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셋째 고찰

왜 셋째를 갖게 되었냐고요?

by 봉천동잠실러

2025. 9. 5. (금)


고찰. 생각하거나 살펴서 알게 되는 것이라고 한다.




아내와 나, 우리는 왜 셋째를 갖게 되었을까?


더 정확히는, 왜 셋째가 생기는 것을 막지 않았을까? 더 구체적으로, 왜 정관수술을 하지 않았을까?


화장실에서 나온 아내의 '오빠?!'라는 외침을 듣던 그 순간에도 나는 두 아이를 안고 거실에서 뒹굴고 있었다. 그 외침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이제 세 아이의 아빠가 되었다는 것을.




힘들 것을 몰랐느냐?


아니. 알았다. 내 주변에는 세 아이를 키우는 집이 몇몇 있다. 당장 같은 아파트 18층에도 있고, 다니는 교회에서 친하게 지내는 두 집이나 세 아이를 키운다.


혹시 그 집들이 행복해 보여서? 뭐... 각자 나름 행복해 보였다. 그런데 행복해 '보이는 것'만큼이나 버거워 보이기도 했다. 놀리기도 엄청 놀렸다. '어후.. 무슨 생각으로 셋째를 가졌어요?'라고 킥킥거리면서.


그랬던 내가 이제 세 아이의 아빠가 된 것이다.




힘들 것도 알았는데 왜 그랬느냐?


여러 가지 이유가 작용했던 것 같다.


1. 아내와 나는 육아를 하면서도 사이가 좋았다.


환경은 쉽지 않았다.


나는 직장이 멀어 하루 통근시간이 3시간이 넘었고 매일 녹초가 되어 집에 돌아왔다. 육아에 있어서 양가 부모님 도움을 전혀 받지 않는 아내는 혼자 두 아이를 오롯이 키우는, 요즘 말로 '독박 육아'를 했다. 맞벌이에서 외벌이가 되며 경제적 부담도 컸다.


그래도 아이 둘을 키우며 크게 싸운 적이 없다.


저녁에 돌아와 허겁지겁 밥을 먹고 아이들을 재우고, 슬그머니 거실에 함께 나와 킥킥대며 수다를 떨곤 했다. 몸이 깨질 듯 힘들었지만 행복했다.


아내와 나는 굵직굵직한 가치관이 맞았던 것 같다.


양가 부모님께 아이를 맡기지 않기로 한 것도, '우리 새끼'니까 힘들어도 우리가 키운다는 결정이었고, 그 결정의 주체는 당연히 아내와 나, '우리'였다. 그렇기에 책임도 함께 했다. 누가 화장실 청소를 맡고, 누가 빨래를 맡고 이런 것을 정할 필요가 없이 모든 것은 같이 했다. 시간이 지나며 손발이 맞아가다 보니 어찌어찌 일 하고 애 키우는 것을 함께 해낼 수 있었다.


둘째를 키우며 복직을 준비하던 아내가 '퇴사하고 전업주부가 되겠다'고 말한 날, 아내 복직을 위해 육아휴직 연장을 준비하던 나는 마음이 깨질 것 같았다. 그렇게 퇴사하던 날도 쓸쓸하지 않도록 함께 갔고, 퇴직 기념(?) 맛있는 뷔페도 같이 갔다. 우리는 휴직도 함께, 복직도 함께, 퇴사도 함께였다.


그렇기에 아내가 만약 셋째를 낳고 복직을 하겠다고 하면, 나는 언제든 세 번째 육아휴직을 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다.


2. 둘째가 너무 신기했다.


첫째는 양가 통틀어 첫 손주이자 첫 아이였다.


그렇기에 너무 예쁘면서도 조심스럽고 두려운 마음이 컸다. 초보 부모였던 우리 입장에서는 하나하나가 조심스럽고 낯설어서 시간이 어떻게 지났는지 모르게 지나갔다.


둘째가 태어난 직후에는 첫째에 대한 미안함이 컸다.


모든 것을 독차지하던 첫째가 퇴행을 겪는 것을 보며 마음이 쓰라렸다. 그런데 생각보다 첫째와 둘째는 빠르게 서로의 존재를 받아들였고 남매로서 녹아들어 갔다. 그러고 보니 첫째와는 완전히 다른 둘째가 너무 신기하고 예뻤다. 같은 부모, 같은 배에서 나왔는데 어떻게 이렇게 둘이 다를까. 아내와 내가 묘하게 뒤섞인, 그러면서도 서로 너무나 다른 두 남매가 신비롭기까지 했다.


그러다 보니 아내와 종종 이야기했던 것이다.


'만약 셋째가 있다면, 그 아이는 또 어떤 아이일까?'


둘째를 키우며 느꼈던 신비로움이 셋째에 대한 궁금증으로 이어졌다.


3. 계획하지 않았던, 아니 감히 계획하지 못했던 행복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것은 경험하면 할수록 신비로운 일이다.


주변에서 아이를 키우는 것을 보거나 매체를 통해 살펴보는 간접적인 경험과는 차원이 다르다. 매 순간 예상하지 못했던 행복이 뛰어들어온다.


이 글을 쓰는 중간에도 '타타타탁' 소리와 함께 둘째가 잠에서 깨자마자 달려와 안아달라고 안겼다. 내 품에 폭 안겨 아기 냄새를 풍기는 둘째를 꼬옥 안고 있노라면, 시간이 잠시 멈춘 것 같다.


내가 이런 행복을 계획한 적이 있었던가.


아니. 감히 상상한 적도 없었다.


부모 스스로를 위해서라도, 아이는 직접 키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니, 직접 누려야 한다.


나는 두 번의 육아휴직을 통해 커리어 측면에서는 많은 손해를 봤다. 회사에서 눈치도 많이 봤고 이런저런 이야기도 많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회하지 않는다. 대신 나는 부모로서 아이들을 직접 키우는 영광을 누렸고, 지금도 아이들을 보면 그때의 기억이 아른거린다.


셋째가 생기면 경제적으로나 커리어적으로나 힘들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이런 행복을 앞서 두 번이나 경험했기에 그 가능성을 완전히 차단할 수 없었다.


육아는 내게 '힘들어도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그 어떤 경험보다 선명하게 알려주었다. 아마 셋째가 태어나면 모르긴 몰라도 아내와 나는 더 힘들어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셋째와 함께할 일상이 벌써 기대된다.


힘들어도 행복할 것이기 때문에.


복작복작 남매 하나 추가요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