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의 목적과 난점, 이홍우 제 7장 삶의 자세와 교육 독서 가이드 질문
1. 슈프랑거의 ‘가치의 분류‘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슈프랑거의 ‘가치의 분류’는 총 6가지의 가치 분류로 나뉘어지는데, 그 분류는 이론적 가치, 경제적 가치, 심미적 가치, 사회적 가치, 정치적 가치, 종교적 가치로 나뉘어진다. 이러한 가치들은 다른말로 치환하면 ‘삶의 태도‘, 자신의 삶을 규제해 나가는 주된 원리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은 무엇을 중점에 두느냐에 따라서 자신의 삶을 규제해나간다. 누군가는 경제적 가치를 자신의 주된 원리로 두어 살아가기도 하고, 누군가는 사회적 가치를 주된 가치로 삼기도 한다.
슈프랑거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인간은 이러한 가치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이것을 교육과 연관시키면, 교육받은 사람으로서 인간의 자아실현을 위해 6가지중 어떤것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는 뜻이 된다. 그러나 여기서 첫번째 오해할 수 있는 점이 발생한다. 바로, 인간의 자아실현이라는 말 자체가 명확하지 않은것과 이러한 6가지 가치가 직업으로 치환되어 사람들에게 인식되어져 ‘직업적 선택이 자유롭다’라는 오해를 일으킨다는 것이다.
두번째는, 6가지 가치중 이론적 가치, 이론적 활동에 종사하는것이 과연 또 하나의 ‘삶의 자세’의 범주로 평가받는것이 옳으냐에 대한 문제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론적 가치와 실제적 가치에 대해서 양자의 차이보다는 그 관련을 더욱 중요시하며 ‘좋은 이론보다 더 실제적인 것은 없다‘라는 말이 있을정도로 이론적 가치는 실제적 활동에 기반이 되는 것으로 생각하는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러나, 이론적 가치가 다른 다섯 가지 가치와 동렬로 분류되어 있는것은 재고해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이론적 가치는 나머지 다섯가지 가치를 합친 것과 대비되는 가치정도의 위치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론적 가치는 그 자체로 고유한 가치로서, 이론적 가치를 추구하며 사는 사람들은 특이한 삶의 자세를 나타내고 있기 때문에, 실제적 가치와 동등하게 취급되어 다른 실제적 가치를 이루는데에 도움이 되는 기반정도로 생각하는것이 아닌 독자적인 이론적 가치만의 분야가 있음을 인지해야만 합니다.
즉, 정리하자면, 슈프랑거의 가치의 분류는 이러한 문제점이 있습니다.
——————
(1). 인간의 자아실현을 위해 6가지중 어느것을 자유럽게 선택할 수 있다는 것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인간의 자아실현이라는 추상적이고 명확하지 않은 개념을 가지고 교육의 어려움을 가지고 왔고, 이러한 오해가 6가지의 직업종류의 선택으로 변질되게 한것이다.
(2). 이론적 가치는 5가지 실제적 가치와 동류로 취급되서는 안되며, 5가지 실제적 가치의 활동들의 기반이나 기초, 보조의 역할도 아니다. 현실과 논리는 따로 존재하여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현실을 어떤 논리로 파악하는가에 달린것임으로 오히려 이론적 가치는 실제적 가치와 동류로 취급되서는 안되며, 강하게 말한다면 상위분류에 존재한다고 보아야 한다.
——————
2. 교육목적을 나타내는 용어로서의 자아실현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현재 일반적으로 교육계에 퍼져있는 자아실현은 ‘사회 각계각층의 유위한 인재를 양성, 그 위치에 이르는것’ 정도로 정의되어 있는것이 사실입니다. 많은 친구들이 자아실현이라는것을 오직 ‘직업적 위치‘를 차지하는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육의 목적을 나타내는 용어로서의 자아실현은 다릅니다. 교육내에서의 진정한 ‘자아실현‘은 이론적 삶의 자세를 가지고 사는 사람으로서, ‘스스로 탐구의 문제를 계속 일으켜야 하는’ 사람으로 자라나가는것을 말합니다. 다시말해, 교육에서의 자아실현은 ‘탐구를 종결시키는 것에서 답을 찾는것이 아닌, 끊임없이 탐구를 영속시켜 나가는데서 답을 찾는‘ 상태가 되었을때에 자아가 실현된다고 보는것입니다.
조금 더 이야기해본다면, 교육의 자아실현은 학생이 ‘교사‘가 되었을때에 이루어지는것입니다. 이 결론에 많은 사람들이 의문점을 가지리라고 생각이 듭니다. 앞에서 직업적 위치를 차지하는 자아실현의 정의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해놓고, 결국 ‘교사’가 되어야 한다? 라고 주장하는것은 어불성설이기 떄문이지요. 맞습니다. 아주 합당한 비판입니다. 하지만, 이때의 ‘교사‘라는것은 어떠한 직업적 위치를 뜻하는것이 아닙니다. 삶에서는 참 많은 ‘교사’의 상태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탐구를 영속시켜 나가는데서 답을 찾는‘ 상태로 살아가는 사람들. 그들이 교사입니다.
본 책에서는 실제 ‘교사‘만이 이러한 일을 할 수 있기에 실제 직업적 ‘교사’를 뜻하는것이지만, 제 개인적인 생각과는 조금 다릅니다. 저는 삶의 모든 부분에서 ‘교사’가 존재한다고 봅니다. 이론적 개념을 가지고, 각 분야에서 보이지 않은 것을 끊임없이 탐구하며 인지하는 존재들. 그들이 ‘교사‘입니다. 그들은 필히 누군가를 가르치고, 교육시킬 수 밖에 없는 위치에 이르게 됩니다. 다만, 그들이 ‘실제적 삶’을 추구하면서, ‘이론적 삶‘을 기반으로 이론적 개념을 이용하고 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반대입니다. 그들은 단지 ‘이론적 삶’을 살고, 추구하다보니 남들이 보지 못하는것들을 보았을뿐이고, 그것이 시대의 한 획을 긋는 사건들로 나타날 뿐입니다. 처음부터 실제적 결과를 내기 위해서 그것을 시작한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그래서 모든 분야에서 ‘교사‘가 필요한 것이고, ‘이론적 탐구를 영속적으로 하는 사람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3. ‘실제적 삶은 이론적 삶의 타락된 형태이다’라는 말은 옳은가?
본문에서는 실제적 삶이 이론적 삶의 타락된 형태임을 강조합니다. 이론적 삶이 상위의 분류에 속하고, 이러한 이론적 삶을 실현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삶을 ‘실제적인 삶‘으로 규정합니다. 이렇게 보면 매우 거부감들고, 기분 나쁜 워딩일 수 있지만, 그 내용을 본다면 쉽게 부정할 수 있는 내용은 아닙니다.
먼저, ‘실제적 삶‘을 사는 사람들은 한 차원 낮은 단계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수준이 낮은것도 아니구요. 그들의 삶은 오히려 사회적으로 이타적 성격을 더 가지고 있다고 보면 되고, 사회적 위신과 명예도 그들에게 주어지는 경우가 더욱 많습니다. 그들은 실제적인 문제를 다루기 때문에,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삶에서는 더욱 나은 삶을 사는것이 일반적입니다. 물론, 그마저도 게으른 사람들은 그 이하의 삶을 살아가는것은 통용되는 상식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론적 사태에서는 이론적 탐구 그 자체가 관심의 대상이 되기 때문에, 비록 그것에 끝이 없다고 하더라도 하등의 지장의 초래되지 않는 것은 물론, 오히려 이론적 탐구는 성격상 끝이 없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실제적 욕구의 그 이상의 순수한 무엇인가를 찾는 과정입니다. 이러한 순수한 무엇인가를 찾는것을 그만두는것, 마치 산에서 수행을 하다 경제적 위기에 도저히 버틸 수 없어 내려가는 제자를 두고 스승이 ‘세속에 물들었구나‘와 같이 이야기하는것. 정말 극도의 순수한 다른세계의 것을 찾는것이기 때문에 ‘실제적 삶은 이론적 삶의 타락된 형태이다’라는 말로도 가능한 것이겠지요.
동시에, ‘이론적 삶은 가장 저주받은 삶이다’라는 말이 가질 수 있는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질문도 한번 고찰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질문에 연장선상에 있기 때문이지요. 이론적 삶은 매우 고된 삶임에 분명합니다. 이론적 탐구의 대부분의 과정은 고혈압을 동반합니다. 결코 쉽지 않은 일임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사람들의 일에 대부분 관심이 없다는것도 매우 외로운 과정입니다. 시대를 풍미했던 이론적 삶을 살았던 사람들은 대부분 당대에는 옳게 평가받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지독하게 외로운 과정을 거쳤습니다. 홀로 자신이 보고 있는 그 보이지 않는것을 온전하게 수행하기 위해 자신의 한몸을 바쳤던 그들. 현생을 살아가던 그들에게 이론적 삶은 그들 자신에게는 가장 기쁜 삶이었겠지만, 사회적인 시선으로는 가장 저주받은 삶이었겠지요.
4. 직업에 귀천이 있다고 생각할 때 귀한 직업과 천한 직업을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맹자 등문공(상)의 노심과 노력은 여기에 어떤 빛을 던져주는가?
언제까지나 ‘만약에’라는 가정하에 시작하는것이겠지만, 책에 기반하여 직업에 귀천이 있다고 생각할 때에, 귀한 직업과 천한 직업을 구분하는 기준은 ‘이론적 삶‘을 살아낼 수 있는 직업과, ‘실제적 삶’을 살아가는 직업이라고 나눌 수 있습니다. 맹자 등문공(상)에서는 이것을 정신노동을 하는자와 육체노동을 하는자로 구분하는데, 이때의 정신과 육체는 이론적 가치를 바라볼 수 있는 자이냐, 그렇지 않냐로 치환하여 해석하면 알맞습니다.
—————
然則治天下獨可耕且爲與? 有大人之事, 有小人之事. 且一人之身, 而百工之所爲備. 如必自爲而後用之, 是率天下而路也. 故曰: 或勞心, 或勞力; 勞心者治人, 勞力者治於人; 治於人者食人, 治人者食於人: 天下之通義也.
그러나 천하를 디스리는 것이 홀로 밭 갈고 또 할 수 있단 말인가? 대인이 하는 일이 있고 소인(백성)이 하는 일이 있다. 한 사람의 몸에는 백공의 하는 바(백가지 기능)가 있으니, 만약 스스로 만들어 쓴다면 이것은 모든 사람을 거느리고 번잡한 길로 나가는 것이다(번잡하게 한다). 그러므로 어떤이들은 정신노동을 하고 어떤이들은 육체노동을 하며, 정신노동을 하는 이는 다른 사람을 다스리고 육체노동을 하는 사람은 다스림을 받는다. 다스림을 받는 자는 남을 먹게하여주며, 남을 다스리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얻어 먹는 것이 천하의 공통된 의리이다.
—————
즉, 다스리는자, 정신노동을 하는자가 귀한 직업이라고 ‘굳이‘ 분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무덤에 있는 마르크스가 이말을 듣는다면 관짝을 박차고 일어나 맹자의 멱살을 잡겠지만, 아쉽게도 맹자가 먼저 죽어버렸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웃고넘어갈 수 있을 정도로 실제의 상황은 호락호락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골똘히 잘 생각해본다면 세상을 지배하는 자들은 ‘가르치는 자’임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남들이 보지 못하는것을 보고, 시대를 이끄는 자임에 분명합니다. 직업의 귀천은 사라진 시대이기에, 각자의 노동의 가치를 온전하게 존재하고 필수적인것이지만, 무엇을 바라보고 사느냐에 따라, 어떤 사람을 길러내느냐의 열매의 차이가 나오게 됩니다. 보이지 않는, 이론적 삶을 사는자들은 자신의 생각을 이어받을 수 있는 사람을 길러내는 방향으로 나아가지만, 실제 눈앞에 존재하는 유물적 가치를 따르는 자들은 자신이 썩어 문드러지는 시체가 되었을때 이 세상에 남는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굳이‘ 직업의 귀천을 나누어 설명하는것이 불편할 수는 있지만, 역으로 우리가 추구해야할 가치에 대해서 명확하게 보여줄 수 있는 좋은 사례가 아닐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