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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g Nov 06. 2019

서울에서 4시간 반

서울, 광저우, 피렌체 10년의 타향살이 후, 고향 경주에 돌아온 탕아

성경에서 탕자는 아버지에게 자기 몫의 재산을 받아 고향을 떠난다. 매일 밤 술과 쾌락을 즐기지만, 돈이 바닥나면서 그 행복도 끝이 난다.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게 되고 나서야 아버지의 품으로 다시 돌아와 잘못을 뉘우친다.
술과 쾌락을 즐기는 탕자 (Giovane Parma, 1544-1626)


수능을 치고 바로 다음 날이었던가 짐을 싸서 서울로 떠났다. 고등학생 때는 공부를 잘하는 편은 아니었어도 정말 죽기 살기로 열심히 했다. 왜냐하면 나는 서울에 가서 놀고 싶기 때문이었다! 모든 유흥거리는 물론이고 예술, 문화, 인구, 선진 문물이 다 서울에 집중되어 있으니. 서울이 아닌 외부에 사는 것은 죽음과도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서울에 있는 대학에 합격했고, 그 순간 내 앞길에는 이제 성공만이 있을 거라고 믿었다.


휴학까지 합쳐서 5년 동안의 학교생활은 정말 재미있었다. 기억은 다 왜곡되는 거라지만, 온통 즐거운 기억밖에 없을 정도로 좋은 사람들만 만났고, 즐거운 시간들만 보냈다. 학교에서는 과생활 뿐만 아니라 동아리 활동도 했고, 대외 활동도 엄청 많이 했기 때문에 나중에 이력서에는 쓸게 너무 많았다. 자기소개서를 쓰는 것도 별로 어렵지 않았다. 처음 들어간 회사의 대표가 정말 부지런하게 살았네요.라고 할 정도로.


그때까지는 정말 좋았다.


대한민국에서 조각을 전공하면 졸업장과 함께 중대한 선택과 맞닥뜨리게 된다. 

'이 가시밭길을 갈 것인가? 말 것인가?' 교수님이 하셨던 말씀이 생각난다. 여러분 예술가로 산다는 것은 사회 하층민으로 산다는 것임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됩니다. 친구들과 비슷한 차도, 집도 가지지 못할 것입니다! 이게 자라나는 새싹들에게 무슨 제초제 같은 말이란 말인가. 하지만 사실이다. 졸업식날 어머니와 오빠가 올라와서 학사모도 나누어 쓰고 축하도 해주었다. 점심을 먹고 가족들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고 나는 내 방에 누워서 낮잠을 한 숨 잤다. 눈을 뜨는 순간 이 곳은 내가 잠에 들기 전과는 완전히 다른 곳임이 인식되었다. 이 세계는 더 이상 안전한 온실이 아니었다. 앞이 캄캄했다. 침대에 앉은 체로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바로 다다음날 떠나는 제주도행 티켓을 샀다.


학교에서 나무 조각이나 하고, 말도 안 되는 도시 계획서를 만들어서 뿌리는 현대미술적 공상을 하던 사람이 사회에 나가서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 순수예술 졸업장을 가진 사람에게 평범한 연봉을 주면서 일을 시킬 만큼 순진한 세상은 아니다. 


제주도에 갈 때 들고 갔던 두 권의 책중 한 권, 위로가 많이 됐던 책


생각을 좀 해야겠다 싶어 제주도로 갔지만. 오히려 그곳에서는 생각을 비울 수 있었다. 그랬더니 해답도 거기에 있었다. 그럴 생각은 없었는데, 차가 없으니 자연스럽게 걷게 되었고 올레길을 따라 걷다 보니 하루가 다가는 날들이 이어졌다. 그때는 몰랐는데 불교 명상 중에 걷기 명상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어쩌다 보니 그걸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혼자 배낭을 메고 게스트하우스에서 나왔더니 지나가던 행인 한분이 "올레길 걸으세요?" 하고 물어보셨다.

그때는 그럴 생각이 없어서 "아니요:)"라고 대답했는데, 10km가량 떨어진 올레길에서 다시 마주쳐 약간 민망했다.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며칠을 걸었더니 내 안에 숨겨져 있었던 어떤 두려움이라고 표현할까? 그러한 감정들이 느껴져 파도 앞에서 펑펑 울기도 했다. 그리고 그다음에는 아무것도 두려워할 것이 없다는 감정이 들었다.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고, 해보기 전에는 그것이 옳았던 선택인지 아닌지 절대 알 수 없으며, 무조건 해봐야지만이 알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기분이 한결 좋아졌고, 제주도를 떠나올 수 있었다.


서울에 돌아와서는 본격 취준생 모드로 들어갔고, 곧장 공간 디자이너로 일 할 수 있는 전문적인 기술들을 배우고 외국어 영역이나, 실무에 대한 경험도 조금씩 가지면서 또 숨 가쁘게 6개월 정도를 보내고는 원했던 몇 군데의 회사에서 연락을 받았다. 원래도 대기업 같은 곳에는 꿈이 없었기 때문에, 내가 지원한 곳은 중소기업들이었는데, 그중에서도 내가 선택한 곳은 정말 작은 스타트업 회사였다. 조금 더 안정적인 회사들을 제처 두고 그곳에 가기로 결정한 건, 회사의 비전이 나의 지향점과 같다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해외 업무가 많다는 것이었다.


동관의 흔한 포차, 앞에 있는 그릇을 셀프로 물에 세척해 먹어야 한다.

우리의 근무지는 서울과 중국 광저우의 동관이라는 곳이었다. 나의 첫 혼자 해외여행지가 중국이었어서 그런지 중국에 대한 나의 인상은 아주 좋다. (내 첫 여행지는 상해였는데, 21살 때였다. 허름한 게스트하우스에 묶었지만 운 좋게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 밤마다 증권사 파티를 다니며 일주일 조금 넘는 시간을 정말 재미있게 보냈다.) 

회사를 다니는 일 년 6개월 동안에도 서울 월세가 아까울 만큼 절반 가까운 시간을 중국에서 보냈다. 한국에서 왔다는 이유만으로 과하게 좋은 대접을 받았기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중국에 대한 나의 이미지는 호탕한 사람들, 셀 수 없이 다양하고 맛있는 음식들, 소주와는 비교도 안되게 맛있는 술들, 한여름에도 펄펄 끓여서 마시는 물까지도 사랑스러운 부분이었다.


회사는 좋았지만 과중한 업무와 스타트업 회사 특유의 시스템 부제로 인해 쇼를 앞둔 상황에서는 미치고 팔짝 뛰어버릴 일들이 넘쳐났다. 내가 맡은 업무는 가구 브랜드의 공간 디렉터 업무였는데, 초봉을 받는 신입의 첫 프로젝트가 50억 가량이 투자된 가구 브랜드의 론칭 쇼 공간 디렉팅이었으니... 

그래도 나름 잘 해결해 나가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1년이 넘게 주말근무와 야근을 했고, 미국 지사와의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새벽에도 깨있어야 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했기 때문에 18년 봄에는 우울증 증세와 교감신경 장애 때문에 새벽 4시 54분만 되면 눈이 번쩍 떠져서는 견딜 수 없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고, 아침까지 괴로운 시간을 보내곤 했다.

평소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생각으로 벼랑 끝에 몰아세워야 성장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살았었는데, 이 자리는 더 이상 내 자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퇴사를 결심했다.


퇴사하기 전에 직장 동료들과 농담 삼아했던 말이 있다. "우리 팀워크는 진짜 죽이는데, 우리끼리 일 벌여도 너무 재미있을 것 같지 않아? 유럽 가서 민박집 해보는 거? 그런 거 진짜 재미있을 것 같은데..."

"진짜 우리 중에 누구 하나만 용기 있으면 다 갈 수 있다?!"

그래서 내가 용기를 냈다. 회사 식구들을 다 데려간 건 아니지만, 퇴사 후에 피렌체에 가서 민박집을 차렸다. 한 번쯤. 해보고 싶던 일이었다.


피렌체 베키오 다리

피렌체가 될 거라고는 생각해본 적도 없었지만, 정하고 보니 어딜 가도 피렌체만 한 곳이 없었다. 작고 아름다운 요새 같은 도시는 아직 떠올리기만 해도 벅찬 감정이 차오를 정도니까. 

도시가 아름답고 말고, 민박집 사장님이란 호텔서비스 전반 _ CS, 청소, 식사, 여행객들의 안전까지 모든 것을 챙겨야 하는 일이다. 사진에 있는 베키오 다리까지 집에서 걸으면 10분밖에 걸리지 않지만 그마저도 일주일에 한 번 갈 수 있을까 말까 할 정도로. 

쉴 겸 놀 겸 해서 간 곳에서도 열심히 제 살만 갉아먹다가 지쳐 나자빠져 19년 2월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래서 그런지 아직 TV에서 이탈리아가 나오면 마음이 저려와서 오래 볼 수 없다. 


이제 돌아갈 곳은 경주 고향집 밖에 없었다. 피렌체로 떠날 때, 나는 가족들에게 참 무심했다. 너는 어떻게 그렇게 배려가 없을 수 있냐며 울면서 다그칠 만큼. 그도 그럴 것이 이탈리아로 떠나기 이 주전쯤 통보를 하고 2박 3일 동안 잠깐 집을 찾아갔었다. 가족들은 내가 멀리 가기 전인만큼 떠나기 전까지 2주 정도 같이 있으려는 요량인 줄 알았나 보다. 하지만 서울에 집도 정리해야 하고 급하게 잡은 일정인 만큼 처리해야 될 것들이 많아서 가족들과 보낼 시간이 많지 않았다. 그때도 별로 미안한 감정은 들지 않았다.

그런데 떠나기 전 공항에서 영상통화를 하는데, 부모님은 힘들면 언제든 돌아오라고 했다. 그 말을 들으니 갑자기 미안함이 밀려와 그제야 나도 눈물이 났다.


만신창이가 되어 돌아온 아들을 껴안는 아버지와 축하연을 준비하는 이웃들 (Giovane Parma, 1544-1626)

남의 집 머슴살이나 다름없는 생활 후에 집에 돌아왔고 모두가 두 팔 벌려 돌아온 나를 환영해 주었다. 

회사 생활할 때, 경주에 가면 항상 긴장이 풀린 탓인지 몸살 같은 것이 와서 병원에 몸져눕곤 했었다. 

이제 정말 아예 몸져눕고 싶은 상태가 되었다. 푹! 자고 싶어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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