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를 읽고
'넌 너무 열심히 살아. 꼭 그렇게 까지 살아야해?'
최근 소확행, 힐링이라는 트렌드가 확산되고 있는 사회에서, 이제는 대학가에서도 무언가 열심히 하면 꼭 그렇게 까지 살아야 하는가 라는 꾸중아닌 꾸중(?)을 듣게 된다. 딱히 그들에게 열심히 살아가라고 설교를 늘어놓는것도 아닌데도 불구하고, 대학을 다니다가 가장 많이 들은 말 중 하나는 '그렇게 까지 열심히 살아야 하나'라는 말이었다. 사실 우리 모두가 고민하는 논제이자 가장 현실적인 질문이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문제는, 이러한 고민들로 인해서 삶의 목적을 잃고 우리가 방황하고 있다는 점이며, 어쩔때는 하루살이와 같은 열정으로 살아갈때도 있고, 죽어버린 하루살이의 최후처럼 열정을 불태운 다음날은 초점잃은 망아지와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것이 문제라면 문제인것이다. 언제까지나 우리 자신에게 구원이 될 '고도'를 기다리는 디디와 고고처럼 우리도 어느순간 '고도'를 기다리며, 파라다이스의 섬을 기대하며 타는 목마름으로 바다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패배하도록 창조된게 아냐"
그가 말했다.
"인간은 파멸당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패배할 수는 없어"
파멸과 패배의 차이가 대체 무엇인가. 똑같이 부정적인 것 아닌가, 파멸당할 수는 있어도 패배할 수는 없다니, 파멸당하면 그것이 패배한것 아닌가, 대체 둘의 상관관계가 어떻게 된다는 것인가-. 국어 사전에서는 파멸은 '파괴되어 없어짐', 패배는 '겨루어서 짐'으로 정의되어 있는데, 단지 노인과 바다에서 유명한 실존주의를 나타내는 문장이다! 라고 치부하고 넘어가기에는 '대체 헤밍웨이는 왜 부정적인 바운더리 안에서의 동일계의 단어를 서술했지…?' 라는 질문이 들 수 밖에 없는 심오한 문장인 것이다.
조금 깊이 생각해보면 작지만, 아주 큰 차이가 있다. 바로 '존재'의 유무다. 패배는 겨루어 짐으로서 패배의 대상은 아직 '존재'한다. 하지만 파멸은 모든것을 파괴하여 그 대상조차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향후 가능성의 문제로 발전한다. 패배한 자는 겨루어 짐으로서 다음을 기약하며 그 칼을 갈 수 있지만, 파멸한 자는 죽어 땅에 묻힐뿐, 다음이라는 것은 없다.
이것을 이해하고 나니 패배할 수 없다는 헤밍웨이의 그 의중이 나에게 날카롭게 다가왔다. (사실 정신승리에 가까운 사고라고 칭할 수 있지만) 그는 패배라는 개념자체를 생각하지 않았다. 실질적으로 그 순간 일시적으로는 패배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패배가 아니며, 다음을 기약하며 그 칼을 갈 수 있고, 충분히 새로운 도전으로 결국 마지막에는 그 패배한 목표를 이루어 낼 수 있기때문에 절대 우리는 패배하는것이 아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도전하고 나아가고 투쟁한다면, 우리는 절대 패배할 수 없다 라고 이야기하는것이다. 작중 어부의 모습에서 헤밍웨이의 메세지는 절실하게 들어난다. 84일간 고기 한마디로 잡지못한 '패배'한 어부.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85일째도 바다에 나가 이틀동안 자신의 한계까지의 투쟁을 통해 아름다운 청새치를 잡는 줄거리는 '패배'한 어부가 결국 그 과정을 통해서 마지막에는 '패배하지 않은' 어부가 되는 과정을 그린것이다.
어부의 모습은 나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 보기에 충분했다. 이미 나는 패배했다고 생각하고 파멸의 길을 걷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 무언가를 시작하겠다고 마음먹은 그 처음마음은 분명 패배의식은 아니었다. 실패해도 또 일어서고, 또 도전하는 마음이었다. 그런데 실패해도 또 다시 도전하면 된다는 그 마음이, 암울한 현실이라는 상어들을 만나고, 우리의 희망이자 꿈이었던 큰 청새치가 상어에게 갈갈이 찢기는것을 보자 갑자기 허탈해졌다. 그렇게 나는 허무함과 패배의식에 절어 살아가기 시작한것이다. 패배의식은 내가 바다로 나가는것을 막았다. '어차피 나가도 84일째나 고기를 잡지 못했는걸, 나는 이미 어부로서의 자격 실격이야', '잡아봤자 뭐해, 집으로 돌아오는길에 상어에게 다 뜯겨 뼈밖에 남지 않을거잖아? 이럴바에 잡지않고 다른일을 하는것이 더 효율적이야' 라며 나 자신에 대한 자위로 바다로 나가야 한다는 마음의 소리에 강렬히 저항했다.
모두가 한번쯤은 정말 오지 않았으면 하는 날이 있었을 것이다. 항상 여김없이 당일 전날 밤의 압박감은 정말 이루 말할수 없다. 수능 전날, 침대에 누워있는 1분이 왜이렇게 긴지 …. '평소에 공부하다가 잠깐 자는 그 잠은 정말 시간이 빨리가던데, 왜 지금은 시간이 이렇게 안가는건지. 내일이 그냥 안왔으면 좋겠다… 나에게 1주일의 시간만 더 있었으면 좋겠다 ….' 얼마나 그 다음날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하며 간절히 기도했는지 아직까지 그 경험과 두려움이 생생하다.
「노인과 바다」에서 헤밍웨이가 말하고 싶었던 점은 84일째 고기를 잡지 못하더라도, 다음날 또 먹이를 준비해서 나가는 85일째의 어부를 볼 수 있는점이 아니었을까. 비록 돌아올때는 상어에게 뜯어먹힌 뼈밖에 없는 청새치라도,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 또 다시 바다에 나가는 어부를 볼 수 있는 그 모습 말이다. 84.5일과 85일은 물리적 시간상으로는 12시간에 불과하지만, 수능 전날의 나에게는 평생 오지 않았으면 하는 시간과 같았다. 84.5일의 나는 분명 누워서 이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내일이면 85일째 고기를 잡지 못하는 날이군, 내일은 정말 고기를 잡아야하는데 내가 정말 잡을 수 있을까? 지금까지 안됐잖아. 그렇다고 내일 잡는다는 보장이 100퍼센트 있는것도 아니고, 그럼 어부일을 그만두면 난 뭐해먹고 살지 …? 내가 지금 딱히 잘하는게 있는것도 아닌데 미치겠다. 그럼 어부가 아니라 처음에 대학을 잘 선택했어야 하는데 지금이라도 새로 바꾸어 봐야하나? 옆집 꼬마는 매일 고기를 잡아오던데, 역시 고기잡는것도 재능이 있어야 하는구나 …'
그렇다. 84.5일과 85일의 간극은 12시간이 아닌, 나의 패배의식과 막연한 두려움었던 것이다. 하지만 85일째의 어부는 84.5일에서 머뭇거리며 주저하고 있는 나에게 한걸음 더 나아갈 수 있는 용기를 주는 존재였다. 그는 그날도 바다에 나가며, 똑같이 미끼를 준비하고, 고기를 잡을지 잡지 못할지에 대한 확실한 근거도 없이 자신의 힘과 열정을 그 바다에 바치는것이다. 바다에 나가지 않으면 어떻게 고기를 잡겠는가. 죽이되든 밥이되든 그 두려움을 이겨내고 오늘도 바다에 나가야지만 그 크고 아름다운 청새치를 잡을 수 있는것이다. 꿈을 그려볼 수 있는것이다. 85일이 오던, 86일이 오던간에 또 나가는 것이다. 사회를 바꾸기위한 급진적 혁명도 좋지만, 지금 내가 당장 내 앞에 놓여있는 두려움을 해결하는것, 묵묵히 나의 일을 해내는것. 그것이 헤밍웨이가 말하는 실존이다. 투쟁이다.
이러한 실존이 적용될때 이제는 더이상 열심히 사는것을 두려워 하지 않게 된다. 나는 단지 오늘의 주어진 역할에 대해서 최선을 다하는것이며, 오늘도 최선의 노력으로 실패하지 않기 위해 도전해 보는것이다. 실패하면? 또 내일 도전하면 되는것이다. 오늘부터 두려워 하지 않으리라, 그리고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서 나의 일을 묵묵히 해나가리라. 그것이 90일, 100일, 110일이 되더라도 난 나의 자리에서 나의 일을 수행하며 투쟁하리라. 그것이 나의 자아상의 긍정이며 나의 삶에 대한 예의리라. 그래서 나는 오늘도 닻을 올린다. 저 미지의 바다에 놓여있는 푸른 청새치를 찾아나가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