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디디 Aug 10. 2018

당신은 누구와 투쟁하고 있는가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읽고

  삶은 투쟁(鬪爭)이다. 누군가는 대기업을 대상으로, 누군가는 불의한 정부를 대상으로 자신의 삶을 불살라가며 투쟁한다. 이런 과격하고 폭력적인 투쟁은 우리와는 한없이 거리감이 느껴진다. 투쟁이란 단어는 어느샌가 양 극단에서 살아가는 한 무리의 전유물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우리도 투쟁하고 있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끊임없이 투쟁하며, 미래의 나를 만들어 나가고 있다. 거창할 것 없이 당장 우리는 우리의 핸드폰 알람과 매일 아침마다 투쟁하고 있지 않는가. 그렇다. 투쟁(鬪爭)은 과격한 극단에 존재하는 무리들만 하는 폭력적인 행동이 아니라, 매일 아침 핸드폰을 끄기 위해 사투하는 우리의 삶이다. 그러니 삶은 투쟁의 연속이다.            

담배를 이렇게 맛깔나게 피는 작가는 카뮈 다음으로 처음이다. 헤세는 그 누구보다 인간의 투쟁, 즉 삶에 관해 관심이 많았던 자였다.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보려고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데미안, 7)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의 이름은 압락사스."


투쟁의 시작, 세계에 태어나는것은 결코 쉽지 않다


  헤세가 작품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가장 큰 줄기중 하나는 "편견을 깨기는 절대 쉽지 않다" 라는 점이다. 많은 사람들이 데미안에서 개인의 발견과, 개인 자아의 긍정, 자신의 삶을 찾아나가는 과정을 집중 조명하고 있다면, 이러한 스포트라이트(Spotlight)의 무대 이면(裏面)에 존재하는 치열한 투쟁에 대해서는 조명하지 않는다. 그것을 조명하기 시작하면 개인 자아의 긍정이라는 것은, 자신의 삶을 찾아나가는 과정에 대해서 외면할 자가 많아지기 때문일까. 우리는 헤세가 왜 굳이 데미안에서 '투쟁'이라는 단어를 선택했는지에 대한 숙고(熟考)함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서문에서 이야기 했듯, 투쟁이라는 단어는 매우 격한 어감을 가지고 있는 단어다. 한자어 부터 다툴 쟁(爭)이 들어가 있는 것을 보면 이것이 결코 평화적으로 해결되지는 않음을 암시한다. 세계에 태어나기 위하여 투쟁하는 과정, 그렇다면 그 다툼의 대상은 과연 누구란 말인가. 사회구조? 타인(他人)? 아쉽게도 헤세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헤세가 말하는 투쟁의 대상은 바로 '나'이다. 「무진기행」의 무진의 안개에 갇혀있는 사람들의 인생처럼, 우리는 우리 자신의 편견에 갇혀있다. 혹여나 나의 편견을 건드리는 그 무언가가 있다면, 우리의 마음, 감정은 딱딱하게 굳기 시작한다. 이미 딱딱해진 마음은 우리가 항상 자랑하던 우리의 이성을 마비시키기 시작한다. 그의 지적이 충분히 옳음에도 불구하고 강렬히 타인의 지적에 투쟁(鬪爭)한다. 그렇게 쌓아 올려 공성전의 수비에 성공한 나 자신은 어느순간 고립되어 있는 요새가 되어버린다. 헤세는 이러한 자신만의 요새를 함락해야 한다고 말하는것이다. 남이 깨기도 어려운 요새를 나 자신이 직접 허문다는것은 정말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 요새를 허물어야지 나의 고립된 요새에 살고 있는 주민들에게 올바른 삶이라는 식량을 제공할 수 있는것이다. 

  작중 싱클레어가 변화되어 되는 과정의 가장 시작점은 먼저 자신이 가지고 있던 세계에 대한 투쟁이었다. 자신이 알아왔던, 자신만의 그 세계, 자신만의 그 편견이라는 알을 자신이 직접 깨어야지만 세계에 태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타인이 그 알을 깨는것을 외부에서 도와줄 수는 있지만, 주된 투쟁은 자신이 끊임없이 그 알 속에서 몸부림치고 악착같은 행위로 나 자신과 다투어 깨뜨려야 하는 것이다. 그때부터 삶은 역동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아, 지금은 알고 있다. 자기 자신에게로 인도하는 길을 가는 것보다 더 인간에게 거슬리는 것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음을! (데미안, 62)


자신만의 요새를 허물고나면, 그때부터는 도망가고 싶은 현실을 마주하게 된다.

도망가고 싶은 현실

「연대란」데미안이 말했다.
「멋진 일이지. 그러나 지금 도처에 만발해 있는 것은 전혀 연대가 아니야. 진정한 연대는, 개개인들이 서로를 앎으로써 새롭게 생성될 것이고, 한동안 세계의 모습을 바꾸어놓을 거야. 지금 연대라며 저기 저러고 있는 것은 다만 패거리짓기일 뿐이야. 사람들 이 서로에게로 도피하고 있어. 서로가 두렵기 떄문이야. 신사들은 신사들끼리, 노동자는 노동자들끼리, 학자는 학자들끼리! 그런데 그들은 왜 불안한 걸까? 자기 자신과하나가 되지 못하기 떄문에 불안한거야. 그들은 한번도 자신을 안 적이 없기 때문에 불안한 거야.」 (데미안, 182)


 그렇게 투쟁의 삶을 살아가는 당신은 당신의 허물어져가는 성벽앞에서 급격하게 두려워질것이다. '나의 모든것이 드러나면 어떻게 하지?', '알리고 싶지 않은 나의 모습이 알려지면 어떻게 하지?'와 같은 고민들에 빠지게 된다. 성벽을 허물고 나면, 드디어 마주하고 싶지 않은 현실들과 맞닿게 되는 것이다. 한 번도 나 자신을 마주해보지 못했기 때문에, 나 자신을 알려고 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허물어진 성벽으로 밀려들어오는 저 현실이 버겁게 느껴지고, 그 현실이 나를 죽일까 잔인하게 느껴지게 되는 것이다. 사람이란 존재는 참으로 신기한것이, 자신과 상황이 비슷한 사람을 알아보는 눈이 있어 자신의 두려움과 똑같은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끼리 뭉쳐 저 성벽에서 밀려들어오는 현실을 막아보려고 한다. 헤세는「데미안」을 통하여 정확하게 이 부분을 꿰뚫고 있으며 그 한계를 지적하고 있다. 


이봐 싱클레어, 그 모든 것에서는 진정한 명랑함이 나올 수 없단다. 저렇게 겁을 먹고 서로 뭉친 사람들은 두려움과 악의로 가득찼어. 아무도 남들을 신뢰하지 않아. 그들은 이제는 더 이상 이상(理想)이 못 되는 이상들에 매달려 있어. 그러면서 새로운 이상을 내세우는 사람에게는 돌을 던지지. (데미안, 183)


     '연대'라는것에 들어가면 우리는 일시적인 안도감과 위로를 느끼고는 한다. 나와 비슷한 고민들, 비슷 생각들을 하고 있는 공동체에서 '나 혼자 이 성벽이 뚫려있는것이 아니구나'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끊임없이 무언가에 소속되고자 하는 이유도 바로 이것에 있을것이다. 하지만 내가 나 자신에 대하여 정확하게 알지 못하고 방향성을 상실한 채 '연대'속에 있다면 곧 열등감의 아수라속에 빠져들게 된다. 이러한 열등감은 곧 서로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진다. 처음에 받았던 '위로감'은 곧 '질투'로 바뀐다. 그들은 '진정한 하나됨, 진정한 명랑함'을 위해 뭉친것이 아니라, 성벽에서 뚫고 들어오는 현실에 대한 도피를 막아보고자, 다른 사람을 방패로 세우기 위해 연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연대는 당장 의 자신에 대한 위협이 가해지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듯 자신의 분노에 대한 희생양을 찾기 시작한다. 누구 하나가 잘 되면 그 연대는 파괴되므로 곧 이 연대의 목표는 모두를 '하향 평준화'시키는 것으로 변모한다. 이를 위해 이들은 외부의 현실에 대응하며 투쟁하는것이 아니라, 내부의 적을 두고 서로를 적으로 간주하며 투쟁하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나'자신에 대한 탐구가 온전하게 이루어지지 않으면, 내면의 온전한 탐구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결코 외면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이루어질 수 없다. 쉽게 말해 내 눈에 노란색 셀로판지가 덮혀진 안경을 끼고 사회를 바라보는데, 사회가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색깔을 가지고 있는 사회라고 우리는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색안경을 벗고, 내 눈을 먼저 걸림돌 없이 바르게 뜨고 있어야 작게는 당신과 나의 관계도, 크게는 우리 사회도 제대로 볼 수 있다는것이다. 

당신은 지금, 무엇에 대하여 투쟁하는가?


투쟁의 대상을 명확히 해야한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 이라는 말이 있다. 나를 알고, 적을 알면 패배할 수 없다는 말이다. 이때 핵심은 적을 아는 것보다, '나'자신에 대한 앎이 더욱 중요하다. 내가 잘 다루는 무기는 칼인지, 활인지, 혹은 주먹인지 알고서 전장에 나가야 한다. 주무기가 칼인데 활을 들고나가면 전장에서는 애물단지일 뿐이다.  헤세가 말하는 실존은 바로 '나 자신을 올바로 깨닫는 것'이다. 작중 주인공 싱클레어가 데미안과 피스토리우스를 통해 본인을 올바로 깨달아 가는것을 통해 헤세는 현대인을 위한 자신의 실존에 대한 명확한 대답을 내놓고 있다.  

  수 많은 정보들이 쏟아지는 21세기 현대사회에서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지키는 것 조차 어려워지고 있다. 내일이면 내가 알고 있는 지식들의 팩트가 틀려지는 사회에 우리는 살고 있다. 이러한 정보는 나 자신에 대해 깊이 탐구할 시간을 주지 않는다. 오로지 맞고 틀린지에 대한 받아들임만 있을 뿐이다. 노란색 셀로판지의 안경에서 빨간색 셀로판지로의 변경일 뿐인것이다. 우리는 투쟁의 대상을 명확히 해야한다. 노란색으로 보이는 사회가 잘못되었다고 하기 이전에, 허물어진 성벽에서 밀려들어오는 현실 그대로 받아들일수 있는 깨끗한 시야가 필요한 것이다. 노란색의 사회보다, 우리는 우리의 눈에 대한, 우리의 마음에 대한 투쟁이 먼저 필요하다. 몇십년동안 노란색의 사회로 살아온 당신에게 그 안경을 벗으라고 이야기하는것은 분명 어려운 일이다. 혹자는 안경을 끼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처음볼지도 모르겠다.  그럴때 우리는 이 말을 기억하자, 순간의 두려움을 느낄때, 나의 성벽을 허물때, 왜곡된 안경을 벗을때, 이 말을 기억하고 외치자. 이 길이 어렵지 만은 않았노라고, 우리의 투쟁의 역사는 아름다웠노라고. '나'를 허물고, 벗어던지는 순간, 더 아름다운 결과를 맞이했노라고.



「그건 늘 어려워요, 태어나는 것은요. 아시죠,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애를 쓰지요. 
돌이켜 생각해 보세요,  그길이 그렇게 어렵기만 했나요? 아름답지는 않았나요?
혹시 더 아름답고 더 쉬운 길을 알았던가요?」(데미안, 191)                          






매거진의 이전글 괴로움의 역설(逆說), 행복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