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스퍼드(Oxford)'에서
“경들에게 이르노니, 짐은 영국의 그 어떤 땅도 대학에 하사한 것만큼 잘 사용되고 있는 곳은 없다고 생각하노라. 그러니 우리가 모두 죽어 흙으로 돌아간 뒤에도 나라가 잘 다스려질 수 있도록 대학을 보존케 하라.”
헨리 8세 (Henry VIII)
옥스퍼드. 역시, 대학도시다웠다. 대부분의 건물은 오전 10시에 문을 열어 오후 6시면 문을 닫았다. 정확하게 8시간. 허락된 그 시간만큼은 옥스퍼드에서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덕분에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속 시계토끼가 된 것처럼 내가 가야 할 길만을 쫓아 부지런히 움직였다. 틈틈이 손목시계를 바라보는 것까지. 시계토끼와 다를 바가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지 않을까. 바로 그 시계토끼가 태어난 곳을 여행하니 말이다.
시간을 빠르게 흘렀다. 볼 것도 많고 느낄 것도 많은 이 대학 도시는 끊임없이 나를 움직이게 만들었고, 끊임없이 나를 생각하게 만들었다. 시계토끼와 이상한 나라와 거울 나라에 이곳저곳을 여행한 앨리스를 오가기 바빴다. 그래서 점심시간이 되자마자 배고픔이 밀려왔다. 점심시간의 옥스퍼드 거리는 관광객으로 붐볐다. 간단한 샌드위치로 점심을 먹기로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옥스퍼드는 건물 한 곳 한 곳이 별처럼 볼거리가 한가득 담긴 별천지였으니 말이다.
영국의 시인이자 비평가였던 매튜 아널드(Matthew Arnold)는 교편을 잡았던 옥스퍼드를 이렇게 표현했다.
꿈꾸는 첨탑들의 도시
City of dreaming spires.
그의 말을 확인할 겸 높이 솟은 첨탑들을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세인트 메리 더 버진(St. Mary the Virgin)의 전망탑으로 향했다. 옥스퍼드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명소답게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15분 정도 기다린 뒤 좁은 계단을 올라 전망탑에 도착했다. 빙 돌아가며 확인한 옥스퍼드의 풍경은 중세 고딕 양식의 건물들이 채운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영국 최초의 대학이라는 그 명성을 건물로 남긴 듯, 역사적 세월을 지금까지 보존한 건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크고 작은 칼리지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난 뒤, 그 사이로 채워진 작은 집들, 그리고 그 사이에 자리한 좁은 골목들의 모습이 눈에 보였다. 골목길이 만든 작은 여백을 제외하고 집들의 지붕 굴뚝의 원통들과 칼리지의 첨탑들이 이어져 만든 행렬은 푸른 언덕 위에 세워진 옥스퍼드의 땅과 그 높이가 다른 또 다른 지평선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보다 작은 첨탑들이 하늘을 향해 그 첨탑들이 솟아오른 모습을 이어나가며 전망탑을 한 바퀴 돌았다. 그리고 가장 인기 있는 곳에 서서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이 전망탑에 올라온 사람 10명의 10명이 다 찍는다는 그 모습을 나도 기념으로 남겼다.
바로, 세인트 메리 더 버진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물, 사실 바로 앞에 있는 래드클리프 도서관(Radcliffe Camera)이다. 정면에서는 볼 수 없지만 그 너머에 보들리언 도서관(Bodleian Library)도 살짝 측면에서 보니 보이는 듯했다. 좀처럼 외부인이 들어가기 쉽지 않은 그곳에서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들이 오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 역시 어른들이 보기엔 "요즘 친구들"이란 혀 끌는 소리를 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옛날부터 그래 왔듯, '요즘 아이들'소리는 100여 년 전에도, 그 훨씬 전에도 있었다. 그들의 선배였던 매튜 아놀드가 “뒷북만 치는 곳”이라는 냉소적 비판을 했던 이들도 그 이야기를 사람들이 잊게 만들었을 정도로 옥스퍼드의 명성은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그 명성은 전 세계가 인정하고 있다. 그 명성이 앞으로도 이어질 것을 의심하지 않도록 세계 지식 발전에 기여하는 지성인이란 무엇인지를 스스로 체화하고 있는 사람들의 발걸음은 꽤나 분주했다. 그건, 지금 시간이 12시쯤이라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오늘날 여러 버전의 성서 번역본이 있다. 그중에 영국 왕과 관련된 것이 있었으니, 바로 <킹 제임스> 버전이다. 바로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와 런던의 학자 약 50명이 참여해 성경을 번역하는 프로젝트를 지원했던 왕의 이름 제임스 1세의 이름을 딴 성경이다. 성경 번역 프로젝트를 후원했다는 것에서 알 수 있듯, 제임스 1세는 책에 관심이 많은 왕이 아니었을까 싶다. 책을 사랑한 건 세종대왕과 비슷해 보이지만, 전왕이었던 엘리자베스 1세에 가려진 그의 명성을 보면, 문종과 같지 않을까 싶다. 물론, 이건 내 생각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이 하나 있다. 그를 가리켜 '학자'라고 부르는데, 그 분야가 '악마'라는 점이다. 이름하여, '악마 학자'라고 하는데, 틀린말도 아닌게 그는 『악마론(Deamonologie) 』(1592)를 쓸 만큼 "악마의 힘이나 마녀의 술책에 대하여 소상하게 알고 있었다"라고 한다. 그리고 책에 "프로테스탄트 시대를 맞이해 잉글랜드에 악마의 수하인 마녀나 요술사가 종교개혁 이전보다 더 득시글거린다. 가톨릭교도는 그런 자들과 손잡고 프로테스탄트를 공격하라고 노리고 있다. 따라서 신에게서 왕권을 부여받은 국왕이야말로 마녀를 탄압하고 일소해야 한다."라고 썼다고 하니, 그가 얼마나 심취했었는지 알 수 있다. 잉글랜드에서 진행된 마녀사냥의 만행이 최고조를 달했을 때가 엘리자베스 1세와 제임스 1세 기간이라고 하니, 그가 <킹 제임스> 버전을 편찬한 또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닌가 의심이 든다.
그 분야가 독특했지만, 학문에 관심이 많았던 제임스 1세는 1621년 보들리언 도서관에 와서 이런 말을 남겼다. “내가 왕이 아니라면 나는 기꺼이 옥스퍼드 맨이 되고 싶다. 그리고 내가 죄수라면 오직 한 가지, 도서관 감옥에 집어넣어 달라고 빌겠다. 그래서 이곳에 있는 훌륭한 작가들의 사실에 묶여 있고 싶다.”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왕이 아니라 왕자로 작위를 받는다면 이곳의 작위를 받고 싶다고 했고, 자신이 죄수라면 이곳에 넣어 달라고 부탁하겠다니. 자연스레 이 도서관이 도대체 어떤 곳이길래 이렇게 있고 싶어 했을까 라는 생각이 들어,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그래서 영국에 오기 전, 영국에서 꼭 가고 싶은 도서관이 세 곳 중 하나로 보들리안 도서관을 첫 번째로 넣었다. 하지만 슬프게도 당일 도서관 내부 투어는 큰 인기로 오전 11시 반에 일찍이 마감되었다. 아쉬움을 채울 겸 보들리안 도서관의 투어가 시작되는 곳에 걸어갔다. 입구가 이렇게 웅장하고 멋있는데, 내부는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고, 아쉬움이 밀려와 살짝 온 것을 후회하기도 했다. 아쉬움을 한가득 안고, 해리포터가 록허트 교수에게 어둠의 마법 방어술을 배운 곳과 같은 넓은 방에서 투어를 시작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다 씁쓸하게 돌아서야 했다. 그 넓은 공간을 조용하게 울리는 가이드의 안내말이라도 들으려 귀를 세웠지만, 내 마음을 알 리 없는 가이드는 분주하게 관광객을 이끌고 도서관 안으로 사라졌다.
이곳 보들리안이란 이름은 토마스 보들리 경에서 따온 이름이라고 한다. 엘리자베스 1세 치하 때 머튼 칼리지에서 그리스어와 히브리어를 가르치던 교수였던 그는 이후 외교관으로 활약했었다. 엘리자베스 1세 시절에 유럽 대륙과 영국 사이에서 외교적으로 훌륭한 역할을 톡톡히 했다고 전해진다. 그렇다면, 왜 보들리 경의 이름이 이 옥스퍼드에 남았을까. 모든 일의 시작이 그러하듯 보들리안 도서관의 시작이 지금처럼 웅장하지 않았다. 당연히 처음부터 이렇게 장대한 건물로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보들리안 도서관은 왜 보들리안 도서관이라고 이름이 붙게 되었을까?
보들리안 도서관 이전에 옥스퍼드에는 듀크 험프리 도서관이라는 도서관이 있었다. 1488년 헨리 5세의 동생이었던 험프리 공작이자 옥스퍼드 맨이었던 글로스터 공작이 기증한 장서를 보관했던 곳이었다. 한마디로, 오래된 필사본을 보관하는 장소로 활용했던 곳을 도서관으로 이용했던 것이다. 하지만 본래 목적이 장서를 보관하는데 집중했던 탓에. 점차 인쇄술의 발전에 발맞춰 새로운 책을 구입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점을 알아채지 못했다. 결국 1550년에 듀크 험프리 도서관은 조용히 문을 닫게 된다.
그로부터 52년 뒤, 보들리 경이 자비를 들여 신학부 건물 위에 있는 방을 보수하여 2000여 권의 책과 함께 새롭게 도서관 문을 열었다. 이때 정식 명칭으로 Bodley 's Library를 사용했던 것이다. 이게 바로, 옥스퍼드 최고의 명소, 보들리안 도서관의 시작임을 그때, 보들리 경은 몰랐을 것이다. 원래 책을 좋아했던 보들리 경은 외교관으로 유럽 대륙을 방문하며 그때 인상 깊었던 곳 중 하나가 바로, 도서관이었다. 유럽 대륙의 된 거대한 홀로 된 도서관을 보고 그는 적극적으로 옥스퍼드에 도입한다. 이때부터 이전에 책장이 공간에 중심에 놓던 방식에서 벽면에 세우는 형태의 도서관을 만든 것이다. 그리고 벽에 책을 놓아두는 방식의 도서관은 보들리 경이 영국에 최초로 도입한 것이라고 전해진다.
책이 벽에 붙고, 사람이 중심이 되어 도서관 공간을 향유하는 구조를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는데, 아쉬웠다. 내가 직접 확인하지 못했지만 1610년부터 1612년까지 건축한 익랑 ‘아츠 엔드(Arts End)와 1624년부터 1636년까지 12년에 걸쳐서 만든 서쪽 익랑의 셀던 엔드(Seldon End)에 이 방식으로 보들리안 도서관을 지었다고 한다. 꽤 멋스러운 책장을 눈으로 보고 싶었는데, 그 바람은 다음에 채우기로 했다. (참고로 이 모습은 보들리안 도서관 투어에서 직접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 꼭 확인해보길 바란다.)
보들리 경은 새로운 도서관 건축 방식, 책의 배치 방식뿐만 아니라, 도서관에 희귀본을 기증받는데도 많은 관심을 보였다. 도서관에 보다 많은 수장품을 늘리는데 관심을 둔 이유는 자기 자신이 희귀 서적에 대한 관심이 많은 수집광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수집품을 자신의 소유로 홀로 간직하지 않고, 아낌없이 함께 공유하고 싶은 마음으로 도서관에 기꺼이 기증을 했다. 그의 마음 자체가 공공 도서관이 아닐까 싶다.
보들리 경이 한 훌륭한 일은 정말 많지만, 가장 훌륭한 점은 도서관이 지속가능성을 확보했다는 데 있다. 앞서 소개한 듀크 험프리 도서관이 새로운 장서를 들이지 못해 점점 보관 창고화 되는 과거를 반복하지 않도록 런던의 도서상인연합으로부터 영국에서 출간되는 모든 서적을 1권씩 납품받을 수 있도록 하는 납본권을 얻었다.
재미있는 점은 여기서 케임브리지에서 출간된 책은 예외였다는 점이다. 지금도 보들리안 도서관은 영국 도서관(British Library)과 케임브리지 도서관과 함께 영국의 3대 납본 도서관 중 하나다. 보들리 경의 노력 덕분에 보들리안 도서관은 영국 내에서 두 번째로 많은 장서를 보관하고 있는 도서관이 되었다. 놀라운 점은 여전히 도서관은 대부분의 책을 서가에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더 놀라운 점은 이 많은 책들을 절대로 대출해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과거에 찰스 1세와 올리버 크롬웰조차 대출을 거부당했다고 하니, 앞으로도 보들리안 도서관에서 책을 빌릴 수 있는 일은 없을 것 같다. 물론, 디지털화된 자료는 조금 다르겠지만.
옥스퍼드에서 가운데 그 장소에 대한 자부심이 가장 강한 곳을 꼽으라면 망설임 없이 크라이스트 처치(Christ Church)를 꼽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옥스퍼드에 대성당과 자기 미술관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칼리지는 없으니 말이다. 그러니 크라이스트 처치 칼리지를 빼고 자부심을 논할 수 있을까? 참고로 옥스퍼드에서 처음으로 입장료를 받는 칼리지였다고 한다면, 더 근거가 필요하지 않을 듯싶다. 더 필요하다고 한다면, 13명의 영국 수상과 11명의 인도 총독이 이곳에서 수학했다고 말해주면 되지 않을까.
또 한 가지 일화를 말해보자면, 직접 귀로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저녁 9시 5분에 되면 크라이스트 처치의 톰 타워에서는 종이 101번 울린다고 한다. 옥스퍼드는 세계의 시간의 기준인 그리니치 천문대에서 서쪽으로 약 1도 정도 떨어져 있기 때문에 왕국의 시계가 9시 5분이 될 때 옥스퍼드가 9시가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대부분의 국가가 표준시를 정하고 이를 따르는 요즘. 아니, 그 정한 것에 의심을 하지 않는 때에. 이 이야기는 피식 웃고 마는 이야기이지만, 크라이스트 처치가 얼마나 우월하다는 자부심을 강하게 가지고 있는지를 가늠할 수 있게 한다.
그래서일까, 크라이스트 처치에서는 칼리지를 하우스라 한다. 그리스도의 집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지만 그보다 앞서 자신 칼리지만의 특별함을 내세우기 위해서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런데 크라이스트 처치는 귄위 있고 딱딱한 이미지를 단번에 바꾼 인재까지 있었다.
시간 계산까지 철저한 이 하우스의 젊은 수학 교수이자, 전 세계적으로 많은 사랑을 받은 소설의 작가가 그 주인공이다.
시계를 보며 바쁘게 달리는 시계토끼를 따라가 모험을 하는 한 소녀의 이야기,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만든 루이스 캐럴도 크라이스트 처치 출신이었다. 크라이스트 처치는 들어가 보지 않아도 앨리스 숍을 찾아가는 사람들은 제법 많다는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었다. 기왕이면 가게 내부에 들어가 보면 좋겠다. 분명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참고로 앨리스 숍 내부에서는 사진을 찍는 걸 금하고 있다. 하지만, 아기자기한 소품과 앨리스 숍에서만 살 수 있는 물건이 무엇인지 열심히 둘러보면 어느새 양손이 무거워지는 걸 느낄 수 있다. 내가 그랬다. 편지지 세트, 엽서 세트, 잼이랑 사탕 그리고 쿠키를 사고 나니 어느새 손이 제법 무거워졌다. 많은 사람들이 크라이스트 처치를 방문한 후 앨리스 숍을 간다. 하지만, 옥스퍼드 관광 일정을 짤 때, 큰 도움을 주셨던 교수님께서 방문 전에 들리라고 권하셨다. 그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들어가는 입구와 앨리스 숍은 가까운데, 많은 사람들이 나가는 출구와 앨리스 숍은 멀기 때문이다. 가볼만한 곳이지만 먼길을 돌아서 가기엔 시간이 아깝지 않은가. 미리 들리기를 추천한다.
관광객은 이용할 수 없는 커다란 출입구 위에 한 동상이 보인다. 바로, 토마스 울지 추기경이다. 옥스퍼드에 수학했으며, 크라이스트 처치를 처음 계획한 사람인 그가 그 입구에 올라서 있었다. 그는 요크 대성상의 대주교로 헨리 8세의 신임을 받았으며 영국의 대법관이었다. 한마디로 그는 우리나라식으로 말하자면, 재상 그 이상이었다.
왕의 두터운 신임을 얻었던 그는 옥스퍼드 내의 어느 칼리지보다 뛰어난 칼리지를 세우고자 했다. 하지만 1592년 앤 불린 과 세기의 스캔들의 주인공이었던 헨리 8세의 결혼을 교황에게 승인을 받지 못하면서, 그는 실각하고 만다. 토마스 울지 추기경은 식당으로 사용될 홀(The Hall)을 포함해 톰 퀴드(Tom Quad)의 3개의 홀이 반쯤 지어졌을 때 쫓겨나고 만다. 이로 인해 그는 “대학을 짓기 시작했지만 완성한 것은 겨우 식당 하나”라는 조롱을 받았다고 한다.
사실이라 할 말은 없지만, 그 시작을 열었던 것이 자기라는 걸 아무도 몰라줄까 봐 그런 걸까. 바로, 크라이스트 처치의 입구 톰 타워(Tom Tower) 문루에 있는 그의 동상은 조금 서글퍼 보인다. 그 문루의 문지기로 서 있는 울지 추기경 조각상 표정에서 이 건물의 완성을 보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전해지는 듯싶다. 이젠 오랜 시간이 지나 그가 크라이스트 처치의 크기를 결정했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이 잊어버린 듯하다. 그는 '겨우' 식당 하나를 만들었지만, 주변 공간들의 규모를 상상할 수 있었던 그의 안목만은 높이 평가해야 하지 않을까.
톰 퀴드의 안뜰의 길이는 약 80미터로 옥스퍼드 어느 칼리지보다 길다. 톰 퀴드의 톰 타워(Tom Tower)는 세인트 폴 대성당을 재건축한 건축가 크리스토퍼 렌(Ser. Christopher Wren)이 맡았다. 노란 잿빛의 고딕 양식의 건물의 가장 높이 있는 팔각 탑을 덮은 돔은 대화재로 소실된 세인트 폴 대성당의 거대한 돔의 모습이 겹쳐 보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영국적인 바로크와 고딕 양식의 혼합 건축 양식을 보여주며, 그의 첫 번째 신고딕 양식의 건축물로 그에게도, 영국 건축사에 있어서도 기념비적인 건물이다. 세인트 폴 대성당의 웅장한 바로크 건축 양식의 시작이 된 건물이라고 생각하니, 더 웅장해 보였다. 덕분에 일그러진 진주라는 바로크의 뜻이 조금도 떠오르지 않는다. 뾰족한 첨탑이 아닌 촛불 모양 돔은 마치 러시아의 성 바실리 성당의 돔과 닮아 있다. 고딕 양식의 건물과 어울리는 듯 어울리지 않는 듯, 어울리는 그 오묘함이 크라이스트 처치의 톰 퀴드의 풍경을 재미있게 만들어준다. 크리스토퍼 렌이 돔을 독특하게 만든 이유가 그 오묘함에 담겨 있다.
톰 타워에는 그레이트 톰(Great Tom)이라는 이름의 종이 달려있다. 이 종으로 루이스 캐럴은 리델 가의 소녀들과 종종 놀러 가곤 했다고 한다. 지금은 들어갈 수 없는, 참나무로 만든 나선형 계단을 올라가 종이 있는 곳까지 올라갔다고 한다. 그리곤 지팡이로 종을 툭 건드리면 종은 묵직하게 깊이 울리는 사자의 울음소리를 냈다고 하는데, 이를 <거울 나라의 앨리스>에선 “마치 커다란 종처럼 둔탁하고 공허한 목소리로”라고 반대로 이야기를 썼다.
크라이스트 처치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공간은 바로 어떤 수식도 필요 없는 더 홀(The Hall)이다. 더 홀은 J. K. 롤링의 <해리포터> 시리즈를 영화화했을 때 호그와트의 대강당의 무대로 사용되었던 곳이다. 영화 속 규모를 상상하고 가면 생각보다 작은 크기에 실망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반질반질 윤이 나는 원목의 식탁과 의자와 벽을 둘러싼 초상화들로 채워진 방 자체는 호그와트의 대강당과 달리 아늑하지만, 크기보다 더 큰 웅장함을 뿜어낸다.
원목 가구와 벽과 달리 좀 더 짙은 나무 색의 천장은 중간중간 금빛으로 수 놓인 몰딩 장식으로 시선을 끌어당긴다. 그리고 천장에서 시선을 내려 창을 보면 스테인드글라스가 눈에 보인다. 그중 내 시선을 끈 창은 아인슈타인의 스테인드글라스였다. 재기 발랄한 그의 표정이 살아있는 스테인드글라스가 옥스퍼드에 있는 이유는 193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인슈타인은 1931년부터 1933년까지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상대성 이론에 대한 강의를 했다. 그리고 그 후 명예박사 박사 학위를 받았기에, 엄연히 그는 옥스퍼드 대학교의 동문이다. 옥스퍼드에 아인슈타인의 흔적을 찾고 싶다면, 과학박물관으로 가도 좋다. 과학박물관에는 아인슈타인이 필기를 한 칠판이 벽에 걸려있다.
더 홀의 모든 공간은 크라이스트 처치와 관련된 이야기가 녹아진 곳이다. 마치, 위패를 모셔둔 사당과 같은 느낌이다. 크라이스트 처치의 명성을 높여준 동문들의 모습을 장식해둔 것이다. 사당에 모신 위패 역할은 스테인드글라스와 초상화들이다.
더 홀의 수많은 초상화들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한스 홀바인이 그린 헨리 8세 초상화다. 물론 이 그림은 국립 초상화 박물관에서도 볼 수 있는데, 이곳에 있는 것과 초상화 박물관에 있는 것 모두 모작이다. 원작은 화이트 홀에 있었는데, 안타깝게 손실되어 없어졌다고 한다. 헨리 8세의 주변에는 크라이스트 처치의 자랑스러운 동문들의 초상화가 있다. 이 초상화들은 로렌스, 밀레, 게인즈버러 등 거장들이 그린 그림들이 고급스러운 금빛 액자틀에 끼워져 있어, 마치 국립 초상화 박물관의 옥스퍼드 관을 보는 듯 느낌이 든다. 수많은 사람들이 걸려있지만 거의 대부분이 남자들이고 영국의 두 명의 엘리자베스 여왕(엘리자베스 1세, 엘리자베스 2세)의 초상화 자리를 지키고 있다. 물론 두 사람은 왕실 감독관의 자격으로 이곳에 방문객으로 포함되어 걸린 것으로, 컬리지를 빛낸 선배로 걸린 것은 아니다. 옥스퍼드에서 가장 자부심이 강한 곳에 과연 어떤 여성 동문이 걸릴지 궁금해졌다. 그 모습을 내가 내 눈으로 확인할 수 있을까?
더 홀에서 분위기를 만드는 것은 바로 테이블과 그 위에 스탠드다. 신고전주의 양식의 테이블과 의자는 더 홀의 분위기를 아늑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그 자리에서 보이는 풍경과 장소가 가지는 의미를 통해 볼 때 식사를 하는 테이블이 더 특별해 보인다.
더 홀과 같이 칼리지 홀에 있는 테이블을 가리며 ‘하이 테이블(high table)’이라고 부른다. 하이 테이블은 스튜던트(크라이스트 하우스에서는 펠로를 스튜던트라고 부른다.)들과 손님들이 함께 저녁식사를 하는 테이블이었다. 이러한 하이 테이블은 영국과 영국의 영향을 받은 케임브리지, 런던 대학교, 맨체스터 대학, 토론토 대학의 트리니티 칼리지 등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하이 테이블이 특별한 이유는 디너파티 때문이다. 하이 테이블에서 하는 디너는 격식을 갖춘 명예로운 식사 자리로 알려져 있다. 그렇기에 하이 테이블의 식사에 초대받을 경우 재킷이나 학위 가운을 입는 것이 예의가 아닌 필수라고 한다. 리처드 도킨슨의 자서전 2권에 그의 70번째 생일을 맞이해 베일리얼 칼리지의 홀에서 디너파티를 하는 사진이 있다. 아늑한 분위기 속에 100여 명의 사람들이 식사를 나누고 대화를 나누는 파티 문화는 단 한 장의 사진 만으로 그 자리가 얼마나 특별한지 전해준다. 옥스퍼드의 홀 가운데 가장 유명한 더 홀의 하이 테이블 디너의 자리를 그 사진과 함께 상상해볼 때, 굉장히 두근두근 설레었다.
high라는 이름 때문인지, 하이 테이블 디너의 자리에 대한 품격이 자연스레 떠오르는데, 스페인 작가 옥스퍼드의 올 소울스 칼리지를 배경으로 한 <올 소울스>라는 소설을 쓴 하비에르 마이아스는 명칭이 단순히 위치가 높이 있어 나온 것일 뿐 음식과 대화의 품격과는 무관하다고 했다. 하지만 과거 케임브리지의 트리니티 칼리지에 다닌 바이런은 교수들과 함께 하이 테이블에서 식사를 할 때면 마차에 제복을 입은 하인들까지 대동하였다고 하는데, 과연 그렇지 않다고 할 수 있을까?
물론 바이런이 케임브리지를 다니던 19세기 초반에 대학 내 귀족적 특권이 남아 있었던 때에 저녁 만찬을 즐기던 하이 테이블의 성격과 오늘날은 완전히 다를 것이다. 하지만 좀처럼 방문하기도 힘들고, 크라이스트 처치 칼리지를 빛낸 스타들의 흔적과 앞으로 이 칼리지를 빛내거나 빛낼 후학을 지도하는 교수들과의 하이 테이블 디너에 참석한다는 건 혹은 만찬을 연다는 건 여전히 명예로운 일일 것이라고 확신한다.
여행을 할 때 쫓기듯 다니고 싶지 않았는데. 옥스퍼드 일정은 누군가에게 쫓기듯 다니기 일수였다. 맛있는 식사도, 부지런히 걸었던 다리에게 휴식도 주지 못한 채 돌아다녔다. 그럼에도 챙기지 못한 것들이 많아 아쉬움이 물밀듯 마음에 밀려들어왔다. 그 정점을 찍었던 순간이 바로, 크라이스트 처치의 더 홀을 빠져나올 때였다.
하지만 여행에 돌아와 옥스퍼드에서 찍은 사진과 틈틈이 남긴 메모를 보니, 마음이 달라졌다. 그 한정적인 시간이 나를 따라다녔기에 나는 끊임없이 보았고 끊임없이 생각했고 끊임없이 기록할 수 있었다. 내가 알고 간 사실을 확인하고, 몰랐던 정보를 찾아냈으며, 그 질문들 덕분에 여행을 다녀온 지금 어느 곳을 다녀왔을 때보다 큰 풍요로움을 느낀다.
"영감의 원천은 '마감'이다."
게임회사 아타리의 창업자로 미국인 사업가이자 소프트웨어 개발자인 놀란 부쉬맨이 남긴 말이다. 스티브 잡스의 유일한 상사로 알려진 그의 말을 보니, 영감뿐만 아니라 여행도 마찬가지란 생각이 든다. 끝이 있기에, 한정적인 것이 바로 '여행'이다. 끝이 없이 이어지는 건, 여행이 아닌 일상이다. 일상과 닮은 여행을 즐기는 사람들도 있지만, 나는 옥스퍼드를 여행답게 즐겼다. 그리고 옥스퍼드 여정에서 아쉬움을 안고 돌아섰기 때문에, 그때 보지 못한 것을 알아보고 찾아보며 글을 쓰는 브런치 글쓰기 여행을 즐길 수 있었다. 그리고 옥스퍼드 글을 하나, 마무리하는 지금 언제 내가 옥스퍼드를 갈 수 있을지 상상하며, 또 다른 시작을 꿈꾸고 있다.
옥스퍼드. 꿈꾸는 첨탑의 도시는 꿈같은 시간을 부르는 꿈같은 도시가 맞았다.
참고문헌
영국적인, 너무나 영국적인, 박지향, 기파랑 (2006)
옥스퍼드 & 케임브리지, 다나카 료조, 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2016)
왕으로 만나는 위풍당당 영국 역사, 아케가미 슌이치, 돌베개 (2018)
영국 기행, 카잔차키스, 열린책들 (2008)
영국사, 앙드레 모루아, 김영사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