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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디 Jan 14. 2019

'진짜' 공동체주의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읽고

오늘도 종이 울린다. 누군가 생을 마감했다는 사실은, 썩 반가운 사실은 아니다. 과연 저 종은 누구를 위해 울린것일까.



고독사(孤獨死).



홀로 죽어가는 사람들의 비율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뉴스기사를 접할때마다 안타깝다라는 마음이 처음에는 마구 들었다가도, 이제는 그러려니 하는 모습을 간간히 나 자신에게서 보게 된다.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말로 차마 하지 못하고, 자신의 마지막 체취로라도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에 내가 이 사회에 존재했었노라, 강렬히 고(告)하는 그들의 몸뚱아리를 보며, 우리가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 하며, 대체 이 사회에 존재하는 공동체라는 의미는 무엇인가, 나는 그렇다면 그런 공동체에 대해 어떠한 태도를 취해야하는가에 대해서 물음표를 강하게 찍을 수 밖에 없다.


아쉽게도 헤밍웨이의 작품은 일반적인 소설에서 말하는 기승전결이 확실한 드라마틱한 재미는 분명 없다. 오히려 대체 이 작가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궁금할 정도로 지루하기 짝이없다고 평할 수 있을 정도다.  그러나 곧 그의 지루한 이야기 전개속에 현실적인 우리의 삶이 녹아져 있고, 이러한 질문에 대한 절묘한 대답을 하고 있는 그의 작품을 본다면 헤밍웨이의 작품이 현대까지 고전으로 남아있는 이유에 대해서 꽤나 고민해보게 되는 시간을 갖게 된다. 지루하기 짝이 없는 우리의 인생을 너무나도 자세히 묘사해보려고 애쓴 그의 흔적이 처절하게 보여서 일까.



스페인 내전중 총을 쏘고 있는 게릴라 부대원들의 모습. 그들의 총으로 쏘았던 총알은 앞으로 나아가는데, 그들의 삶들은 내일을 꿈꾸지 못하고 있었다.


현실이라는 구렁텅이 속에서 내일이라는 삶을 꿈꾸기 위해서



    21세기 우리에게는 'N포세대'라는 원하지도 않은 별명이 붙여져 있다. 출산, 취업, 결혼 등 끊임없이 절망적인 현실의 압박에 그들은 인생이라는 문제에서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들을 스스로 지워나갔고, 이렇게 지워나가는 우리들을 언론은 더욱 집중조명하며 포기를 부추기는 묘한 상황이 매일 같이 발생하고 있다. 그들에게 '내일'을 묻는다면, 과연 '내일'을 희망적으로 꿈꾸는 자들이 몇이나 있을까. 고시원 속에서, 거대한 빌딩 숲 속에서 당장의 오늘 하루하루를 버텨나가는 우리들은 과연 '인생의 목적'이라는 것을 꿈꿀 수 있을까.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의 주인공인 로버트 조던도 21세기 우리들과 마찬가지로 인생에 있어 크게 목적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다. 그의 삶은 목적을 잃은지 오래며, 내일의 삶을 기대할 수 없으니 오늘의 쾌락적이고 감각적인 삶을 추구하는 자다. 로버트 조던, 과연 그가 처음부터 이렇게 목적없고, 초점잃은 삶을 살아갔을까?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가치를 위하여 자신의 직장에 휴가를 내고 내전에 참여할 정도로 사회참여적인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곧 그가 옳다고 생각하는 가치만큼 세상이 움직여주지 않음을 경험하게 된다. 현실의 벽은 높고 높았으며, 자신의 동료를 자신이 총으로 쏘는 비극을 경험해야했으며, 자신이 생각하는 가치가 승리할것이라고 믿었던 그는 패배의 쓴맛을 맛보기도 해야했다. 게릴라 부대위로 거대한 비행기가 한대 지나가자마자 이 싸움을 회의적으로 생각하는 그의 모습은 이러한 모습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자신의 생각처럼 되지 않는 현실. 헤밍웨이가 로버트 조던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을 '술'로 설정한것은 바로 '인생이 내맘대로 안된다'라는 명제에 실망한 현대인들이 술이라는 아편에 기대는 모습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장치이다.


  그러나 그의 삶이 달라지는 전환점은 게릴라 부대에서 같이 살아가는 '마리아'를 만나고 난 뒤로부터 조금씩 달라진다. 단순히 육체적인 매력에 끌려 관계를 시작했던 그는 투쟁속에서 점차 그녀를 진정으로 사랑하게 된다. 항상 순간적인 육체적 쾌락을 만족시키는것을 더욱 중요시했던 그에게, 시대가 바뀐다고 변하는 흐름과 같은 가치들이 아닌  변하지 않는 가치인 '진정한 사랑' 이라는 가치가 심기게 된것이다.-이때의 가변적인것은 사랑의 정도를 논하는것이 아니다.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처음만났을때보다 사랑의 정도는 충분히 낮아질 수 있다. 어찌 사랑이라는 정도가 처음만났을때의 그 불타는 사랑처럼 유지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 사랑은 변하여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신뢰라는 다른 단어로 치환되어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그녀와 함께있는 순간 그는 무려 한 호흡에 '지금'이라는 단어를 45번이나 내뱉으며 지금 이순간이 자신에게 얼마나 소중한 순간이며, 삶의 욕구를 부여하는지 강조한다. 그는 이어서 '지금'에 집중했던 삶에서 처음으로 '미래'를 생각하기 시작한다. 모든것이 매일매일 변하여 혼란만 가중되었던 세상속에서 살아갔던 그가, 사랑이라는 불변하는 가치를 품었을때, 그의 삶이 살고자 하는 의지로 가득차게 된다.


  우리 삶에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삶'이라는 마라톤 속에서 가변적인 가치라는 고장난 나침반으로 혼란에 빠져 방향을 잃은 우리에게, 변하지 않는 가치라는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는 나침반을 제시함으로 이 삶이라는 마라톤을 달리게 하는 원동력을 제시하는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우리는 알고 있어야 할 일들을 얼마나 많이 모르고 있는가?
나는 오늘 죽지 않고 더 오래 살고 싶구나.
이 나흘 동안 삶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기 때문이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배운것을 모두 합친 것보다도
더 많은 것을 배운 것 같다, 하고 그는 생각했다. …(중략)
"삶이란 무척 즐겁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어." 그가 마리아에게 말했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제 2권, 어니스트 헤밍웨이, 민음사, 243-244쪽.




1인칭에서, 2인칭으로, 그리고 '우리'로  



  갈등과 반목, 하지만 이루어 나가야할 한가지 목표. 생각만 해도 괴롭다. 하나의 프로젝트속에서 이루어 나가야 할 한가지 목표는 명확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끊임없이 '1인칭'적 생각을 고수한다. 그것을 이해해주지 못하는 타인에게 겉으로는 웃으며 이해하는 척하지만, 속으로는 '편협한 인간'이라고 딱지붙이기 좋아하는 우리의 모습이다. 헤밍웨이는 이러한 모습을 작중 등장인물들의 생각과 대사로 표현하여 드러내고 있다. 헤밍웨이는 대사를 통해서 개인에서 공동체로 발전해나가는 아주 재밌는 장치를 심어놨는데, 바로 대사의 '주어'다.



"다리를 폭파할 거요."

"무슨 다리 말이오?""그건 가 알아서 할 일입니다."…(중략)

"이건 가 알아서 할 일입니다." 로버트 조던이 대꾸했다.

"함께 상의해 봅시다. 이 짐을 좀 나눠질 생각은 없어요?"

"싫소." 파블로는 고개를 내저었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제 1권, 어니스트 헤밍웨이, 민음사, 30쪽.

"… 이제  이 모든일에 진절머리가 났어. 말 알겠소?"

파블로는 이렇게 말하며 로버트 조던 쪽으로 몸을 돌렸다.

"외국인인 당신이 여기와서 나에게 이래라 저래라 할 권리가 어디 있느냐 말이야?"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제 1권, 어니스트 헤밍웨이, 민음사, 38쪽.




모든 문제 상황에 대해서 각 인물은 자신의 의견을 고집하기 바쁘다. 절대 상대방의 의견을 경청하려고 하지 않으며, 결국 그들은 외국인이니 내국인이니를 들먹이며 산속에서의 구성원들을 다스리기 위한 권력의 첨예한 헤게모니의 싸움을 하게 된다.  그들의 대사를 자세히 살펴보면 모든 대사의 주어가 자기자신에게 포커싱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내가 생각하는 것, 내가 느끼는 감정, 내가 겪고 있는 환경, 상황, 모든것들 … 그들은 오로지 자신이라는 벽에 갇혀 자신이 분명 옳은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행하는데 왜 이 빌어먹을 상대방이 찬동해주지 않는지 분개한다. 이러한 갈등상황이 지속되는 가운데, 게릴라 부대의 대장, 파블로는 비꼬는 말투로 그 주어를 바꾸기 시작한다.



"우린 그 작전을 수행할 때 날씨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어, 잉글레스 양반"

"'우리'라, '우리'라고?" 필라르가 물었다.

"그래, 우리 말이야. 우리가 아니고 뭐겠어."

파블로는 그녀를 향해 히죽 웃고는 포도주를 한 모금 마셨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제 1권, 어니스트 헤밍웨이, 민음사, 425쪽.

 이때의 '우리'는 진정한 하나됨을 뜻하는 것이 아닌, 상대방을 비꼬는 의도가 다분하다. 이러한 의도가 명백하기 때문에 구성원들도 이러한 주어에 대한 거부감을 명백하게 드러낸다. 즉, 일방적인 '우리'를 형성한것이다. 헤밍웨이는 이러한 일방적인 공동체를 형성하는것을 매우 싫어했던것이 명백하다. 그 근거는 다음 대사로 나타난다. "'우리'라, '우리'라고?" 즉, 진짜 우리라고? 진짜 우리가 공동체라고? 거짓말하지마, 이 뻔뻔한 자식아. 라고 이야기하고 있는것이다.


이러한 '뻔뻔한 우리'를 형성한 대부분은 상대방과 진정한 우리가 되도록 무엇을 해야하는지 고민하는 것이 아닌, '더러워서 내가 져준다' 마인드로 기어들어가는 경우다. 프로젝트가 끝나면 그 우리는 더이상 그 우리로 남아있지 않는다. 다시 주어는 '나'로 돌아간다. 자신이 희생한 그 부분만 과대포장해 안주거리로 씹어대기 시작한다. '내가 얼마나 참았는데 그 자식은 …' 이라며 자신의 '뻔뻔한 우리'형성은 사회생활이라는 단어로 포장되어 근사한 스킬로 묘사되기 일수다.


헤밍웨이는 작품을 통해서 로버트 조던과 파블로의 갈등을 잊을만 하면 한번씩 지속적으로 밖으로 꺼낸다. 보다보면 유치원수준도 아니고, "얘네 또 싸우네, 술 먹고 할일이 싸우는것 밖에 없나" 이야기 할 정도로 지속적으로 갈등을 표면으로 나타낸다. 이러한 갈등이 표면으로 드러나자, 서로의 생각을 싸우는 과정을 통해 드러낼 수 밖에 없게 된다. 솔직한 자신의 마음을 드러낸다. 서로 놈놈놈(더러운놈, 치사한놈, 나쁜놈)임을 처절하게 부르짖는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듣게 된다. 서로의 말하지 못한 자신의 숨기고 싶은 약점들을 의도치 않게 말하게 된다. 그리고 이해하게 된다.


"수에르테(행운을 빌어요), 파블로."

그가 이렇게 말하고는 이상하고 단단하고 결의에 찬 손을 꼭 쥐었다.

"당신 물건을 갖고 나가서 미안했어. 수상쩍은 짓이었지." 파블로가 말했다.

"하지만 당신은 우리에게 필요한 걸 가져다 줬어요."

"이젠 이 다리 일에 대해 당신과 맞서지 않아, 잉글레스 양반. 일은 잘 끝날 꺼야."

파블로가 말했다.

"아니, 당신들 둘이서 뭘 하고 있는거야? 갑자기 마리코네스(동성애자들)라도 되어 가는건가?"

필라르가 어둠 속 그들 바로 옆에서 내뱉었다. …(중략)

"임자는 내 마음을 잘 몰라. 잉글레스 양반하고 난 서로 이해하고 있거든." 파블로가 말했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제 2권, 어니스트 헤밍웨이, 민음사, 285쪽.


결국 그들의 대사속에서 그들은 '내' 감정과 생각이 아닌, '당신'의 생각과 '당신'을 이해한다 라는 표현으로 거듭나게 된다. 소제목처럼, 1인칭에서 드디어 2인칭으로 거듭나게 된다. 놀랍게도, 2인칭으로 거듭나고 얼마 되지도 않은 시점에 그들은 서로 '우리'라는 표현으로 진정한 공동체가 되어버린다. 스스로 말하고도, '이상한' 느낌을 받은 그들은 필라르의 유쾌한 농담으로 말로 다 할 수 없는 유대감을 느끼게 된다. 그들이 한것은 평소한것처럼, 유치하게 끊임없이 갈등의 과정을 겪었을 뿐인데, 이러한 갈등을 통해 그들은 상대방의 의견을 듣기 싫어도 들으며, 조금씩 자신을 진정으로 접어나가며 하나의 목표를 인식하게 된것이다. 헤밍웨이는 이러한 진짜 '공동체'를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공동체라는 곳은 치고박고 싸우고, 갈등이 일어나는 곳이다. 하지만 이러한 갈등을 통해 서로를 이해하며 다른점을 알아가고, 최선의 목표를 위하여 구성원간의 모두의 자아를 접는 훈련을 하는곳이 또 공동체기도 한 것이다.


우리의 삶이 철옹성과 같은 누구도 들어올 수 없는 삶이 된다면 얼마나 서글픈 일인가.


변하지 않는 가치를 소유한 공동체, 우리는 그것이 필요하다


누구든 그 자체로서 온전한 섬은 아니다.

모든 인간은 대륙의 한 조각이며, 전체의 일부이다.

만일 흙덩이가 바닷물에 씻겨 내려가면

유럽의 땅은 그만큼 줄어들기 마련이다.

한 곶(岬)이 그리되어도 마찬가지며

만일 그대의 친구들이나 그대의 영지(領地)가 그리되어도 마찬가지이다.

어느 누구의 죽음도 나를 감소시킨다.

왜냐하면 나는 인류 전체 속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누구를 위하여 종이 울리는지를 알고자 사람을 보내지 말라!

종은 그대를 위해서 울리는 것이니.

-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존 던


작중에서 로버트 조던은 변하지 않는 가치를 소유한 시점부터 삶의 의욕이 변화되었다. 의미를 찾을 수 없는 부분에서 의미를 찾게 되었고, 종단에는 결국 '이 세계는 아름다운 곳이며, 그것을 위해 싸울만 하다'라는 고백으로 발전하게 된다. 아이러니 하지 않은가, 갈등론적 세계관이 극렬하게 드러나는 곳인 전쟁터에서, 세계는 아름답고, 그것을 위해 싸울만 하다니. 미친게 틀림없다. 하지만 이런 긍정적인 미침은 그의 삶의 원동력을 가지고 와준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의 옆에는 항상 공동체가 존재했다. 게릴라 대원들 한명 한명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전쟁에 임하는 그들의 마음가짐을 지켜보며 자신을 돌아보게 했고, 게릴라 대원들의 부대장격인 여장부 필라르를 통해 끊임없이 동기부여와 함께 공동체가 와해되지 않도록 쓴말도 거침없이 내뱉었으며, 때로는 지혜롭게 대처함으로 그에게 지혜라는것이 무엇인지 보여주며 존경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또한 마리아의 존재를 통하여 극단적이고 세속적인 가치속에서 순수한 사랑만을 갈구하는 존재를 보여주기도 하였다. 이러한 존재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여 공동체를 이루는 기적을 헤밍웨이는 천재적으로 풀어내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누구든 그 자체로서 온전한 섬은 없다. 우리는 완벽하지 않다. 그래서 끊임없이 사회에서 소외되고자 하면서 동시에 구속당하고자 한다. 이러한 애매한 스탠스는 이제 버리시라. 당신과 나는 완벽하지 않지만, 완벽하지 않은 우리가 모여 변하지 않는 가치를 소망하며 하나를 이루자. 그럴때 우리는 진짜 '우리'라는 연대감을 맛볼 수 있지 않을까. 더이상은 고독하게 죽어가는 사람이 없어지길 간절히 소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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