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맥베스를 읽고
우리는 눈을 뜨고도 수없이 넘어진다. 분명 그 자리에 없었던 돌들이 넘어지고 나서야 보이기 시작하고, 아리기 시작하는 무릎을 붙잡고 난 그때서야 보지 못한 나의 눈을 탓한다. 우리는 가야 할 곳도, 봐야 할 것도 보지 못하는 두 눈을 가지고 내일의 작은 희망을 조금이라도 더 크게, 더 넓게 보기 위해 잠시 반짝이는 것에 시선을 두어 살아간다. 처음 보았을때는, 분명 보기 좋은것이었는데. 그렇게 수 많은 고통을 겪으며 그 빛에 다가와보니, 그 세월동안 바래진 그 빛에 우리는 허탈감과 허무감을 느낄 뿐이다. 「맥베스」의 주인공, 맥베스의 삶도 그러하였다. 잠시 반짝이는 그 무언가를 위해, 그 삶을 바쳤던 그. 바래진 그 빛은 맥베스의 죽음만을 비출뿐이었다. 우리의 삶과 어딘가 닮아있는 그의 모습을 우리는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마녀 3: 맥베스를 환영하라! 왕이 되실 분이다.
(중략)
맥베스: (방백) 글래미스. 코도 영주.
그 다음엔 대권이다.
(로스와 앵거스에게) 수고하셨습
니다. ―
(뱅코에게) 후손들이 왕 되기를 바라지 않으시오?
코도를 내게 준 것들이 그 못잖은 약속을 그들에게 했지 않소?
뱅코: 그 말을 다 믿다간
장군이 코도 영주 외에도 왕관을
탐할지도 모르겠소. 하지만 이상하죠,
어둠의 수족들은 우리를 해치려고
가끔씩 우리에게 진실을 말하고
소소한 정직으로 우리를 유인하여
중대한 결말에서 배반한단 말입니다. ―
(맥베스, 1막 3장 50 - 127행 중 일부)
맥베스는 능력이 있었다. 힘도 있었고, 명예도 있었다. 글래미스의 영주로서 그의 입지는 탄탄했다. 그에게 모자란 것은 없어보였다. 하지만 마녀의 한 마디는 그의 인생의 충만했던 것을 부족하게 만들었고, 무언가 결여된 삶을 사는것 처럼 만들기 충분했다. 그는 자신의 결여된 삶에 대한 동의를 구하기 위해 충직한 부관인 뱅코에게 동조해 달라는 말투로 간절히 묻는다. 하지만 뱅코는 냉철하다. 마녀들의 말들에 서려있는 함정을 그는 이미 파악하고 있다. 맥베스와 뱅코, 그들은 같은 전쟁에서 살아온 승리자며, 삶을 나눈 동지다. 그런데 왜 그들은 같은 상황에서 다른 것을 보는것일까.
야심(野心) 이라는 단어가 있다. 맥베스에게는 이 야심이 마녀의 말로 촉발되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맥베스가 순수한 인간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마녀의 말로 촉발이 되었을 뿐, 그의 마음에는 이미 야심이 가득했을것이다. 불을 피울때 불이 붙는것은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갑자기 피어나는 것이 아니라, 껌딱지 같은 작은 종이로 부터 그 불이 번져나가기 시작하듯, 맥베스의 마음 속에서 보이지 않게 존재한 그 야심이 마녀의 말로 촉발 되었을 뿐이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아는 '야심(野心)'은 '무엇을 이루어 보겠다고 마음속에 품고 있는 욕망이나 소망.' 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드라마 재벌가의 사위로 들어온 한 인물의 야심. 이정도가 우리가 일반적으로 접하는 야심의 뜻이다. 하지만 야심의 1번 뜻, 즉 원래의 의미라고 칭할 수 있는 뜻은 '순하게 길이 들지 않고 걸핏하면 해치려는 마음.' 인 것은 의외다.
이러한 마음이 맥베스의 가슴에 불이 붙혀진 이후로, 맥베스의 태도는 180˚변화한다. 그는 '야심(野心)'을 품은 이후로 걸핏하면 해치려고 하는 '야인(野人)'이 되어버렸다. 충직한 마음으로 왕을 섬기고 예우하던 그의 마음, 충직한 신하와 끈끈한 유대로 글래미스를 통치했던 그의 이성적인 통찰력은 권력에 대한 욕망으로 가득찬 살기와 자신의 권력에 매몰되어 대상없는 두려움에 충직한 신하대신 자객과 어떻게 그 신하를 효과적으로 죽일 수 있는지에 대한 논의로 가득찬다. 그의 눈에는 신하의 충직한 직언도, 판단도 이미 사라졌다. 인간의 욕망은 이성을 마비시켜 파멸로 이끈다는 것은 셰익스피어는 맥베스의 모습을 통해 처절히 보여주고 있다.
또한 한가지 더 이 파멸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것은, 결코 개인의 욕망으로 인한 파멸은 혼자의 괴로움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개인의 파멸은 가정의 파멸을 이끌고, 그가 속해있는 사회를 파멸시킬 수 밖에 없다. 맥베스의 아내, 신하, 그리고 그의 권력까지 모두 가라앉는 바다속으로 그 결말은 참담히 마무리 된다.
맥베스: 꺼져라, 짧은 촛불!
인생이란 그림자가 걷는 것, 배우처럼
무대에서 한동안 활개치고 안달하다
사라져버리는 것, 백치가 지껄이는
이야기와 같은 건데 소음, 광기 가득하나
의미는 전혀 없다.
(맥베스, 5막 5장 23 - 28행)
우리는 맥베스와 같은 어리석음을 반복하며 살고 있다. 세상에서의 성공과 권력을 얻기 위하여 오늘도 부정과 부패속에서 이를 묵인하며 살아오고 있다. 순간 '이건 아니지 않나?' 라는 마음속에 드는 생각들이 문득 지나가지만 이는 무시하려 애쓴다. '나에게 피해만 안끼치면 돼 …' 라는 문장은 우리의 마음속에 드는 생각들을 짓밟아 버린다. 그렇게 수많은 관문들을 버티고 짓밟혀 올라간 자리에 도착했을때 구원이 있을것만 같았던 나의 인생은 고작 이 자리를 위해 수 많은 사람들을 희생하고 부정을 묵인했던가 라는 회의와 함께 허무함과 무의미함으로 가득하다. 야심은 우리에게 왜곡된 생각을 또 흘린다. 이 자리가 원래의 목표가 아니었다고, 더 높은곳으로 올라가기 위해 힘써야만 한다고, 이제는 높은 자리에서 자신이 묵인해 왔던 일들을 감독하며 더 큰 부정과 묵인을 통해 사다리를 밟고자 애쓴다.
물질이 가득하면, 분명 행복할 줄 알았던 나의 인생인데. 맥베스도 그랬을 것이다. 덩컨 왕을 죽이고 올라간 그 자리에 내가 앉아있으면, 모든 것이 행복할 줄만 알았을 것이다. 모두가 자신을 위대하고 존귀하게 여길 것이고, 자신이 하는 한 마디에 모두가 벌벌길 생각을 하니 자다가도 흐뭇하게 웃음 지었을 것이다. 그러나 왕을 죽이고 올라간 그 자리는 자신에게 파멸만을 선사했다. 사람을 잃었고, 결국은 자신이 강탈했던 권력마저 칼끝에 무너지면서 그는 모든것을 잃고 '삶은 의미가 없다!' 외쳤다.
과연 그가 말한 것 처럼 삶은 의미가 없는 것일까. 맥베스, 그는 자신의 마음속 문득 떠오른 생각과 마주한 기회가 분명 있었다. 하지만 그는 처절하게 그 마음을 지키려고 하지 않았다. 끊임없이 유혹해오는 자신의 마음에 맥베스는 자신의 몸을 맡겼다. 그는 더욱 의미있는 삶을 살아가고자 노력할 수 있었지만 결코 애쓰지 않았다. 단지 고민만 했을 뿐이다. 그의 머릿속은 분명 이것이 옳지 못한일임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를 감싼 야심은 그의 양심을 잡아삼키기에 충분한 불같은 감정이었다. 그는 이러한 생각에 맞서 투쟁하지 않았다. 그의 부인이 하와가 선악과를 먹으라고 꾀는것 처럼 왕을 죽이라고 자신의 자존심과 용기를 들먹였을때, 그는 더이상 고민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악의 구렁텅이로 빠져들어가기 시작했다.
우리의 삶도 동일하다. 우리도 야심을 품을때, 주변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무조건 성공한다' 라는 문장은 주변에서 이야기하는 모든 이야기를 차단한다. 훗날 누군가가 그때의 상황을 물어보면 후회 하는 경험은 모두 존재할 것이다. 우리 모두가 자신의 욕심임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의 욕망에 대해서 투쟁하지 않았다. 목적 없는 성공에 우리는 우리의 많은 것을 희생했다. 친구, 가족, 시간, 이 모든것들을 우리는 차단함으로써 그렇게 우리 스스로 우리는 의미 없는 삶을 만들어 나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의 야심에 대한 이성적인 투쟁이 필요하다.
맥베스 부인: 소득 없이 기진맥진.
만족 없는 욕심을 채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죽이고 불안한 기쁨을 느끼느니
죽임을 당하는 게 더 편한 법이다.
(맥베스, 3막 2장 4 -7 행)
맥베스: 아 여보, 내 마음은 전갈로 가득 찼소!
알다시피 뱅코와 플리언스가 살아 있소.
(맥베스, 3막 3장 36 -37행)
이 문장 속에는 참 많은 의미들이 담겨있다. 자신의 범죄와 처참한 그 상황이 너무 괴로운 그의 마음이 '전갈들' 로 형상화 되어 나타나 있지만, 이 마음을 아는 자라면 전갈들로는 부족한, 정말 미쳐버릴 것만 같은 괴로움임을 알 수 있다. 일평생을 전갈로 가득찬 인생으로 살아 간다면 우리의 삶은 과연 어떨까. 육체적인 괴로움은 순간적으로 견딜 수 있지만, 정신적인 괴로움은 우리의 삶을 갉아먹으며 맥베스의 부인처럼 '죽는 것이 차라리 낫다' 라는 말밖에 할 수 없게 만든다. 나의 삶이 차라리 죽는것이 낫다고 이야기 하는것, 얼마나 비참하고 참담한 일인가.
우리는 우리의 아름다운 인생이 순간의 욕망으로 인해 전갈로 가득한 삶을 살아가지 않기위해 투쟁해야 한다. 나의 왜곡된 마음과 투쟁해야 한다. 순간적으로 나의 마음속에 드는 왜곡되어 투영되는 그 존재들을 우리는 깎고, 또 깎아 우리의 선한 양심이 우리의 삶을 의미있게 인도하도록 해야만 한다. 어디로 가는지도, 무엇을 바라는지도 모르는 채 성공이 그 앞에 있다는 것을 듣고 맹목적으로 달려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눈과 귀로 보아야 할 것을 보고, 들어야 할 것을 들으며, 올바르게 판단하는 것. 그것이 인간만이 우리가 궁극적으로 추구해야할 유일한 '권력'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