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의 「국가(國家)」와 이흥우의 「교육의 목적과 난점」을 읽고
조지오웰의 「1984」를 보면 작중의 인물들은 모두 ‘이중사고’라는 것을 거칩니다. 의도적으로 거짓말을 하면서 그 거짓말을 진실로 믿고, 불필요해진 사실은 잊어버렸다가 그것이 다시 필요해졌을 때 망각 속에서 다시 끄집어내며, 객관적인 현실을 부정하는 한편으로 언제나 부정해 버린 현실을 고려하는 등의 일들을 ‘이중사고’라고 칭합니다. 무한한 거짓말이 진실보다 언제나 한걸음 앞서가는 셈입니다. 실제로 작중의 인물들은 끊임없이 이중사고를 거치며 왜곡된 사회에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들도 멈출 수 없는 생각은 ‘과연 이러한 국가가 옳은것일까?’ 에 대한 질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생각이 들며, 그러한 국가가 옳지 않다는 실재를 깨닫고 보았을 때, 그들은 저항하기 시작합니다.(작중에서는 사랑의 감정과 자연으로 표현됩니다.) 이는 국가론의 내용과 오마쥬됩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부정의한 삶에 대한 이익에 이중사고를 거치며 살아갑니다. 요즈음은 아예 이러한 부정의한 삶이 옳은것이라고 칭하며 살아가는 사람들도 여럿 있습니다만, 아직까지는 이러한 부정의한 삶으로부터 오는 이익을 얻는 여럿 권세가들에 쏟아지는 비난 정도를 생각하면, 아직까지는 이러한 여론이 우세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럴 수 있는 이유는 이것이 올바르지 않다는 ‘실재’를 우리가 깨닫고 있기 때문이겠지요.
‘삶의 형식과 교육’이라는 작은 글이라고만 생각했던 약 20페이지 가량의 글은 이러한 사회적 흐름의 핵심을 정확하게 찌르게 되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와 보이는 세계. 두가지의 세계는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 명백한 사실인것처럼 보입니다. 이것을 플라톤과 소크라테스의 관점을 빌어 감히 의역해보자면 보이지 않는 세계는 ‘이데아’며 ‘실재’ 즉 ‘특별한 것을 보는 것’과 보이는 것은 ‘외양’ 즉 ‘가시적인 것’이라고 정리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최근 교육계의 현장에서 아이들에게 가장 이슈가 되는 것은 ‘돈을 어떻게 버느냐’입니다. 아이들입에서 이것이 과연 나올말인가, 의심하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제한적으로 현장에서 겪은 아이들의 많은 고민들은 ‘부정의한 방법이라도 돈을 많이 벌고 싶다’라는 고민이었습니다. 최근 대한민국 아이들에게는 ‘실재’라는 비가시적인,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고찰보다는 ‘외양’이라는 가시적인 세계가 중요해진 것은 명백합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잘 이끌어야하는 교사의 역할은 온전하게 수행되고 있느냐에 대한 질문에도 퀘스쳔 마크를 찍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흥우 교수께서 이야기하고 있는 삶의 형식, 즉 삶의 이데아를 제시해야할 존재로서의 교사는 이미 사라져가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무엇이 원인이니 가타부타 이야기 하는데에 시간을 소비하는 것보다는, 이 시간 집중해봐야 할 부분은 ‘왜 우리 교사들은 어느순간 삶의 형식이 결여되어있는 수업을 하는가?’, 다른 말로 ‘왜 우리 교사들은 삶의 특별한 것을 보지 못하는 평범한 관점을 가진 사람이 되어버렸는가?’ 라는 질문입니다.
플라톤 「國家」의 대화편 1-2권을 줄줄이 강독하며 수호자를 양육하기 위한 어린아이의 교육에 대한 여러 가지 주의점을 숙고해보았지만,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어린아이에게 알려주어야 할 것을 매우 ‘가려가며’ 가르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어린아이는 판단력이 매우 어리기 때문에 무엇이 진실인지, 무엇이 거짓인지 분별하지 못하여 그것이 세상의 전부라고 착각해버린다는 골자의 내용이었습니다. 소크라테스가 생각했던 교육을 깊이 묵상해 본다면 교사를 희망하는 우리 예비교사들이 교실에 갔을 때는 분명 이 아이들에게 ‘부정의’가 합리화 되어 이것이 당연한 것이고, ‘평범’한 것처럼 받아들여지는 세상일것이라고 저는 감히 예상합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외양’이 가득찬 교실속에서 교사도 동일하게 아이들과 ‘평범한 관점’으로 가르친다면 무엇이 진실인지, 무엇이 거짓인지 분별하지 못하는 아이들 앞에서 과연 온전한 교실, 즉 작중 표현을 빌어 ‘정의로운’ 교실을 만들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이 강하게 든다는 것입니다.
결국 저는 이 유인물의 본래 책 이름인 ‘교육의 목적과 난점’에서 교육의 목적이 이야기하는 것은 아이들에게 보이지 않는 세계, ‘실재’를 심어주는 것이다 라는 정의를 내렸다고 생각합니다.
안타깝지만 명확한 사실은, 앞으로도 권력은 약자들을 끊임없이 탄압할 것이며, 보이지 않는것에 대한 관심은 꾸준히 사그라들 것입니다. 인간은 가시적인 것을 더욱 사모하는 존재입니다. 육체적, 정신적 쾌락을 중시하는 것을 보면 순간적이고 즉각적인 반응에 더욱 반응하는 동물적인 존재인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예비교사뿐 아니라 어른들은 이러한 가운데서도 보이지 않는 세계를 소망하며 끊임없이 가르쳐야 합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조지 오웰 「1984」에 나오는 작중 인물들의 ‘이중사고’를 답습하지 않도록 해야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이들의 사고형성에 최전선에 있는 우리들이 해야할 역할이라고 감히 제언드리는 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