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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디 Mar 13. 2020

어른들이여, ‘보이지 않는 세계’를 알아야 한다

이홍우, 교육의 목적과 난점 제3장 형이상학과 교육을 읽고

이홍우, 교육의 목적과 난점

 3 형이상학과 교육을 읽고




  전체 결과의 80% 전체 원인의 20%에서 일어나는 현상은 파레토의 법칙(Law of Pareto), 혹은 ‘80 20 법칙으로 흔히  알려져 있다.  문단부터  잔인한 말일수도 있지만, 최근들어 느끼는것은 ‘분명하게 전체 집단의 20% 정도가 집단의 성과 80% 구성하는 경우가 매우 많다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러한 20% 리더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남들이 쉽게 파악하지 못하는 조직의 문제점이나, 분위기들을 리드해 나가는 것을   있다.  사람들의 공통점은 대체 무엇일까?

  예로부터 인간 사회는 ‘보이지 않는  ‘보이는  치열한 싸움으로 구성되어왔다. 대부분의 사회는 보이지 않는 것을 지지하는 사람들과 보이지 않는 것을 지지하는 사람들로 나뉘어졌다. 근대에 들어서, 이것은 관념론(보이지 않는 ) 유물론(보이는 )으로 대표되었고, 지금도  집단간의 치열한 논쟁은 이어지고 있다.

이 그림을 보고 누군가가 떠오른다면, 당신은..!!

삶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앞서 언급했듯, 삶을 바라보는 방식에는 다양한 관점이 존재하지만, 가장   집단은

1. ‘보이지 않는  있다고 인정하는 사람 
2. ‘그렇지 않다. 세상은 눈에 보이는것들로만 존재하는 것이다라고 ‘보이는  인정하는 사람

이렇게 크게 나눌  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옳다, 그르다 논할  있는 명제들은 그렇다면 어느 집단에 속하는 것일까? 우리가 옳다 그르다를 논한다는 것은 이미 그것이  ‘눈으로 확인할  있다라는 뜻과 동일하다라는 것을 금방 파악할  있다. 그래서 옳다, 그르다를 나눌  있는것은 현상계에 존재하는 눈에 보이는 것들로만으로도 충분이 판단이 가능하다.

  그러나 ‘정신적인  가장 넓은 의미에서도 ‘눈으로 확인할  있는  범위를 벗어나는 경우가 많다. 앞서 옳다 그르다를 판단했던 과학이나 수학과 같이 실증적 증거를 다루고, 진위를 다루는 명제와는 성격이 다르다는 것이다. 과학이나 수학은 단순히 ‘정신적인  ‘활용하는 학문이지, 그것을 탐색하는 학문은 아니다. 그것을 탐색하는 순간부터 그것은 형이상학적 ‘보이지 않는 세계 들어가기 때문에 엄격하게 학문의 성격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정리하자면 형이상학적 ‘보이지 않는 세계 형이하학적 ‘보이는 세계’, 무엇을 추구하냐에 따라 학문의 성격과 종류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학문도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이렇게 종류와 성격이 달라지는데, 우리의 삶은 그렇지 않다라고 자신있게 보장할  있는 사람은 없다. 어떤것을 추구하냐에 따라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도 달라질  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의 삶속의 명제들은  논리적 가정으로  명제에 대해서 연쇄적인 질문을 통하여 탐구될  있다는 특징이 있다. 예를 들어, 4살짜리 아이들이 제일 많이 하는 ‘?’  여기에 해당된다-대부분의 부모들이 기겁하는 ‘ 질문이다- 우리는 이러한 ‘?’라는 질문을 통해서 논리적 가정의 막다른 골목을 만나게 되는 경우가 매우 많이 존재함을 인정해야만 한다. 결국, 그곳에서 차례로 되돌아 나올  밖에 없는 ‘절대 수준의 논리적 가정 존재함을 인정할  밖에 없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지 않는것은 모종의 궁극성을 내포하고 있는 부분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궁극성에 기반하여 정리해본다면, 눈에 보이는 것으로만  세상을 설명하기에는 우리의 삶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런데, 조금  심층적인 세상의 이해를 위해 4살짜리 아이들이라면 ‘절대수준의 논리적 가정 받아들이도록 부모는 충분히 가르칠  있다. 그러나, 일반적인 성인이라면 자랄 대로 자란 어른들이다. 그들은 그들의 삶의 경험과 종합적인 판단으로 쉽게 교육한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러한 어른들이 서로의 입장에서 ‘절대 수준의 논리적 가정 달리 할때, 그리고  의견의 차이가 결코 사소한 것이 아니라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과 같이 ‘삶을 어떻게 지각할것이냐 문제로 나아갔을때 사람들은 서로를 죽이기 까지 하는 지경을 우리는 역사와 우리의 삶과 부모를 통해 보아왔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보자. 파레토의 법칙에 의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20% 아닌 80% 삶을 살아간다. 나는  부분을 이렇게 정의하고 싶다. 집단을 이끄는 20%이외의 80%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이 실재요,  그것뿐이다라는 상식적인 사고방식에 안주하여, 집단을 꿰뚫어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들을  애써 무시하며 자신의 눈앞에 보이는 현실과 물질들에만 집중하느라 여념이 없는 삶을 살아간다고 정의하고 싶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절대 수준의 논리적 가정 활용하는데 그칠 , 그것을 탐색하지는 않는다. ‘절대 수준의 논리적 가정 활용하는  그치는 것과 그것을 탐색하는  사이의 차이가 어느정도로 심각한가 하는 것은 각자 생각하기에 달려있다.

  4차산업혁명이 일어나는 시대이다.  어떤 시대보다 물질적인 가치들이 극렬하게 호가를 치고 있는 시대이다. 그러나, 보이는 세계는 보이지 않는 세계을 단순히 이용만 하는 세대이다. 4차산업혁명 또한 보이는 세계에 대한 무한한 확장 가능성이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가치들을 이용만 하는 겉표면인것을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이럴때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인식을 명확히 하고 이것을 탐구하고자 하는 태도, 보이지 않는 것을 알아가고자 하는 태도를 가지면서 4차산업혁명을 바라본다면, 단순히 기술을 이용하는 자에서 그치는것이 아닌, 새로운 기술의 메커니즘을 파악하고, 이것에 생명을 불어넣어 사회에서 가장 필요한곳에  기술이 살아 숨쉬게 쓰일  있는 분야를 만드는 HQ(headquarter), 헤드쿼터의 위치에서 이러한 기술혁명을 바라보고 있을것임을 단언한다.


사족



  이쯤되면  우리가 대체 ‘보이지 않는 들이 무엇인지,  이것에 대해서 탐구하는 태도를 취하며, 이것이 있다고 믿어야 한다고 설득당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충분히 이야기   같다. 사실 이것도 명쾌한 해답을  수는 없지만, 고대의 소크라테스부터 시작된  시대의 천재들은 보이는 것으로만 자신의 탐구를 끝내지 않았고, 보이지 않는것에 대한 열렬한 탐구를 끊임없이 진행했으며, 훗날 이러한 탐구를 접한 사람들은 외양이 전부가 아니며,  안에 실재를 통하여 우리의 실체가 파악된다고 인정하였고, 지금까지 이러한 학문이 지속된것을 보면 나름의 설득력있는 근거가 더욱 될것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이 보이는 것들로만 존재한다면 그것은 끊없는 우연에 의해 규정되는 나의 존재로 인해 허무할 뿐이며,  세상에 어떠한 가치와 목적도 없이 우연히 태어난 나는 끊임없이 존재를 규명하기 위한 사회적인 위신과 물질적인 풍요를 추구하며 살아가야만 하는 비참한 결론에 이를  밖에 없지 않을까? 세상은 생각보다 단순하게 이루어져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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