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아내가 인스타그램에 고맙다는 식의 메시지를 남겼다. 본인이 조금이라도 우울해지려 할 때마다 미리 알고 스윽 와서 옆자리에 앉아 있어 주어 고맙다는 것. 사실 내가 예민한 것도 있지만 아내가 표정이나 마음을 숨기지 못하는 것도 크다. 어찌 보면 예민한 나와 티 나는 아내는 천생연분인 것이다.
예민한 것이 단점이라고 생각할 때가 있었다. 사실 장점인 적이 있었나 싶기도 하다. 사람들의 말, 행동, 환경의 변화 등 세상에서 오는 모든 자극에 일일이 예민하게 반응하다 보니 일상이 피곤했다. 가족들은 나를 '트리플 A형', '소심이' 등의 별명으로 놀리곤 했다. 부인할 수도 없었다. 소심하고 예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족들의 놀림이 딱히 기분 나쁘지 않았다. 우리 엄마도 똑같이 '트리플 A형'이자 '소심이'였기 때문이다. 엄마 덕분에 우리 '소심이'들은 적어도 집에서는 소수 (minority)였던 적이 없다. 대심이(?)인 아빠와 누나, 그리고 소심이인 엄마와 나는 자주 팀을 이루어 서로를 비판했다. 그러다 보니 소심하고 예민한 것이 이상한 것이 아니고, 그저 내 정체성이라는 것을 자연스레 알게 되었던 것 같다.
소심하고 예민하다는 것은 그 자체로 판단의 대상이 아닌 것도 같다. 소심함이나 예민함은 하나의 씨앗이고, 가족의 사랑과 안정감 같은 햇살과 물이 주어지면 소심함은 꼼꼼함으로, 예민함은 섬세함으로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닌가 싶다. 아내가 누리는(?) 나의 섬세함은 사실 30년도 넘은 씨앗의 열매인 것이다.
두 아이를 키우며 항상 다짐하는 것은, 아이들의 씨앗을 함부로 판단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같은 부모에게서 나왔는데 벌써 다른 꿀떡이와 찰떡이. 각자의 그 씨앗을 부모라는 이름으로 함부로 판단하지 않으려 한다. 그저, 그 다른 씨앗의 모양을 인정하고 존중하며 가족의 사랑과 안정감 속에서 각자의 모양대로 잘 자라나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