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8. 17. (일)
한동안 아프지 않던 둘째가 뜨끈했다. 열을 재보니 38.2도. 주황색 빛을 반짝이는 체온계에 아내와 말없이 눈이 마주쳤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내일 어린이집은 못 가겠구나.
둘째는 내가 휴직을 한 직후부터 기다렸다는 듯 아팠다. 편도가 부어 먹기 시작한 약이 끝나자마자 머리에 종기가 심해져 피부과에 다니기 시작했고, 피부과 약을 끊자 장염을 앓았다. 등원할 때 약을 먹이고, 어린이집에 약을 싸서 보내고, 하원할 때 다시 병원에 들르기를 반복했다.
내가 육아휴직을 하지 않았으면 이 모든 걸 만삭의 아내가 혼자 해야 했겠지.
최근 친한 맞벌이 부부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그 집 둘째가 수요일 즈음 열이 40도가 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열이 안 떨어지면 꼼짝없이 부모 중 하나가 휴가를 써야 했는데, 남편도 바쁜 시기였고 아내는 연차가 없는 상황 (정확히는 아직 재직기간 1년이 안되어 한 달에 하루씩 월차가 생기는 상황)이라 발을 동동 굴렀다는 것이다. 다행히 아이 열이 조금 떨어졌고 마침 금요일이 광복절이라 간신히 넘겼는데, 매번 이럴 때마다 막막하다며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맞벌이는 결코 죄가 아니지만, 맞벌이를 하는 당사자들은 죄책감을 느끼게 되는 것 같았다.
아이를 키우며 소아과는 피할 수 없는 관문이다. 어찌 보면 당연하다. 면역력도 약하고 아직 위생 관념도 없으니,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서 단체 생활을 하며 서로 감염도 잘 된다. 커 가는 과정이라 아프고 낫고를 반복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래서 '육아'라는 단어에는 이 자연스러운 현상을 누군가가 신경 쓰고 돌보며 견뎌내는 것을 포함한다. 아이가 아픈 것을 옆에서 돌볼 수 있는 상황에서도 마음이 아리고 '차라리 내가 아픈 게 낫겠다' 싶은데, 일하느라 아이가 아픈 것을 옆에서 돌볼 수 없는 상황에서의 마음은 얼마나 아릴까.
아이를 키우느라 힘들까 봐 매달 지원금이 나오는 것도 귀하고, 주차장 할인 혜택이나 취득세 감면 혜택도 모두 귀하지만, 무엇보다 정책적으로 부모로서 누구나 마주하게 되는 상황에 대한 경감책이 필요한 것 같다.
그렇기에 육아휴직이 더 유연하게, 더 자유롭게, 더 자연스럽게 사용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아이가 아픈 것이 자연스러운 만큼, 부모가 아픈 아이를 돌보러 달려가는 발걸음도 자연스러운 문화가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쟤 또 집에 가?'라는 꼬리 무는 시선이 아니라, '쟤는 당연히 집에 가야 하니까'라는 단호한 시선의 끊어짐이 자연스러웠으면 좋겠다.
시간이 지나면 그렇게 바뀌어가려나. 어쩌면 나부터 복직 후 시선을 바꿔야 하는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