 일 년을 앞서는 중이었지만 신체적으론 녀석이 압도적으로 월등했다. 또래들 사이에서도 유독 큰 키에 얼굴은 또 말도 안 되게 귀여웠으니 요새 말하는 소위 베이글남 뭐 이런거였달까. (니가 무슨 송혜교냐 만나는 남자마다 로또 맞게. 싶으시죠? 그냥 열라게 미화하는 중입니다. 이렇게라도 해야 그나마 뒷얘기가 덜 비참해지거든요.... 네.)


때는 늦봄을 넘어가던 여름 초입. 날이 조금씩 더워지고 있었고 이제 막 하복을 입기 시작한 참이었다. 그날 따라 어쩐지 야자가 하기 싫었다. 그래서 짝꿍이랑 몰래 야자를 째고 토끼기로 했다. 아 물론 토껴봤자다. 나는 당시 지방에 위치한 공립고를 다니던 평범한 소녀였다. 내 신분으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일탈이라곤 노래방에서 목 나갈 때까지 열창하기, 조악한 스티커사진 찍으며 낄낄대기, 오락실 격투 게임으로 챔피언 먹기 따위 뿐이였으니까. 암튼 그 날은 번화가 대로변에 자리한 어느 포장마차에서 신나게 떡볶이를 먹고 있었다. 김말이며 어묵이며 야무지게도 오물거리는데 뒤에서 누군가 말을 걸었다. 누나, 안녕하세요. 저 죄송한데 번호 좀 알려주시면 안 될까요.


혹시 방금 설레셨나요. 아, 저도 그땐 솔직히 설렜죠.


근데 전부 김칫국 드링킹이었고 녀석이 번호를 따 간 이유는 전혀 다른 데 있었다. 그때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는 반드시 목에 명찰을 걸고 다녔어야 했는데, 하필이면 그 학교가 녀석이 지망하는 곳이었던 거라. 덕분에 이 사연의 제목은 <어느날 갑자기 연하남을 주웠다>가 아니라 <연하의 유혹: 대한민국 입시의 현실>로 바뀌게 된다. 최소한 로맨스 웹소설이었어야 할 장르가 알고 보니 개빡센 다큐인 거지.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녀석은 입시를 빌미로 내게 매일같이 연락을 해 왔다. 누나, 내신은 어떻게 하면 돼요? 입학 시험 많이 어려워요? 저 영어점수 이 정돈데 괜찮을까요? 등등. 당연히 싫지 않았다. 말마따나 그 존재만으로도 은혜로운 "영앤핸섬"이 아닌가. 그래서 난 성실히 답장을 해 주는 척, 박력분을 족히 한 사발은 원샷하고 녀석을 대했다. 쥐고 흔들고 눈 가리고 밑장 빼고. 초장부터 작정하고 녀석의 혼을 쏙 빼놨다는 뜻이다. 그래서 결과는? 말해 뭐해.


연하는 연하만의 매력이 있더라. 짜릿하게 귀엽고 얼얼하게 섹시한 게, 딱 그냥 내 스타일이었다. 금사빠 사랑꾼은 변명 따위 않는다. 난 진심으로 행복했다. (아직도 가끔 엄마가 저더러 넌 남자 얼굴 뜯어먹고 살 거냐며 제발 정신 좀 차리라고 하시는데, 예 저는 평생 남자 얼굴 뜯어먹고 살라고요.) 녀석이 안겨준 행복에 대해 나는 언제나 금전적으로 감사를 표했다. 열일곱의 나는 착하고 또 서툴렀으니까. 남에게 받은 과도한 행복을 도대체 어째야 할 지를 몰랐던 것이다. 어떻게라도 보답하지 않으면 녀석이 떠날 것만 같았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내 마음이 전달되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밥 사주고 옷 사주고 집에 갈 때 택시비까지 쥐어주고, 그 짓을 띄엄띄엄 4년 동안 했다. (대학입시 때문에 한 번 헤어진 후로, 우리는 그냥 아는 누나 동생 사이로 돌아갔다.) 그동안 녀석은 여자친구가 세 번인가 네 번 바꼈는데, 무슨 일인지 전용 ATM은 항상 나였다. 얼핏 보면 뭐 스폰서인가 싶겠지만 내가 금수저였던 건 절대로 아니다. 녀석이 흙수저였던 것 또한 절대로 아니다. 심지어 우리는 서로 털 끝 한 번 건드려본 적 없는 킹 오브 순수의 관계였다. 그래서 더더욱 누가 누굴 후원하고 누가 누굴 공사치고 하는 관계일 수도 없었다. 그렇게 속물적으로 굴기엔 지나치게 어린 나이기도 했고. 그게 뭔 엿 같은 플라토닉 러브냐고? 내 보기엔 그냥 실 없는 플라스틱 러브다.


껍데기 뿐인 사랑. 나는 녀석의 첫사랑이었다는 이유만으로 4년이 넘도록 감정적인 착취를 당했다. 쿨하고도 따뜻한 첫사랑 연상녀라는 환상을 깨지 않기 위해 나는 최선을 다해 코스프레를 해야 했다. 바보같이 왜 그랬냐 묻는다면, 내가 녀석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녀석은 나를 무제한 예금통장 정도로 생각했겠지만, 실상 나는 사랑의 사채를 끌어다쓰는 감정의 빚쟁이였을 뿐이다. 내 애정의 잔고는 바닥이 난 지 오래였다. 녀석이 내가 쏟아부은 애정의 이자까지 싹싹 긁어모아 다 가져가버렸기 때문이다.


결국 내 쪽에서 먼저 백기를 들었다. 그 즉시 나는 녀석에게 물었다. 이게 뭐하자는 거냐. 내가 무슨 어미새냐. 너 왜 자꾸 따박따박 다 받아먹으면서 나한테는 곁을 안 주냐. 왜 그런 식으로 나를 헛갈리게 하는 거냐. 그랬더니 녀석이 아주 쉽게 그러더라. 누나 원래 그런 스타일 아니야? 누나 원래 남자들한테 잘하잖어.


이런 시베리안 허스키 수박 씨발라먹을 십장생을 봤나. 아니, 말하면서도 족(足) 같네 진짜. 너니까 잘해준 거지. 좋아하니까 착하게 한 거지. 어처구니가 없었다. 호의가 계속되면 둘리인 줄 안다더니. 염치도 없고 은혜도 모르는 혁신적인 개자식 같으니. 그렇게 나는 한순간에 밥 사주는 헤픈 누나로 전락했다.





개새끼냐 싸이코패스냐,

그것이 문제로다.



솔직히 저런 날 두고 호구라 비난하실 예정이라면, 이제부터 똑똑히 들어주시라. 나는 호구가 아니라 벤츠다. 까리하고 쌈빡하게 최소한 500마력은 너끈히 넘어주시는 사륜구동 럭셔리 세단이란 말이다. 호구라 함은, 어리바리 아는 게 없어 조공 펑펑 뜯겨가며 눈탱이 맞는 게 호구고. 나는 내 자발적 의사에 의거해 좋아하는 남자에게 물질적 심리적 지원을 아끼지 않은 벤츠고.


근데 아무렴 내가 호구건 벤츠건 연애를 할 때 중요한 건 상대다. 연애도 결국엔 사업이니까. 굳이 표현하자면 기본적으로는 호감을 거래하는 비즈니스란 얘기다. 그렇다고 신나게 통빡 굴려가며 나노 단위로 손익을 따지라는 뜻은 아니다. 아무튼지간에 거래는 거래니까 불공정하게만 하지 말잔 얘기다. 하필이면 내가 가담했던 모든 연애가 불공정거래였기에 하는 소리다. 것도 굉장히 전형적인 축에 속하는. (참고로 지금까지 구구절절 나열한 풋내나는 얘기들은 나의 대대적인 연애담 3부작의 축에도 못 낀다. 진짜는 아직 시작도 안 했습니다.)


불공정거래가 일어나는 이유는 뭘까. 대개는 한 쪽이 한 쪽을 등쳐먹는 구조기 때문이다. 그 사기꾼이 남자일 경우, 우리는 흔히 그들을 쓰레기 아니 <나쁜 남자>라 칭한다. 근데 나쁜 남자에도 종류가 있다는 걸 아셔야 한다. 그들은 크게 두 부류로 갈린다.


첫째. 지가 나쁜 걸 아는 놈. 개새끼들이다.

둘째. 지가 나쁜 걸 모르는 놈. 싸이코패스들이다.


개새끼 부류는 늘 변명이 많다. 사주에 강이라도 흐르는지 입만 열면 구라가 청산유수다. 어장은 넓디 넓고 수문은 활짝 열려있고, 뭐 인천 앞바다 주인이세요? 자기 유리할 대로 상황을 요리조리 피해가는 데 선수다. 가는 여자 안 붙잡고 오는 여자 안 막겠다며 난 그저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돌듯 자연의 섭리대로 살고 있을 뿐이라는데... 아주 갈릴레이 갈릴레오 납셨다. 기본적으로 연애를 재미로 하는 애들이다. 강태공의 숨겨진 자식답게 때 되면 꼬박꼬박 떡밥 던져주시고, 적절한 타이밍에 릴대 당겨주시고. 특기는 밀당이요 취미는 불장난이라 남의 심장에 종종 불을 지른다. 대부분 여자들이 이런 남자를 상대할 만큼의 방화벽이 없기 때문에 호되게 당하기 일쑤다. 근데 재수없게도 지도 지가 나쁜 걸 안다. 수 틀리거나 일 꼬이면 스리슬쩍 발 빼고 입 싹 씻는 놈들. 꼭 여자 입으로 <근데 우리 무슨 관계야?> 하고 묻게 만드는 놈들. '에이 또 왜 그래'를 입에 달고 사는 놈들. 그게 개새끼 부류다.


싸이코패스 부류는 변명이 없다. 내가 곧 세상의 중심이고 우주의 태양이며 이 땅의 군주다. 지가 곧 법 그 자첸데 변명 할 일이 뭐가 있겠는가. 본인 말이 정답이니 반박은 반박한다. 혼자만의 법치주의에 빠져 기적의 논리로 상대를 휘젓는 스타일이다. 어장? 수문? 그게 다 뭐죠? 난 태어날 때부터 바다의 왕자였고 심해의 수호자고 포세이돈의 아들이고 아쿠아맨의 친척인데. 아무튼 그 정도로 애초부터 어장을 만든 적도 키운 적도 없는데 항상 대형 아쿠아리움을 달고 산다. 왜냐. 대부분 이런 유형은 머리가 좋고 사회적인 지위도 높아서 굉장히 매력적으로 보이거든요. 덕분에 진짜 겁나게 이기적이고 끔찍하게 자기중심적이다. 그래서 이런저런 방식으로 남의 심장을 박살내곤 한다. 당연히 그래놓고 사과따윈 없다. 지가 나쁘다는 거 자체를 모르니까. 수가 틀리거나 일이 꼬일 일도 물론 없다. 본인 기준에선 이상한 게 1도 없기 때문이다. 여자 입으로 <근데 우리 무슨 관계야?> 하고 묻지도 못하게 만드는 놈들. '난 원래 그래'를 입에 달고 사는 놈들. 그게 싸이코패스 부류다.


나열하고 났더니 소름이 쭉 돋네. 여하간 지옥행 고속열차 타기 싫으면 이런 것들과는 상종을 말아야 한다. 보란 듯이 골인시키려다 보기좋게 나만 골로 갈 테니. 아. 근데 나쁜남자를 어떻게 알아보냐고?


당신을 헷갈리게 하는 남자는 일단 거르세요.





악법도 법이고 위선도 선이다.

그러나 병신은 그냥 병신이다.



참고로 사람은 안 변한다. 그러니까 고쳐 쓸 생각은 애초에 접자. 나 역시 자그마치 10년 간 이런 나쁜 새끼들 개종시켜서 어떻게 좀 인간 만들어볼라고 했는데. 아시죠? 걸레는 빨아도 걸렌 거.


결론적으로 그나마도 절반은 인간 만들어놨더니 그때부턴 이것들이 자아가 생겼는지 죄다 도망쳐 버렸다. 정말 유감스러운 것은, 그들이 도망가는 바람에 또 다른 피해자들이 속출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당연히 그놈들이 바람난 걸 알았을 땐 화부터 났다. 미친듯이 열받고 다 때려부수고 싶었다. 바람난 놈도 미웠지만 같이 바람난 년은 더 미웠다. 내가 어떻게 만든 작품인데 가격표도 안 붙은 걸 중간에서 가로 채. 날로 먹고 싶거든 광장시장에서 육회나 사드세요 언니. 양심이 없어도 너무 없는 거 아니냐고. 하여튼 각오는 단단히 해. 비폭력 무저항 그딴 거 난 모르겠으니까. 아니 내가 간디야? 난 최소 함무라비야.


당시엔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그냥 처절하게 복수하고 싶었다. 남의 거 뺏어간 주제에 발 뻗고 잘 수 있을 것 같냐. 구면인 그놈도 그놈대로 싫었지만, 뉴페이스인 그녀는 더욱 더 싫어서 어떻게든 현장을 덮쳐 깽판을 치고 싶을 뿐이었다. 근데 곰곰이 생각할수록 얘들도 안 됐다 싶은 거라. 저기요, 그 새끼 아직 미완성인데... 쫌만 더 기다려보시지. (사실 도로 줘도 안 갖는다. 퉤.)


뭐, 주제는 복수 잘 하는 법 따위가 아니다. 바람난 놈을 상대로 맞바람을 피울 필요고 없고, 나쁜 남자에 대항하자고 나쁜 여자가 될 필요도 없다. 혹여라도 피의 복수를 하고자 칼을 갈고 있다면 차라리 그 체력을 다른 데다가 쓰는 게 훨 나을 것이다. 최고의 복수는 용서가 아니라 차단이다. (용서도 에너지다. 내 몸을 좀 더 소중히 여기자.) 이미 떠난 놈은 그냥 떠나 보내자. 더구나 그런 식으로 떠난 놈이라면 더더욱. 어머머 쓰레기에 발이라도 달린건지 알아서 제 인생에서 꺼져주더라구요, 정도로 생각하자. 애초에 바람 날 놈은 어떻게든 나게 돼있으니까. 바람의 원인은 상황이 아니라 사람에 있다.


엘사가 말했다. Let it go 하자고. 아쉽게 보면 해탈인데 좋게 보면 인생에 대한 통찰이다. 왜냐면 사람은 소유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연인 관계에서 약속을 어기는 건 매우 나쁘다. 상대에게 상처를 주는 것도 물론 나쁘다. 그러나 쟤 하나 사라진다고해서 내 인생이 불행해지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 네가 없으면 안돼, 싶은 사람은 만나지 말자. 그런 사람은 당신이 원래 가진 행복까지 갉아먹고 빠져나갈 인간이다. 네가 있어서 더 행복해, 싶은 사람을 만나자. 원래도 행복한 나를, 같이 있으면 조금 더 행복하게 만들어 줄 사람 말이다.


무척이나 이상적으로 들리겠지만 무엇보다도 일상이 되어야 할 얘기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 자, 남부터 사랑하려 들지 말자. 내 인생은 내꺼고 내 사랑도 결국엔 내 꺼니까. 나는 여러분들이, 그리고 내가 행복했으면 한다. 그 행복을 꼭 남에게서 찾을 필요는 없다. 쇼펜하우어는 사랑이 없다고 말했지만 그건 염세주의자의 주장이고, 뼛속까지 낭만주의자인 내 생각은 다르다. 사랑은 있다. 분명히 있다. 그럼 어디 있냐 물으신다면, 그대들 안에 있다고 답하겠다.












+

쓰고나니 오글거리네요.

전 이만 황급히 퇴장을.....




작가의 이전글 기막힌 연애담 2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