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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강 Feb 13. 2018

살아남는 법을 가르쳐 주마 - 존재의 세가지 거짓말

아고타 크리스토프/ 까치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1부) - 비밀 노트>

첫 날, 할머니는 말했다. 너희에게 사는 법을 가르쳐주마.

우리는 할머니에게 사는 법을 배우는 대신 스스로 사는 법을 깨치기로 했다. 우리가 믿을 건 우리밖에 없으니까. 우리는 쌍둥이였다. 우리가 살던 대도시는 시도 때도 없이 폭격이 쏟아져서 엄마는 우리를 소도시 외딴 마을 할머니 집에 맡겼다.     


우리는 몸을 단련하기로 했다. 할머니는 빗자루나 행주, 손으로 우리를 때렸고 다른 사람들도 우리를 때렸다. 때리면 맞아야 한다. 하지만 눈물은 흘리지 말아야 한다고 우리는 다짐했다. 몸을 단련하면, 울지 않을 수 있다.

우리는 서로의 뺨을 때렸다. 볼이 벌겋게 부풀 때까지. 그리고 주먹으로 서로를 때렸다. 허리띠로 때리기도 했다. 우리는 서로를 때리고 맞으면서 말했다. 하나도 안 아프다. 구타의 강도를 점점 높였다. 아파서 눈물이 났다. 그래도 우리는 말했다. 하나도 안 아프다. 그러자 어느 순간부터 정말 아프지 않았다. 우리는 살아남는 법 하나를 배웠다.


할머니는 우리를 개자식들이라고 불렀다. 다른 사람들도 욕설을 퍼부었다. 그런 말을 들으면 얼굴이 붉어지고 몸이 떨렸다. 우리는 정신도 단련하기로 했다.

우리는 마주 보고 앉아 서로에게 욕을 했다. 우리가 아는 모든 나쁜 말을 서로에게 퍼부었다. 엄마는 우리를 귀여운 것들, 내 사랑, 내 행복이라고 불렀다. 욕을 들으면 엄마가 해주던 말들이 떠올라 눈물이 났다. 우리는 엄마가 해주던 말들을 잊어야 했다. 욕을 들어도 아무렇지 않아지자 엄마가 해주던 좋은 말들을 서로에게 해주는 훈련을 했다. 그러자 그 말들도 의미를 잃었다. 엄마가 해주던 좋은 말을 떠올려도 아무 감정이 들지 않았다. 우리는 살아남는 법 또 하나를 배웠다.


우리는 구걸하는 연습을 했다. 사람들은 불쌍하다며 동전이나 과자, 초콜릿을 주었다. 우리는 그것들을 돌아오는 길에 버려버렸다. 머리를 쓰다듬어 준 사람도 있었는데, 그건 버릴 방법이 없었다.


굶주림에 익숙해지기 위해 단식훈련을 했다. 뭔가를 죽이는 데 익숙해지기 위해 동물을 죽이는 잔혹훈련을 하고, 땅바닥에 드러누워 몇 시간씩 움직이지 않는 부동자세 훈련을 했다. 우리는 그 훈련들을 하나씩 돌아가며 하루도 거르지 않고 해냈다. 우리는 살아남는 법을 스스로 깨우쳐갔다.  

   

우리는 놀지 않았다. 일하고, 우리를 단련하는 훈련을 했다. 그리고 공부를 했다. 살아남기 위해 산수를 하고 암기연습을 하고, 사전으로 낱말 뜻을 익히며 새 단어와 비슷한 말과 반대말을 배웠다.


가장 중요한 공부는 작문이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작문 제목을 정해주었다. 두 시간 동안 주어진 주제로 작문을 하고, 작문을 마치면 서로의 글을 바꿔 보며 평가했다. 평가기준은 딱 하나였다. 작문 내용이 진실인가.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것들만 적어야 했다. 보거나 듣거나 한 일들만을.


우리는 암흑세계에서 살았다. 온갖 폭력과 악행이 펼쳐지는 암흑세계. 짐승보다 못한 온갖 일들이 마을에서 벌어졌다. 우리도 그 일에 가담했다. 누구도 우리에게 이곳은 지옥이라고 말해주지 않았다. 그러므로 작문에는 진실만을 적어야 했다. 우리는 작문 노트를 다른 사람들이 찾지 못하는 곳에 숨겨두었다.


우리는 사는 법을 배우기 위한 마지막 훈련을 실행하기로 했다. 한 명은 국경을 넘고 한 명은 이곳에 남아 각자 혼자 살아가는 것. 우리는 태어난 후 한 번도 떨어져본 적이 없고 서로가 서로에게 피부이자 심장이며 혈관이었지만 한 명은 국경을 넘고 한 명은 남았다. 우리는 피를 흘리듯 서로를 서로에게서 떼어냈다.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2부) - 타인의 증거>

쌍둥이 클라우스가 국경을 넘어 떠난 뒤 루카스는 할머니 집에 남았다. 할머니는 죽고 클라우스는 국경을 넘어 떠났으니 루카스는 혼자였다. 피를 흘리듯 서로를 서로에게서 떼어낸 후 루카스는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일을 하며 보냈다. 하지만 먹지 못했다. 뭔가를 먹으면 바로 토했다. 물을 너무 줘서 마당에 키우던 야채들이 모두 썩어버렸다.


클라우스는 떠났지만 다른 사람들을 만났다. 성당의 신부를 찾아가 매일 밤 체스를 두며 쌍둥이와의 이별을 극복하고, 갈 곳 없는 야스민과 야스민의 불구 아들 마티아스를 집에 들여 보호자가 되어주었다. 야스민의 아빠는 아내가 죽자 야스민의 이모인 처제를 한 집에 들여 살았다. 야스민의 이모는 야스민 아빠를 사랑했다. 하지만 야스민 아빠는 야스민을 사랑했다. 야스민도 아빠를 사랑했다. 야스민은 임신했고, 아버지의 아들인 마티아스를 낳았다. 야스민 아빠는 감옥에 갇혔다. 마을사람들이 모두 야스민을 손가락질해도 루카스는 개의치 않았다. 야스민을 사랑하지는 않았지만, 야스민의 아들인 마티아스는 사랑했다. 마티아스는 못 생기고 불구인데다 조금도 고분고분하지 않았지만 자기 자식처럼 그 애를 사랑했다.   


클라라를 만나 사랑에 빠지기도 했다. 대역죄로 몰려 교수형에 처해진 남편 때문에 하루 밤새 머리가 온통 하얗게 새버린 클라라. 루카스보다 스무 살은 많은 클라라. 엄마를 떠올리게 하는 클라라. 바라보기만 해도 루카스를 기분 좋게 하던 클라라. 도서관에서 금서를 처분하는 일을 하는 클라라. 처분해야 할 금서들을 읽는 클라라. 하지만 결국 클라라도 떠났다.


불면증에 시달리는 알코올중독자 빅토르도 있었다. 그는 루카스에게 말했다. 모든 인간은 한 권의 책을 쓰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다고, 자네도 책을 한 권 쓰라고. 글을 쓰겠다는 꿈이 있었지만 하루 종일 술을 마시느라 글은 한 줄도 쓰지 못했던 빅토르. 글을 쓰기 위해 살던 곳을 떠나 누나가 사는 곳으로 옮겨갔지만 그는 도무지 뭘 써야 할지 몰랐고, 술과 담배를 금지하는 누나 밑에서 자유를 저당 잡힌 채 하루하루를 보내다 결국 그는 누나를 목 졸라 죽였다. 그리고 죽은 누나의 시체 옆에서 브랜디를 마시고 담배를 피우며 타자기를 두드리면서 글을 썼다. 한 줄도 쓰지 못했던 글이 누나를 목 졸라 죽이고 나자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감옥에 갇힌 빅토르는 말했다. 마침내 내 책을 쓸 수 있게 됐다고.     


쌍둥이와 살던 시절처럼, 루카스는 암흑세계에서 살았다. 온갖 폭력과 악행이 펼쳐지는 암흑세계. 짐승보다 못한 온갖 일들이 벌어졌다. 하지만 악행을 저지른 모두가 연민의 대상이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가해자이면서 피해자였다. 사랑은 어긋나고 모두가 떠났다.


누구도 루카스에게 이곳은 지옥이라고 말해주지 않았다. 그러므로 글에는 진실만을 적어야 했다. 루카스는 글로 모든 걸 적었다. 클라우스와 할머니와 야스민과 야스민의 아들 마티아스와 클라라와 빅토르에 대한 이야기를. 그는 진실만을 적었다. 하지만, 그 중 할머니를 뺀 누구도, 실제 인물이 아니다. 그들은 루카스가 쓴 글속에만 있는 인물들이 다. 루카스는 할머니를 뺀 누구도 실제로 만나지 않았다. 그래도 그가 적은 것은 진실이었다. 허구의 인물들이지만, 그 인물들은 삶의 진실을 보여주므로.     

루카스의 진짜 이야기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3부) - 50년간의 고독>

내 이름은 클라우스. 아니, 진짜 이름은 루카스다.

나는 40년 동안 클라우스라는 이름으로 살아왔다. 하지만 태어났을 때 지어진 이름은 루카스였다. 그러니 나는 루카스이기도 하고 클라우스이기도 하다.

다시 생각해보자. 나는 클라우스인가, 아니면 루카스인가. 루카스라는 이름으로 불린 건 15년 남짓이고, 클라우스라는 이름을 쓰며 살아온 세월은 40년이지만 내 정체성은 루카스다. 나는 클라우스가 될 수 없다. 클라우스는 내 쌍둥이 형제 이름이다. 나는 그가 그리워서 클라우스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 국경을 넘은 직후부터.


나는 꿈을 자주 꾼다. 꿈에는 불타는 거리가 나오고, 비단 같은 황금색 털을 가진 퓨마가 나오고, 어머니와 아버지가 나온다. 그리고 내 쌍둥이 형제, 그리운 클라우스가 나온다.

클라우스는 말한다. 넌 너무 늦게 왔다고. 어머니는 말한다. 우리는 수년 동안이나 너를 찾아 헤맸다고. 하지만 우리는 너를 잊기로 했고, 너는 돌아오지 말았어야 했으며, 방해 받고 싶지 않다고.     


나는 오랫동안 글을 썼다. 나는 실제 일어난 일만 쓰고 싶었다. 내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지는 못하고 있었더라면 좋을 것 같은 이야기들을 썼다.

내가 쓴 글에는 슬픈 이야기들이 많이 나온다. 하지만, 아무리 슬픈 책이어도 인생만큼 슬플 수는 없다. 내가 내 진짜 이야기를 적지 못한 것도 그 때문일지 모른다. 슬픈 이야기들을 지어내 적었지만, 진짜 내 삶만큼 슬프지는 못하고, 진짜 내 삶을 적는 건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일이라서.

나는 오랫동안 심장병을 앓았다. 수술을 받지 않으면 곧 죽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내 심장은 말짱했다. 의사는 내 심장의 통증이 심한 우울증 때문이라고 했다.     


아버지와 어머니, 클라우스는 어디로 간 걸까. 어릴 적 우리는 한 집에 살았다. 그런데 끔찍한 비극이 우리를 찢어 놨다.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미치고, 누군가는 병원으로 이송되고, 누군가는 남았다. 나는 재활병원을 거쳐 마을의 외딴집에 사는 할머니에게 맡겨졌고, 국경을 넘어 클라우스로 살았다.

그 사건이 우리 식구들의 삶을 송두리째 망쳐놓았다. 이전까지는 모든 게 괜찮았다. 우리는 항상 넷이 식탁에 앉았다.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내가 우리라고 부르는 클라우스와 나. 우리는 두려울 것이 없었다. 하지만 그 일이 일어났고, 우리를 찢어 놨다.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미치고, 누군가는 병원으로 이송되고, 누군가는 남았다.


그렇다. 모든 건 가족으로부터 일어났다. 누구도 우리에게 이곳은 지옥이라고 말해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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