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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란 Aug 01. 2018

몽생미셸의 사촌을 만나다

'성 미카엘 언덕(St. Michael's Mount)'에서



나는 영국의 조용하고 작은 도시들에 매머드 화석처럼 산재해있는 성당들을 돌아보면서, 건축가의 손이 세속적 삶에 대한 사랑과 이해가 이끄는 대로 잘 따랐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사랑, 이해 그리고 확실한 실용 정신, 영국의 성당은 하늘에 닿으려는 야망을 품은 화살처럼 뾰족한 정상을 향해 솟구치지 않는다. 황홀경이나 지나친 금욕주의나 삶에 대한 경멸을 제안하지도 않는다.


_ 카잔차키스, 『영국 기행』








성 미카엘 언덕 내 갤러리

  영국의 정치가 볼링브룩 Lord Bolingbroke은 “우리는 대륙과 이웃하기는 하지만 대륙의 일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항상 잊어서는 안 된다”라고 말했다. 영국은 분명 유럽에 속하지만 유럽 대륙 내 다른 국가들과 다른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칼레 해변에서 도버 절벽이 보일 정도로 유럽 대륙과 영국은 가깝다. 그럼에도 자신만의 정체성을 뚜렷하게 가지고 있는 나라가 바로, 영국이다. 자신만의 색을 가지고 있는 영국과 앙숙인 나라를 하나 꼽자면, 바로 프랑스다. ‘100년 전쟁’이나 ‘나폴레옹 황제’와 격렬한 전투가 세계사에 굵직한 족적을 남겨서인지, 두 나라 간에 사이가 좋았던 적을 떠올리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두 나라는 왕가 간에 결혼을 했을 만큼 사이가 돈독했던 적도 있었다.      


  영국 최남단의 작은 섬에 썰물 때에 걸어갈 수 있는 성이 있다. 섬이면서 동시에 육지인 이 성을 보면, 노르망디에 있는 몽생미셸과 굉장히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붙은 별칭이 ‘영국의 몽생미셸’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성이라는 이름보다 요새라는 이름이 더 잘 어울리는 곳, 바로 성 미카엘 언덕 St. Michael's Mount이다(성 미카엘 언덕을 프랑스어로 바꾸면 몽생미셸이다).


  아무 때나 들어갈 수 없는 곳이라서 그런가? 많은 사람들이 소유하고 싶었던 곳이었다. 이곳을 차지하기 위해 많은 전쟁을 치렀고 수도승의 유배지가 되기도 했었고, 콘월 지역의 영주의 성이기도 했었고, 때로는 프랑스의 영향 하에 놓이기도 했었다. 지금은 프랑스 영토가 된 노르망디만큼이나 파란만장한 역사를 가졌다는 점만 봐도 두 섬은 닮았다. 그리고 한 때 노르망디가 영국의 영향 하에 있었듯, 이 곳이 프랑스의 영향 하에 있었때가 있었다.



St. Michael's Mount



  잉글랜드 땅과 가까운 성 미카엘 언덕이 프랑스령으로 들어갔던 이유는 고해왕 에드워드1003?~1066 때문이다. 노르망디 공국의 후계자였던 에드워드는 극적으로 영국의 왕이 될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새아버지인 크누트 왕이 자신을 암살할 계획을 꾸미고 있었고, 어머니 역시 새아버지에게서 자신을 지켜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잉글랜드의 왕이 된 후 자신의 작은 아버지이자 새아버지이기도 한 크누트 왕의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보살펴준 노르망디 공의 아들에게 감사의 표시로 성 미카엘 언덕을 넘겨주었다. 에드워드의 노르망디 사랑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생명의 위협을 받았던 때의 기억은 에드워드의 삶에 영향을 주었는지, 노르망디 공의 아들이자 자신의 외조카를 후계자로 지목한 것이다. 왕으로 즉위하기에 정통성이 부족했지만, 잉글랜드 귀족들을 포섭하고 외교술을 토대로 정복왕 윌리엄 1세 1027~1087가 즉위했다. 그 결과 잉글랜드에 노르만 왕조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잉글랜드를 노르만 왕조가 약 300년 간 통치하는 동안 자연스레 성 미카엘 언덕은 프랑스 영향 하에 있었다. 고해왕 에드워드 이후 또 다른 에드워드인 에드워드 1세가 즉위한 이후 점점 영국과 프랑스 사이는 멀어졌고, 튜터 왕조 때부터 성 미카엘 언덕은 자신만의 자치권을 가지게 되었다.






  오전 9시 30분.


  버스를 타고 성 미카엘 언덕 앞에 자리한 놀이터 앞 역에서 내렸다. 7월 말에 성 미카엘 언덕에 걸어서 들어갈 수 있는 코즈웨이에 맞추어 가면, 물이 빠지는 모습도 보고 아직 물에 잠긴 코즈웨이를 걸을 수도 있다. 오전 7시쯤이었는데, 성 미카엘 언덕에 있는 세인트 오빈 가문의 성의 입장시간 오전 10 시인 것을 감안한다면 지금이 오는 것이 가장 좋은 결정이었다. 망설임 없이 오늘 일정을 확인한 후 9시에 숙소를 나섰다. 이미 물이 빠진, 코즈웨이를 보며 조심조심 걸어갔다. 난 운이 좋게 코즈웨이를 걸어서 들어가, 걸어서 나올 수 있었다. 조금 더 운이 더 좋았다면 작은 모터보트를 타고 섬에 들어가고 나오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을 텐데.. 아쉬움이 스쳤다. 사람 욕심은 참 끝이 없다. 아주 잠깐 물이 드나들며 시시각각 변하는 주변 풍경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다시 물이 차오르기까지 한두 시간 정도 걸리는 게 아니기에 아쉬움은 '언젠가' 채우기로 해두고 사람의 손길과 자연의 손길이 고루 오간 코즈웨이를 걸었다.



St. Michael's Mount 모형



  개관시간에 맞추어 성 미카엘 언덕을 방문한 사람은 생각보다 적었다. 7월은 성 미카엘 언덕에 가장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때이지만, 간조가 된 직후인 지금 사람들은 유독 적었다. 가족끼리, 연인끼리 나처럼 혼자 이곳을 찾은 사람들 휴가를 즐기는 때인데도 말이다. 특히 어디를 가나 아이와 함께 온 여행객이 많이 있었는데, 지금의 모습은 낯설었다. 아마도 이 시간에 유독 눈에 보이지 않는 건 자동차로 영국 일주를 했던 작가 벤 해치가 글을 통해 누누이 말했듯 이리저리 자유분방하게 움직이는 아이들의 행동을 감당하기에 너무 이른 시간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부모님에게는 말이다. 길 위에 사람이 별로 없는 덕분에 군데군데 물이 고인 길 위를 조심히 걸어갔다. 크고 널 같은 돌이 점점 작아져 내 걸음에 여러 돌이 밟히자 성 미카엘 언덕 입구에 도착했다.         



Great Heart

  코즈웨이를 걸어와 매표소에서 표를 끊은 뒤에 바로 성까지 갈 수 있는 건 아니다. 숲길을 따라 제법 올라간 후에 진짜 입구에 들어갈 수 있다. 성의 입구이기보다 요새의 입구처럼 좁고 가파른 곳도 있었다. 과거 젊은 수도사들이 이곳에서 나가지 못하고 짧게는 며칠 길게는 몇십 년간 머물기 위해 이곳에 왔을 때 무슨 생각을 했을까. 예전에 신부가 되기 위해 신학교에서 수학하는 신학생들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다. 세속과 멀어지는 훈련을 거듭 또 거듭하며 사제의 길을 걷는 이들의 모습을 보며 놀랐던 기억이 난다. 몇백 년 전 사제로써 직분을 감당하기 위해 걸어 올라가며 수도승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사제로 수련을 하기 위해 왔지만, 도시와 한참 떨어져 있는 이곳을 감옥처럼 느끼지는 않았을까. 수도원이 어떤 곳에 있는지 잘 모르지만, 이곳은 진짜 수도승들이 수행했던 곳인지는 의문이 들었다. 잉글랜드에서도 서남쪽 끝에 있고, 로마는 물론 프랑스에서도 한참 떨어진 이곳은 수도원의 형태를 띤 유배지는 아니었을까. 불경한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이곳을 오르며 난 소설 <몽테크리스토 백작>이 생각났다.  수도승이 경건하게 마음을 다스린 곳보다, 모함으로 억울하게 수도원에 갇힌 인물이 탈출하기 위해 모험을 시작하는 무대로 더 잘 어울리는 듯싶었다. 신의 종으로써 해야 할 직분을 감당할 준비를 하는 곳이었는지, 혹은 이탈리아의 수도승 마테오처럼 눈엣 가시 같은 사람들을 내쫓는 곳이었을지 혹은 상상의 출발지였는지.  당대 사람들만 알 것이다.



Great Heart

  성으로 사용된 기간보다 수도원이나 요새로 사용된 시간이 더 길기 때문일까. 가파른 길만큼이나 건물은 울퉁불퉁 시간이 툭툭 얹어진 형세였다. 분위기가 천혜의 요새라고 불린 에든버러 성과 비슷하다. 부유한 귀족의 집보다 전투 초소를 오르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요새를 오르는 느낌을 지운 건 바로 그레이트 하트(Great Heart)였다. 코즈웨이부터 깔려있던 돌은 성으로 오르는 길에도 이어진다. 그 돌들 가운데 하트 모양의 돌이 그레이트 하트다. 어린아이들과 함께 그레이트 하트를 찾아 두리번거리는 데 한 아이가 내 발을 가리켰다. 내가 가리고 있어서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머쓱해진 나도 웃고, 발견한 아이도 웃었다. 조금 변명을 해보자면, 이름에 비해 모양도 크기도 그리 그레이트 하지 않았다. 하지만 가파르고 구불구불한 길을 걸을 때 즐거움을 안겨준다는 점에서 그레이트 하트였다.


      

오랜 시간 동안 수도원이었던 이 곳의 모습은 1769년 콘월 지역의 준남작 가문에서 사들이면서 오늘날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지금 섬의 중심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성은 몽생 미셸과 같이 수도원이 아니라 저택에 가깝다. 세인트 오빈은 콘월 지방에서 나는 광물자원을 통해 축적한 것을 토대로 이 성을 사들였다. 하지만 영국 드라마 <다우튼 애비>의 배경이 되는 하이클레어 성(Highclere Castle)과 달리 이곳의 주인은 ‘내셔널 트러스트’다. (하이클레어 성과 같이 아직도 백작이 소유한 경우는 정말 드물다.) 양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은 귀족들에 굉장히 많은 세금을 부과했고, 그로 인해 귀족들은 자신의 사유지를 내셔널 트러스트에 기증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문화 보호 재단에 유지와 운영을 기탁한 경우 건물뿐만 아니라 가구, 집기, 회화, 도자기 등을 함께 기증하여 당시 그대로의 모습을 재연해 두었다. 다만, 그렇다고 하여 우리나라의 궁궐이나 행궁처럼 박물관이나 사적처럼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는 것은 아니다. 세인트 오빈 가족들이 아직도 이 곳에 머물며 성을 관리하고 있다.  



 그 이유는 “1954년 존 프랜시스 아서 세인트 오빈이 내셔널 트러스트와 특별한 계약”을 맺었기 때문이다. 존 프랜시스 아서 세인트 오빈은 “이튼 칼리지와 케임브리지대학교 출신으로 스무 살 때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소식을 듣자마자 참전한 전쟁 영웅으로 남작 작위(Lord St Levan)를 받았으며 하원의원”이었다. 그는 성 미카엘 언덕 내 자신의 영지를 내셔널 트러스트에 소유권을 양도하는 대신에 후손들이 999년 거주할 수 있는 권리를 받았다. 또 그 기간 동안 영리 행위도 가능하도록 계약한 것이다.

 그렇다고 이 성에 세인트 오빈 가문 사람들이 모두 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세인트 오빈 사람들은 근처에 클로 완스의 대저택에 머물고 있다. 2003년 제임스 세인트 오번과 그의 아내 메리 세인트 오번이 자녀들과 함께 이사를 와서 함께 머문다고 한다. 홈페이지에 가면 두 사람이 환하게 웃는 사진을 확인할 수 있다. (참고로, 세인트 오번 가문의 아들의 이름을 붙일 때, 첫째는 존, 둘째는 제임스, 셋째는 에드워드라고 붙인다고 한다.) 거주는 하고 있지만, 준남작 부부를 만나는 건 쉽지 않았다. 운이 좋으면 만날 수도 있다고 하던데. 나는 그렇게 운이 좋은 사람은 아니었다. 그런데 왠지 성 내의 교회에서 예배를 드릴 때, 기도했던 분의 얼굴과 아내분의 얼굴이 닮아 보였는데, 확인할 길이 없다.




이렇게 가파른 성의 서쪽 문이 바로 성의 입구다. 성 마이클 언덕의 건축물 가운데 가장 오래된 구조물로, 세월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1100년대부터 조금씩 다듬어져 완성된 성은 멀리서 볼 때와 가까이서 볼 때 느낌이 사뭇 다르다. 1135년에 만들어져 14세기에 보수공사를 마친 교회는 건물의 중심에 놓여 있어, 맨 처음 이 섬이 어떤 용도로 사용되었는지를 가늠할 수 있게 한다. 빛깔과 형세가 조금씩 다른 건물들에 이어 붙은 모습은 조금씩 다른 결을 가지고 있지만, 햄프턴 코트 궁전(Hampton Court Palace)과 달리 통일성을 가지고 있다. 조금은 투박하지만, 단단해 보이는 건축물은 이 섬이 버텨야 했을 위협이 무엇인지 가늠할 수 있다. 특히 성의 외곽과 성 내부에 놓인 경비 초소와 대포는 한 때 나폴레옹의 함선의 공격을 받아야 했던 굴곡진 역사를 추론할 수 있다.





  좀처럼 초상화를 살펴볼 수 없는 우리나라와 달리, 영국은 초상화를 좋아하는 나라다. “영국인만큼 자신을 포함한 일족, 인연이 있는 사람, 친구의 초상화를 좋아하는 국민은 없다고 한다.” 이건 세인트 오스번 가문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콘월인이었지만 동시에 튜터 왕조 시대부터 19세기까지 일관되게 초상화를 사랑했던 잉글랜드인이었다. 런던이나 궁전 못지않은 대저택을 가지고 있던 내륙의 귀족들처럼 네덜란드나 독일의 유명화가를 데려와 초상화를 그릴 수는 없었지만, 자신의 모습을 회화작품으로 남겼다. 귀족 가문의 집에서 초상화를 많이 볼 수 있는 이유는 자신의 존재에 위엄을 부여하기 위함도 있지만 그보다 역사적인 인물이나 왕족과 인척관계나 깊은 연관관계가 있다는 걸 나타내기 위해서 주로 그렸다고 한다. 하지만 성 마이클 언덕에 보기 드물게 동일한 인물을 그린 초상화의 주인공은 혈통이나 역사적인 상징성을 가진 인물이 아니었다. 그 주인공은 5대 준남작 존 세인트 오빈이 64세가 되어서야 결혼을 할 수 있었던 줄리아나 비니콤이다.


  처음에 줄리아나 비니콤을 보면, 채스워스 하우스(Chatsworth House)에 살았던 공작부인을 떠오른다. 데본셔 공작부인 조지아나 말이다. 2008년 키이라 나이틀리가 주연을 맡았던 <공작부인: 세기의 스캔들>의 주인공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공작부인이다. 데본셔 가문과 견주어도 부족함이 없는 스펜서 가문 사람이었던 그녀는 당대 수상까지 되었던 찰스 그레이(Charles Gray)와 스캔들로 사교계를 떠들썩하게 만든 일화로 유명하다. 조지아나처럼 염문으로 유명하지 않았더라도, 세인트 오빈 가문의 별장과 같은 이곳에 초상화가 2점이 있을 정도라면 유명한 가문의 사람이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내 예상은 제대로 빗나갔다.


  마을 대장장이의 딸이었던 그녀는 존이 어려서부터 학교에서 교육받을 수 있도록 경제적으로 후원했을 만큼 가난한 집안사람이었다. 언뜻, 진 웹스터의 『키다리 아저씨』의 저비스 도련님과 겹쳐 보이지만 존은 그리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14살 때 가문을 물려받은 그는 여러 학문을 익히는 데 탁월해, 20대에 지역의 고위직을 맡았을 뿐만 아니라, 의회에 의원으로 참석했을 만큼 그는 출세가도를 달렸다. 하지만 그는 파리에 머무는 동안 이탈리아 여인과 사이에서 딸을 낳았을 뿐만 아니라, 도박에 빠지며 그동안 쌓았던 명성과 정반대의 명성을 쌓았다. 결국 그는 가문에 엄청난 빚을 남겨 후대에 손자가 그의 빚을 청산한다. 손자가 남작 작위를 받고, 빚을 청산했으니 망정이지 만약 그의 자녀들이 그를 닮았다면 성 미카엘 언덕에서 세인트 오빈 가문의 흔적은 진작에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도시에서 방황하던 존은 고향 콘월에 돌아와서 지역의 니콜스 가문의 딸 마사와 사이에서 5명의 아이를 낳는다. 하지만 그녀와 정식으로 결혼하지 않았다. 이렇게 개인적인 능력은 출중했지만 비도덕적인 삶을 살았던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사람이 바로 줄리아나 비니콤이었다. 존과 줄리아나는 총 9명의 아이를 낳았고, 그가 62세가 되었던 1822년에 결혼식을 올려 정식 부부가 된다. 이 이야기를 책을 통해 확인한 뒤, 아름다운 줄리아나 비니콤의 초상화를 보니 마냥 아름답게만 보이지 않았다. 그림 속에 담긴 그녀의 표정에 복합적인 감정이 보이는 것 같았다.   

  


  투박한 성의 내부 공간에 시선을 끄는 작품이 있는데, 바로 동양풍 도자기다. 실용적인 용도로 사용하기보다, 벽에 걸어두거나 장식장 근처에 놓아둔 모습을 보면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자랑하기 위해서 둔 게 아닐까. 영국에서는 16세기부터 서서히 들여왔던 동양풍 도자기는 귀족들의 집에 이색적인 장식품으로 자리 잡았다. 그중에 중국의 경덕진요에서 만들어진 청화백자, 대형 항아리나 일본 규슈 아리타의 가마에서 만든 아리타 도자기를 특히 좋아했다고 한다. 두 도자기는 희귀하기 때문도 있지만, 유럽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독특한 빛깔과 형태가 귀족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엑시터에 있는 버글리 하우스(Burghley House)에는 일본 도자기 컬렉션이 따로 있을 정도로 16~18세기에 영국 귀족들의 동양풍 도자기 사랑은 남다른 편이었다. 영국인의 동양풍 도자기 사랑은 영국의 남쪽 끝 콘월에도 닿아 있었다. 성 마이클 언덕의 일본 도자기는 일본과 교역을 했던 네덜란드 상인과 교역을 통해 얻었을 것으로 추론해볼 수 있다.


  아쉬운 건 성 내부에 물건의 이름이나 내력을 알 수 있는 자세한 설명이 별로 없다는 점이다. 물론 입구에서 설명이 담긴 도록을 사는 방법도 있지만, 가격이 만만치 않다. 또 오디오 가이드도 없다는 점이 관람객 입장에선 여간 아쉬운 점이다. 런던 대영박물관이나 케임브리지 피츠윌리엄 박물관에서 보았던 일본 도자기와 달리, 이곳에서 보는 일본풍의 도자기는 신기했지만, 그 생각에 대한 답을 이곳에서 찾을 수 없으니 답답했다. 이 곳을 방문했던 어떤 사람은 운이 좋게 단체 관광을 온 사람들을 위한 가이드를 들어서 이 성의 내밀한 이야기까지 다 알 수 있었다고 하는데, 일찍 방문한 나에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성 미카엘 언덕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소는 ‘교회’와 ‘블루 드로잉 룸’이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성공회식 예배를 드려서 더 신기했을지도 모른다. 영국에서 내가 갔던 대성당과는 다른 분위기였다. 마치 성당의 앱스보다 작은 공간이 교회 전부였다. 마치 과거 로마에 있었던 작은 바실리카 형태와 닮아있는 교회는 12세기에 지어져, 14세기에 보수를 거쳤지만 처음 모습에서 많은 것이 달라지지 않았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지진에 무너진 부분을 보수하는 정도에 그쳤다는 정보가 없었다면 수리를 했었다는 사실조차 몰랐을 것이다. 뭉툭하고 소담한 모습이 내가 영국에서 방문했던 교회나 성당 중에 가장 작았지만, 그래서 더 기억에 남는다. 공간을 채우는 오르간 소리는 웅장하거나 위엄 있기보다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히고 경건하게 만드는데 부족함이 없었다. 관광객을 위해 간소한 형태로 예배를 드린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예배는 생각보다 일찍 마쳤다. 일요일에 방문한다면, 참석해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될 것이다.



  응접실인 ‘블루 드로잉 룸’은 하늘색 벽지로 둘러싸인 방이다. 바위를 툭툭 얹어 만든 성의 외관과 가장 이질적인 느낌을 줄 뿐만 아니라 다른 방들과 느낌도 사뭇 달랐다. 다른 방들이 경직되어 있는 것 같다면, 이곳에는 묘한 생동감이 감돌었다. 1846년, 젊은 여왕 빅토리아가 차를 마셨던 방으로 왕실 식구들이 방문하면, 주로 이곳에 머문다고 한다. 관람객에게 공개된 공간 중에 여기만큼, 진짜 사람이 머물 것 같은 분위기가 나는 곳도 없었다. 이곳은 절제미를 중요하게 여겼던 신고전주의 시대와 과거 다양한 장식 기법이 복합적으로 나타나는 빅토리아 시대가 조화를 이루고 있다. 신고전주의의 특징인 좌우 대칭된 모습과 함께 동양적인 곡선미를 살린 문과 벽의 장식은 독특한 멋이 있다. 덕수궁의 석조전 내부의 분위기와 비슷했는데, 아마도 석조전 내의 가구를 영국에서 수입했기 때문이 아닐까. 




  관람의 마지막은 세인트 오빈 가문 사람들의 가족 박물관이었는데, 성 미카엘 언덕 모습을 담은 그림들과 5대 준남작이었던 존의 수장품과 그의 아내였던 줄리아나의 커다란 초상화를 볼 수 있다. 안타깝게 방문했던 날 성의 정원은 휴관하는 날이어서 돌길과 다른 성 마이클 언덕의 아름다운 정원에 들어가지 못했다. 올라올 때와 달리 가벼운 마음으로 내려오는데, 성 미카엘 언덕 위에 있는 성을 방문하기 위해 줄을 서 있는 수많은 인파가 보였다. 제법 좋은 시간에 편안한 관람을 마친 것 같아 뿌듯했다.







<참고문헌>
비싼 잡동사니는 어떻게 박물관이 됐을까?, 이지희, 예경 (2014)

아빠, 우리 언제 집에 가요?, 벤 해치, 김영사 (2016)

영국 귀족의 생활, 다나카 료조,  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2016)

영국 기행, 카잔차키스, 열린책들 (2008)

영국이라는 나라, 고정애, 페이퍼로드 (2017)

영국사, 앙드레 모루아, 김영사 (2013)

성 미카엘 언덕 홈페이지 : https://www.stmichaelsmount.co.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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