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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디 Jan 22. 2019

전체주의에서만 현실왜곡이 일어나는것은 아니다

조지 오웰의 1984를 읽고

빅브라더, 그는 오로지 경외의 대상이지만그에 대한 사고는 금지의 대상이다.

           1984년, 작중의 배경이 되는 그 시점. 조지 오웰에게 1984년은 먼 미래였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이미 지나간, 역사가 되어 교훈을 배우는 시점이 되었다. 조지 오웰이 걱정한 1984년은 전세계적으로는 좌와 우의 거대한 대립으로 인한 냉전시대가 한창인 상황이었으며, 대한민국 사회에서는 군부독재라는 현실이 되었고, 전두환, 노태우를 비롯한 하나회 출신 군부 독재정권은 불순분자 색출이라는 미명하에 많은 사람 들을 검열하고, 감찰하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턱 하니 억하고’ 죽여왔다. 이러한 냉전과 검열시대를 살아온 많은 사람들이 조지 오웰의 「1984」가 현재 어디에서도 존재하는 CCTV, 웹캠과 같은 신(新)검열시대를 예측하고 예언했다고 하며 이 작품의 핵심은 이런 것을 예언한것에 있다고 평한다. 하지만 이러한 평은 「1984」를 단편적으로 밖에 이해하지 못했다고 감히 이야기 할 수 있다.



‘이중사고’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이중사고'는 '영사(영국 사회주의-필자 주)'의 핵심이다. 의도적으로 거짓말을 하면서 그 거짓말을 진실로 믿고, 불필요해진 사실은 잊어버렸다가 그것이 다시 필요해졌을 때 망각 속에서 다시 끄집어내며, 객관적인 현실을 부정하는 한편으로 언제나 부정해 버린 현실을 고려하는 등의 일들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중사고'란 말을 사용할 때도 '이중사고'를 해야 한다. 이 말을 사용하면 현실을 왜곡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고, 여기에서 다시 '이중사고'를 하면 바로 인정한 것을 지워버리는 것으로, 무한한 거짓말이 진실보다 언제나 한걸음 앞서가기 때문이다. 

「1984」, 조지 오웰, 민음사, 53쪽.


우리는 현재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개진하며, 혹여나 권력에 반대되는 의견을 개진하고, 공론화 한다 하여도 어떠한 행동의 제약이나, 구속받지 않는 사회에 살고 있다. 수많은 시위가 매주 주말마다 광화문에서 열리고, 이러한 시위 참가자들은 도로를 점용하기까지 하며 자신들의 생각과 이익을 적극적으로 반영하고자 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조지 오웰의 「1984」는 이것과는 반대급부에 놓여진 전체주의적 국가들을 조명하고 있다. 전체주의적 국가들이 소유한 특징 중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중 하나는 바로 ‘국가의 생각=개인의 생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각 개인들은 자신의 의견과 생각, 사상까지 침해받을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특별히 「1984」에서는 이런 모습들이 ‘이중사고’라는 형태로 가장 일상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해보아야 할 것은 과연 이러한 자유민주주의 체제하에 살아가는 우리가 과연 이러한 ‘이중사고’에서 자유로운지에 대하여 심히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1984년 당시, 군부독재하에서 우리가 알게모르게 강요받아왔던 행위는 분명 ‘이중사고’의 행위였다. 사회가 무엇인가 잘못 돌아가고 있었음을 알고 있었음에도 우리는 학교에서, 사회에서, 직장에서 가르치는 ‘잘먹고 잘살자’라는 슬로건하에서 탄압받는 객관적인 현실을 부정하는 일을 지속해왔다. 국가도 사실관계를 뒤엎어, 객관적인 현실을 부정하며 왜곡했고, ‘이중사고’에 의해서 이러한 왜곡과정마저 철저히 검열하여 삭제해왔다. 하지만 30년이 더 넘게 지난 지금 작금의 우리 현실에도 이러한 ‘이중사고’는 처절하게 드러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앞서 인용한 ‘이중사고’의 정의를 잘 살펴보면, 이러한 사고과정은 우리 일상속에서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우리의 허영심 때문에 의도적으로 거짓말을 하면서, 그 거짓말을 진실로 믿는 행위, 불필요한 사실, 나에게 불리한 사실은 잊어버렸다가, 나에게 도움이 되고 이득이 될 때 망각속에서 꺼내어 부득불 우기는 행위. 끊임없이 나의 객관적인 현실을 부정해보고자 애쓰지만, 결국 객관적인 현실속에서 타협해 버리는 우리의 행위가 1984년 조지오웰의 작중 등장인물들의 사고과정과 과연 무엇이 다를까. 아니, 오히려 더욱 심각해 졌다.  그때는 이중사고를 명령하는 권력의 주체가 그래도 투쟁할 대상이 명확한 가시적인 거대 권력이었다면, 지금은 비(非)가시적이고 불완전한 ‘나’라는 주체가 나 자신을 철저하게 왜곡하기 위하여 이중사고를 끊임없이 시도하고 있는 것이 우리 현대인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 무지는 힘' 의 명제는 반어적인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반어적 의미에 열광하는 사람들을 표현한것은, 세상이 거꾸로 정상이 아님을 상징하고 있는

나 자신에 대한 왜곡을 중단할때, 진짜 '사람'이 된다


궁리(窮理): (명사) 마음속으로 이리저리 따져 깊이 생각함. 또는 그런 생각. 

'궁리', 네이버 국어사전 , 2019년 1월 18일 검색.


     궁리하다라는 뜻은 마음속으로 이리저리 따져 깊이 생각한다는 뜻으로, 생각보다 머리아픈 과정임을 뜻한다. 그래서 그런지 성리학에서는 이러한 '궁리'라는 개념이 아주 크게 쓰이기도 하였고, '거경궁리(居敬窮理)'-항상 공경한 마음을 견지하여 학문을 탐구하다- 라는 구체적인 수양법이 나오기도 하였다. 하지만 21세기 우리는 나 자신을 궁리하지않는 자아무비판적 세상에 살아가고 있다. 그 가운데서 나의 마음을 '거경'하여, '궁리'하는것에 많은 어려움을 느끼고 있는것이 현실이다.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고고와 디디가 맹목적인 삶을 살았던것 처럼, 김승옥의 「무진기행」에 나오는 안개속을 떠돌아다니는 주인공들처럼, 우리는 어느순간 나의 삶에 대한 궁리를 잊은채, 무비판적으로 내가 속한 조직을, 삶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곳에서 발생하는 여러가지 문제들에 대해 끊임없는 왜곡을 거쳐 덮기에 급급하다.


「1984」의 주인공, 윈스턴도 그렇다. 무언가가 이상함을 느끼지만, 철저하게 훈련받고 교육받은 '이중사고'에 의해 자신의 생각을 모두 제거해버리고, 당의 사고와 조직의 강령을 따르는 그는 모든 비판적 사고를 잃은 인간이다. 그러나 그가 사랑이라는 금기시되는 금단의 행위를 하게 되고, 끊임없이 의심해왔던 자신의 진정한 사랑을 받아들임으로, 진짜 자신의 내면적 모습을 섹스라는 행위를 통해 승화시킨다. 모든것이 끝나고, 자신이 사랑하는 그녀 줄리아와 함께 평생동안 해왔던 '이중사고', 즉 자신에 대한 왜곡을 그쳤을때, 그는 진정한 인간이 되었다는 강한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이제 평생토록 왜곡된 삶이 아닌, '인간'다운 삶을 살겠다고 고백한다.


"그래, 당신 말이 맞아. 사람의 속마음까지 지배할 수는 없지. 만약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게 가치 있는 일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면, 비록 대단한 성과를 얻지는 못하더라도 그들을 패배시키는 셈은 되는거야."

「1984」, 조지 오웰, 민음사, 286쪽.


"당신들은 그럴 수 없을 겁니다."

그가 힘없이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윈스턴?"

"당신이 방금 말한 그런 세계를 당신들을 만들 수 없단 말입니다. 그건 꿈에 불과합니다. 불가능한 일입니다."

"왜지?"

"공포와 증오와 잔인성 위에 문명을 세운다는 건 불가능합니다. 그건 결코 지탱될 수 없습니다."

"어째서인가?"

"생명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붕괴될 겁니다. 그런 문명은 저절로 파멸하게 됩니다."

…(중략)

"그럼 우리를 패배시킬 거라는 그 원칙은 뭔가?"

"모르겠습니다. 인간의 정신이라고나 할까요."

"자네는 자네 자신을 인간이라고 생각하나?"

"네."

「1984」, 조지 오웰, 민음사, 376쪽, 378쪽.


  그는 끊임없는 고문이 가득한 '애정부' (the ministry of love) 에서 인간다운 삶을 끊임없이 주장하며 저항한다. 그에게 한번 느껴진 진짜 '인간다운 삶'은 수많은 고문속에서도 포기될 수 없는 강력한 것이었다. 그러나 내부당원이자 윈스턴을 고문하는 오브라이언은 윈스턴의 해골과 같은 추잡한 육체를 마주하도록 거울앞에 서게 한다. 휜 척추, 반쪽이 된 얼굴, 해골과 같은 뼈대를 마주한 윈스턴은 자신에 대한 연민을 느끼기 시작한다. 결국 그는 애정부 내분에서 끊임없이 저항하다, 101호에서 마주친 자신의 두려움에 결국 자신의 인간성을 포기하고 만다.



우리 자신의 모습도 그렇지 않은가. '내가 이렇게 까지 저항해야할까? … 그냥 남들 사는것 처럼 살면 안될까?…' 라고 저항의 극단적 국면에 접어들때마다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인간다운 삶을 살고자 변화를 꾀하려, 끊임없이 세상에 저항하고, 세상적 가치를 따라가는 것보다 인간적인 가치를 추구할때 세상 사람들은 도리어 우리에게 조롱과 비난을 거듭하는것을 매번 듣다보면, 그때부터 나 자신에 대한 연민이 끊임없이 밀려온다. '그래, 이렇게 까지 안해도 돼. 이렇게 살지 않아도 잘 사는 사람은 많잖아?'라며  나 자신에 대한 합리화의 과정을 몇번 거치다보면, 어느순간 이전의 나의 모습이 끊임없이 그리워지며, 따뜻한 수프와 잠자리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제자리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의 삶을 포기하고 만다.







나 자신에 대한 끊임없는 투쟁을 거치고 나면, 어둠속에서 빛이 비칠때에 너무나도 밝아보이는 것 처럼, 우리는 밝은 새로운 세계와 새로운 경험을 맞닿게 된다.

오웰의 강력한 경고, 나 자신에 대한 끊임없는 투쟁!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의 이름은 압락사스."

「데미안」, 헤르만 헤세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서 나 자신의 성벽을 허물어야 한다고 이야기 했다면, 이제는 거대한 '나'라는 비가시적 투쟁 대상에 대하여 우리가 어떻게 우리 자신을 지켜나가야 하는지 오웰은 묻고 있다. 끊임없이 나 자신에 대한 왜곡된 시선을 거두어야 하며, 하나의 절대권력이 되어버린 나를 꺾어 무너뜨려야만 진짜 '인간성'을 소유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그는 소설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그 투쟁에서 패배한 윈스턴은 결국 술에 쩔어가며 진짜 빅브라더를 사랑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중사고에 의해서 '빅브라더를 사랑한다' 라고 고백하며 현실의 자신의 삶에 타협하여 썩어져 가는 사회속에서 적응해버린다. 이러한 비판적 사고의 정취를 모두 잃어버린 사람들이 가득한 사회는 결국 썩어져가는 고인물이 되어갈 수 밖에 없다. 끊임없이 우리는 투쟁해야 한다. 우리는 저항해야한다. 그 대상은 사회도, 국가도, 타인도 아닌 바로 자아(自我)이다. 윈스턴이 실패한 알을 깨는 행위, 우리는 태아와 같은 인식수준에서 깨어나 이제 일생을 살아가는 진정한 생명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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