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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디 Mar 10. 2020

“이거 배워서 대체 어디다 써먹어요?” 에 대한 대답

이홍우, 교육의 목적과 난점 제2장 삶과 교육을 읽고 고찰하기



“이거 배워서 대체 어디다가 써먹어요?”


  학생을 가르치거나 부모의 입장이라면 언젠가는 한번 받아보는 질문. “공부해야 한다”라고 이야기하면 전형적으로 돌아오는 대답 중 하나이다. 사실 이런 질문들을 하는 아이들중에 순수한 마음으로 정말 이것이 어디가가 쓰이는지를 고민하고 고찰하여 너무나 궁금하다 못해 잠도 못자고 질문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공부하다가 혼났을때, 정말 공부하기 싫을때에 나름의 선생님에 대한, 부모님에 대한 소심한 반항의 의미의 질문으로 쓰이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러한 질문을 받은 어른들은 적잖이 당황하게 된다. 그도 그럴것이, 30-40년을 살았던 어른들도 삶을 살다보면 생각만큼 이런것들이 나에게 무슨 의미인지, 어디다가 쓰이는지에 대해서 쉽게 떠오르는것들이 없기 때문이다. 어른들이 머리에 쥐가날정도로 멋있는 답변을 고민하는 그 순간, 아이들의 재촉과 불평불만의 얼굴이 보이고, 어른들은 분노에 가득차 이야기 한다.



“나중에 너 먹고 살려면 필요해. 좋은 대학, 좋은 직장 가려면 필요해.
이게 너를 위해서 하는거지 나를 위해서 하는거야?”


그러게 말이다. 반은 진심이고, 반은 거짓말이다. 너를 위해서 하는것이라는것에 대해서는 동의하지만, 나중에 너 먹고 살려면 필요하다는것에 대해서는 또 의문이 든다. 대체 어떻게 어느분야에서, 어느 시기에 이런 지식들이 필요한지 우리는 답변해주지 못한다. 교육을 전공하는 나조차도, 이런것을 왜 배워야하는지에 대해서 단 한번도 진지한 답변을 들어본적이 없다. 단지, 입시에 필요했던 지식이고, 무언가 알고있으면 좋을것이라는 막연한 기대에 기대어 배웠던 지식이었다. 대체 내가 배우는 지식들과 교육이 나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것일까?



대부분의 부모님들은 이런 표정이시리라.


  많은 교사와 부모님들은 우리 아이들에게 공부를 시키며 막연한 기대감을 품는것이 사실이다. “내가 낳은 아이와 가르치는 아이는 무언가 다른 아이로 만들것이다” 라는 기대감속에 살아간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이것을 왜 배워야 하는지에 대한 답변 대신에, “일단 해봐. 알게 돼. 내가 해보니까 대학가는데 도움이 됐어”-여기에는 많은 레퍼토리가 존재한다- 라는 달콤한 거짓말을 아이들에게 심어준다.  백번 양보해 이아이들에게 많은 레퍼토리를 심어주어 그것이 아이들에게 납득이 되었다 해도 솔직하게 그 대답이 우리가 왜 이 수학문제를 풀고 있어야 하는지에 대한 대답은 되지 못한다. ‘대학을 잘가기 위해, 더욱 풍요로운 삶을 살기 위해’ 라는 이유가 이 아이들에게 학교에 10시간 이상이나 앉아서 수학문제를 가르치고 배우는 이유는 아니라는 것이다. 공부를 왜 하는가. 대학 잘가려고? 시험 잘보려고?

  우리 솔직해 지자. 부모와 교사들은 아이들을 속이고 있다. 교육을 받기 이전의 아이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현실적이고 세속적인 것을 들이밀어 먼저 아이들이 발을 내딛게하고, 이 아이들이 차차 교육을 받는 그 동안에 그것과는 다른 교육의 진짜 의미를 알아줄것이라고 기대하며 말이다. 다시 말해, 21세기 교육은 거짓말로 둘러댄 부모의 입지를 무안하게 하지 않기 위한 변명으로 가득차게 되었다. 부모도 제대로 대답해줄 수 없는것이 마치 진리이고, 사실인양 떠들어대며 불안감을 강조한 뒤에, 이 아이들이 스스로 교육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기를 바라는 기만적 행위가 가득찬 교육이 되어버렸다.

  최근들어 인문학의 중요성이 대두되어 각계각층에서 마다 교양(liberal art)에 대한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그런 인문학의 토대를 이루는것은 ‘21세기를 분석해놓은’ 분석책도 아니고, 감성을 저격하는 ‘인스타감성’을 소유한 핸디북도 아니다. 누가 읽겠거니 싶은, 아주 두껍고 어려운 말들이 가득한 ‘고전’책이다. 플라톤의 국가,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케케묵은 책들이 대두되고 있는것이다. 모든것이 요약되고, 복잡한것이 배제되는 사회에서 왜 고전(Classic)은 재조명 되고 있는지를 다시 되돌아 보아야 한다.

  고전들의 가장 큰 공통점은 바로 ‘일반적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았고, 감히 언어로 풀어낼 수 없는것을 풀어냈다는 점’에 있다. 즉, 그들은 남들과는 다른 시야와 안목을 가지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그들은 끊임없이 삶에 대한 고민과 질문들을 내뱉었다. 그들은 해답을 찾는것이 아니라 질문을 찾는 자들이었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왜 악한가?’, ‘사회는 왜 분열되는가?’와 같이 그들은 끊임없이 질문을 찾았다.  많은 사람들은 이야기한다. 이런것이 대체 밥먹고 사는데에 무슨 도움을 주는가? 나에게 어떤 이익이 떨어지는가? 사실 이에 대한 대답은 필자인 나도 쉽게 할 수 없는것이 맞다. 인간이 왜 악한지, 중력이 어떻게 존재하는지를 안다고 나에게 밥 한그릇이 떨어지는것이 아닌것이 사실이니까 말이다.

  그러나, 짧게 생각해서는 큰 오산이다. 길게 보아야 한다. 현상을 보면서 사는 것이 가치 있는 삶이라는 것은 현상을 보기 전에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현상을 보고 난 뒤에야 비로소 알 수 있는 것이다. 산을 오르기전에는 끝없는 전경의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것 처럼, 노령의 어머니, 아버지들께서 ‘살아보니까, 알겠더라’ 라고 이야기하는 것 처럼, 살아오면서 많은것을 배우며, 현상을 볼 수 있게 된 뒤에야 할 수 있는 말이다.

  이런 현상을 바라본 자에게는 자신의 삶의 기준이 명확해진다. 많은 청년들이 자신이 무엇을 해야할지, 어디로 나아가야할지 모른다고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그들이 문제를 풀지 않았는가? 그들이 노력하지 않았는가? 그렇지 않다. 대한민국의 청소년들과 청년들은 그 어떤 나라의 청년들보다 경쟁력있게 ‘문제를 풀어’왔다. 그러나 명백히 이야기할 수 있는것은 많은 대한민국의 청소년들과 청년들에게 진정한 ‘공부’를 시켜왔던 교사와 부모들은 아쉽게도 많지 않다. 그래서 그러한 공부를 시켜왔던 그들의 사연은 책으로 나오고, 많은 이들의 집안 책장 한켠을 차지한다.

이말은 동시에 현상을 볼 수 있기 이전의 상태에 있는 사람에게, 현상을 보면서 사는것이 가치 있는 삶이라고 아무리 말해봐야 헛수고라는 말과 동일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현상을 볼 수 있게 된 사람에게는, 현상을 보면서 사는 것이 가치 있는 삶이라는 말은 할 필요가 없습니다. 말하기 전에도 그 사람은 이미 그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은 이미, 현상을 본다는 것은 개인의 사회적 지위나 집단의 물질적 번영과는 아무 관계없이, 아니 그 이상으로, 사회적 지위나 물질적 번영을 얻는 데에 역행하는 한이 있더라도 인간으로서 추구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한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교육의 목적과 난점, 제2장, 36p)




우리 아이들이 보이지 않는것을 볼 수 있는, 세계를 온전하게 파악하는 그날이 온다면.



그래서 공부가 필요하다. 다양한 고스펙을 쌓아 사회적 위신과 재물을 쌓아 너희들이 편안한 삶을 보내기 위해서가 아닌, 세계를 바라보는 안목과, 보이지 않았던것이 보이고 이 아름다운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 능력들을 키우기 위해서 공부가 필요한 것이다. 그러니 학생들이여, 질문해라! “이거 어디다가 써먹을 수 있어요?” 라고. 끊임없이 의구심을 가져라.  그래서 부모님을 당황시켜라. 당신의 부모님들이 고민하게 하고, 함께 이러한 안목을 길러나갈 수 있는 능력들을 키워나가라. 그리고 부모들이여, 교사들이여, 이러한 학생들이 이런 질문을 했을때에, 어디가가 써먹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 대답해주려고 하지 말고, 진정한 현상을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을 키울 수 있도록 지도하자.

  공부라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눈에 보이는 것보다 더 진짜다’ 라는 것을 믿도록 하기 위한 것이며, 공부를 하는 면서 산다는 것은 이 믿음을 가지고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학생들에게 이해시키고 납득시키는것은 분명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삶을 살아가다보면 분명 눈에 보이는것보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것이 진짜다 라는것이 쉽게 납득이 된다. 그러나 그것을 깨달았을때는 물론 나이도 들어있다. 그래서 교육이라는것은 쉽지 않으며 전쟁과 같은 것이다. 이러한 아이들에게, 학생들에게 보이지 않는것에 대한 믿음을 심어주는 것. 이것을 알고, 능력을 갖추었을때에 너네들이 볼 수 있는 세계에 대한 무한한 믿음을 주는 것. 그것이 교사와 부모의 역할이며 가장 먼저 추구해야하며 교사와 부모가 먼저 이러한 경험을 한다면 더욱 좋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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