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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 Eun Apr 22. 2018

파리 Paris : 죽음과 추모의 건축

Memorial des Martyrs de la Déportaion

"건축가가 하는 일은 궁극적으로는, 공간이 아닌 시간을 설계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공간은 수단에 불과하고, 시간은 건축의 목적이 된다."


문득, 말하는 건축가, 고 '정기용' 선생님의 말씀을 떠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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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시간을 고스란히 간직한 도시 파리(Paris), 그리고 파리의 중심 : 시떼 섬(île de la Cité)에서 나는 시간이 설계된 건축을 만난다.


파리의 발상지로 여겨지는 시떼 섬에는 : 고딕 성당의 정수 노트르담 대 성당(Cathédrale Notre-Dame), 스테인드 글라스의 결정체 생트 샤펠(Sainte Chapelle), 헌법 재판소(Palais de Justice)와  콩시에르 주리(Conciergerie), 퐁뇌프(Pont-neuf), 도핀 광장(Place Dauphine).. 그밖에도_ 역사 속에서 튀어나온 다양한 건축들이 당당히 존재감을 뽐낸다.


여의도의 십 분의 일도 되지 않는 작은 섬안에 우리를 끌어당기는 공간이 너무 많다.


건축도 역사도 사람도 예술도,

크고 높고 풍부하고 가득하다.


파리 : 시떼 섬 - 노트르담 대 성당



시떼 섬의 가득가득한 공기 속에서 사라진 건축을 찾는다는 것은 쉽지가 않다. 나는 사라진 건축의 존재를 꽤 오랫동안 알지 못했다.






사라진 건축?

사라진 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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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그러나 존재하는 건축! 그리고, 시간이 설계된 건축! : 메모리알 데 마티흐 드 라 데포타숑(Mémorial des Martyrs de la Déportation : 추방당한 파리의 순교자들/유배 순교자 기념물)은 제2차 세계 대전(1939-1945) 중 '비시 정부(Régime de Vichy:1940-1944)'하에 독일의 나치 수용소로 강제 추방되어 학살된 16만 명의 프랑스인들을 추모하는 추모 건축이자 20만 명의 이름 없는 사람들을 위한 공동묘지이다. 추방된 프랑스인들 중에는, 프랑스 자국 내의 유대인 7만 6천 명과 아이들 1만 2천 명이 포함되어 있다.


(이하, Mémorial des Martyrs de la Déportation은 '유배 순교자 기념물'이라는 명칭으로 기록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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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 대전(1914-1918)은 - 프랑스, 영국, 미국 - 연합군의 승리로 끝이 난다. 그러나 승전국 프랑스 역시 전쟁의 결과는 처참했다. 프랑스가 전쟁으로 얻은 것은 무참히 파괴된 황량한 폐허뿐이었다. 군인 약 140만 명이 죽었고 수많은 민간인 희생자가 발생하였으며 치명적인 인적, 물적 재산의 손실로 국민들은 지쳤다.



프랑스는 독일의 재침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다.


전쟁에 질려 버린 사회는 선제적 공세 심리를 경계하고 거대한 방어선을 만들기로 결심한다.


프랑스의 육군 장관, 앙드레 마지노(André Maginot 1877-1932)의 제안으로 건설된 '마지노선(Ligne Maginot)'이 그것이다.


마지노선을 바라보는 미군 - wikipedia


'최후의 방어선, 저지선, 더 이상 허용할 수 없는 마지막 한계선' 등의 의미로 사용되는 '마지노선'이라는 말은 프랑스와 독일의 국경에 건축된(1928-1940) 긴 방어선(750km)의 이름이다.


인간이 만들어낸 최고의 '군사 건축물'로 손꼽히는 '마지노선'은 건축기술과 무기·과학기술 그리고 막대한 예산 등, 프랑스의 국력을 총체적으로 쏟아부은 그 시대 최고의 지하 건축물이자 20세기 프랑스 토목기술의 자존심이라 볼 수 있다.


마지노선 - militaryhistorynow.com

 

프랑스는 독일과의 대결에서 물러설 수 없다는 결의와 비장함으로 전투력의 반 이상을 마지노선에 집중시켰다. 그러나, 1940년 5월, 독일군은 마지노선을 무력화하는 작전으로 프랑스를 좌절시킨다. 히틀러는(Adolf Hitler) 마지노선을 우회하여 벨기에-아르덴느(Ardennes) 지역으로 프랑스를 침공했다. 예상치 못했던 독일의 전격전으로 프랑스는 단 한 달 만에 수도-파리까지 점령당하게 된다.(1940년 6월 16일)


마지노선 - militaryhistorynow.com


당시 국방부 차관이었던 샤를 드골(Charles André Joseph Marie de Gaulle1890-1970)은 영국으로 망명하여 대독 항전을 주장하였으나, 제1차 세계 대전의 영웅이자 프랑스의 국부로 칭송되던 필리프 페텡(Henri Philippe Benoni Omer Joseph Pétain 1856-1951) 총리는 프랑스의 패배를 인정하며 독일에 휴전을 요청했다. 프랑스는 계속 저항하기보다 정치적 협상을 택한 것이다.


1940년 6월 22일 맺어진 휴전 협정의 결과로 파리를 포함한 프랑스 북부는 독일 점령지역으로 귀속되었고, 프랑스 남부의 비 점령지역 중 '비시(Vichy)' 지역에 새로운 프랑스 정부가 들어선다. 기존의 프랑스 공화국(République française)은 사라지고 프랑스국(l'Etat français)이 출범했다. 프랑스에서는 1940년부터 파리가 해방된 1944년까지 통치한 프랑스국(l'Etat français)을 비시 정부(Régime de Vichy) 또는 비시 프랑스(Vichy France)라 명하고 있다.


프랑스 북부 : 독일 점령 지역 / 프랑스 남부 : 비시 프랑스


필리프 페텡이 이끌던 '비시 프랑스'는 단지 독일에 의해 점령당하고 억압받던 시기가 아니다. 국민의회 투표로 성립된 합법 정부였으며 자발적인 대독 협력 정권이었다.


대다수의 프랑스 민중들은 '친독 정권'의 탄생에 저항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프랑스를 구한 전쟁 영웅 : 필리프 페텡에 대한 무한한 신뢰가 있었고, '비시 프랑스'의 출범으로 적어도 독일군에 의한 프랑스의 완전 점령을 피할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독일군에 휴전을 요청하며 '항복 조약'에 서명해야 했던 '비시 프랑스'는, 프랑스 북부 지역에 대한 포기뿐만 아니라 프랑스 땅에 주둔한 '독일 점령군'의 유지 비용까지 부담해야 했다. (비시 프랑스는 매일 4억 프랑(약 900만 달러)이라는 거액의 비용을 나치 독일에게 지불한다.) 게다가 '의무 노동제’라는 이름으로 프랑스 노동자 65만 명을 독일의 공장으로 보내었으며, 자국 내 산업시설들과 약 500만 명의 국민들을 독일을 위한 군수물자 생산에 투입시켰다.


'비시 프랑스'에 대한 반대 세력이 커지게 된 것은 당연하게 보인다. 프랑스의 독립군 : '레지스탕스(resistance)'는 영국에 망명정부를 설립한 샤를 드골 장군을 중심으로 프랑스 국내·외에서 해방 운동의 기치를 올렸다.


'비시 프랑스'는 레지스탕스를 탄압할 수 있는 사법기구인 ‘특별 재판부’를 설치하였고, 독일 군 당국이 처형할 프랑스인 인질 명단을 직접 작성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필리프 페텡은, 프랑스가 독일군에게 맥없이 무너진 이유가 사회 가치의 혼란과 공산주의자 그리고 외국인 자본가 때문이라 주장하며 '반 공산주의·반 무정부주의자법', '반 유대인법', '귀화 금지법' 등을 잇따라 만들었다.


'비시 프랑스'는 나치 독일의 괴뢰 정부는 아니었으나 나치 독일의 적 : 레지스탕스, 공산주의자, 프리메이슨 단원, 유대인 등을 체포, 처벌, 제거하는 일에 의식적이고 적극적으로 협력하였으며, 민족의 자존심을 집어던지고 굴욕과 타락뿐만 아니라 나치 독일의 박해마저 미화시키는 선택을 했다.


공화정의 자살이라 평가되는 '비시 프랑스'는 프랑스 현대사에 큰 오점을 남겼다. 무엇이 프랑스를 이토록 무기력하게 패배시킨 것일까.



자유 박탈을 정당화하기 위해 프랑스의 패배를 악용한 투항 주의자들, 프랑스 국민을 악의 길로 이끈 비시 정부의 고위 공직자들과 추종자들, 나치의 승리를 물심양면으로 협력한 프랑스 인 : 대독 협력자들에 대한 처형과 처벌은 1944년 8월 25일-파리 해방 이후, 대대적으로 진행되었었으며 지금까지도 프랑스의 과거사 청산에 대한 노력은 계속되고 있다.






전쟁과 일제강점기, 반일과 친일의 역사를 가진 나라의 국민으로서 '비시 프랑스'의 역사는 낯설지만은 않다.


다른 문화, 종교, 사회, 언어, 인종... 따위로 국경을 나누어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세계는 인간이라는 공통분모 때문인지 비슷한 흔적들을 역사에 남기는 것 만 같다. 지금까지도. 여전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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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건축가, 조르쥬 앙리 팡귀송(Georges-Henri Pingusson)은 건축물을 풍경 속에 숨기는 방식으로 '유배 순교자 기념물'(1962)을 설계한다.


건축·역사 평론가들에 의하면, '사라진 건축'은 '윤리와 도덕성의 사라짐', 즉 '비시 프랑스'에서 전멸되었던 프랑스의 가치들을 상징하는 것이라 전한다.


시떼 섬-사라진 건축 : 유배 순교자 기념물


참담하고 굴욕적인 역사를 건축으로 포장하여 꼭꼭 감추어 놓은 것 같은 아닐까_라는 의심을 해보기도 한다. 그러나, 아마도 아닐 테다. '유배 순교자 기념물'이 위치한 시떼 섬은 파리의 발상지이자 프랑스의 심장으로 상징되는 곳이다. 추방당한 순교자들의 희생을 진중히 기억하고 반성하겠다는 국가적 책임과 의지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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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공간(mémorial)은 동일한 공간에서 과거에 일어났던 사건을 타자와 함께 나누는 목적을 가진다.


프랑스 파리에는, '유배 순교자 기념물' 외에도, 벨디브 사건(Vel d’Hiv 1942)의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벨디브 사건 기념비(Le monument commémoratif de la rafle du Vel d'Hiv)', 7만 6천 명의 유대인 희생자들을 기리는 '쇼아 기념관(Mémorial de la Shoah)' 등, 전쟁의 역사를 대면하고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기념공간들이 곳곳에 존재한다.


벨디브 사건은 : 비시 정부 하에 자행되었던 유태인 학살 사건으로 1942년 7월 16일과 17일 이틀 동안, 1만 3천 명의 유대계 프랑스인을 체포하여 파리 벨로드롬 디베흐(Vélodrome d'Hiver : 동계 자전거 경기장)에 비인간적으로 감금한 사건을 말한다. 이들 중 대다수가 아우슈비츠로 보내졌고 대부분 학살되었다. "프랑스에서 유대인 색출과 검거에 나섰던 독일군은 단 한 명도 없었다."라는 역사의 기록처럼 벨디브 사건은 단 한 명의 독일 병사도 동원되지 않았던, 프랑스에서 프랑스인들에 의하여 자행된 범죄였다.

 

영화 '사라의 열쇠(Elle s'appelait Sarah)'의 배경이기도 한 벨디브 사건은 '비시 프랑스' 최악의 나치 독일 협조였으며 프랑스의 가장 어두운 과거이자 비극적이고 끔찍한 치부이다.


기억할지어다. 절대 잊지 말지어다.  Zakhor. Al Tichkan.


프랑스 작가 타티아나 드 로즈네(Tatiana De Rosnay)의 동명소설을 극화한 영화 '사라의 열쇠'는 역사와 삶의 비극을 직시하라는 메시지와 함께 프랑스의 과오를 재조명한다.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는 일은 언제나 유쾌하지 않다. 그러나 아무리 숨기고 기억하지 않으려 애써도 '그 일이 일어났다.'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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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유배 순교자 기념물'은 벨디브 사건을 포함하여 제2차 세계 대전 중 비시 프랑스 정권 하에 희생된 프랑스 국민들을 위로하는 추모와 위로의 건축이며, 나츠바일러-슈트루토프수용소(camp de concentration de Natzweiler-Struthof)에서 학살된 20만 명의 순교자들을 보듬는 신원 미상 프랑스 국민들의 '공동묘지(tombe du déporte inconnu)'라고 정리해 볼 수 있겠다.


나츠바일러-슈트루토프수용소 (camp de concentration de Natzweiler-Struthof : 1941-1944)는 프랑스 알자스(Alsace) 지역에 위치한 나치 독일의 집단 수용소로, 수용소의 수감자들은 부근 채석장에서 강제노역에 동원되거나 의학 실험재료로 이용되었다. 1962년 4월 10일, 나츠바일러-슈트루토프수용소에 수감되었던 신원이 확인되지 않는 희생자들의 유골들이 파리로 이동되었고 '유배 순교자 기념물'에 안치되었다.


유배 순교자 기념물 - 좁고 가파른 계단(출구)


'비시 프랑스'의 역사도, 시떼 섬 내의 숨겨진 장소에 대해서도, 건축도, 건축가도.. 어떠한 정보도 없었던 상황에서 '유배 순교자 기념물'을 만났었다.


우연한 기회로 들러 보게 되었던 '유배 순교자 기념물'은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많이 인상적이었다. 시떼 섬과는 어울리지 않는 모던한 건축양식과 유난히 고요한 주변의 공기, 하늘과 물과 땅, 하얗고 거칠고 높고 단단한 콘크리트 벽, 좁고 가파른 계단, 뾰족뾰족 날카로운 조형물 :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체험하는 기분이었고, 시간 여행을 하는 듯 한 느낌이었고, 아팠고, 뭉클했고, 무거웠고, 적막했고... 시(詩) 적이었다.


유배 순교자 기념물 (파리 홍수의 여파로 문이 닫힌 모습이다.)


노트르담 대성당 뒤편으로 내어진 길을 따라 몇 발자국 걷다 보면 사람의 키를 가볍게 넘는 높이의 철담과 문을 마주하게 된다. 경계를 명확히 하려는 듯 길게 이어지는 담에는 Mémorial des Martyrs de la Déportation이라 적힌 동판이 보인다. '유배 순교자 기념물' : 건축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입구를 통과하며 담을 지난다.


경계를 지나 맞이하는 시떼 섬의 공기는 분명 경계 밖의 그것과 다르다.

작은 풀밭과 넓은 하늘, 강 건너의 풍경이 무심하게 펼쳐진다. 북적이지 않는다.


낯 설 다.


유배 순교자 기념물 -  건축물도 기념비도 보이지 않는다.


건축의 자리를 대신하는 풍경의 한편에 계단이 보인다. 한 사람이 겨우 지날 정도로 폭이 좁고 가파르다.


계단을 한걸음 한걸음 내려갈 때마다 주변의 풍경은 거친 콘크리트 벽으로 가려진다. 좁고 가파른 계단과 높고 단단한 콘크리트 벽은 - 수용소로, 지하 벙커로, 또는 가스실로 - 죽음을 향하여 걸어가야 했던 처참한 역사적 시간의 체험이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전쟁의 공포를 마주하는 사람은 그도 그들도 아닌, 계단을 내려가고 있는 '나'라는 것을 깨닫는다.


타자의 기억은 나의 기억이 되고 우리의 기억이 된다.


건축가 팡귀송(Georges-Henri Pingusson)이 제시한 건축의 언어 속에서 '이해하지만 이해하지 못하는 고통'을 체험한다. 희생자들이 겪었던 고통과 아픔의 시간을 온전히 전달받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서로 연결점이 없던 타자들이 공동의 기억으로 엮이는 과정 속에서 고통과 아픔의 역사 속에 존재하던 그들은 우리 마음 안에 잠시나마 존재하게 된다.


유배 순교자 기념물 - 하늘과 물과 땅이 만나는 건축


약 5m 높이의 콘크리트 벽은 주변의 풍경을 모두 지웠다. 우리는 분명 외부에 있는데 밖으로 나갈 수가 없다. 만질 수 없는 하늘과 센 강, 외부와 완벽히 차단된 적막한 공기, 날카로운 조형물, 거친 벽과 바닥 : 공간을 채우는 요소들은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탈주할 수 없는 집단 수용소의 감정.


유배 순교자 기념물


드디어!

사라진 건축이다.


거대한 두 개의 시멘트 블록 사이, 어둠이 진한 곳으로 들어간다.


전쟁과 죽음의 시간, 20만 명의 이름 없는 사람들의 무덤, 16만 명의 학살된 프랑스인들의 기록이 저 안에 있다.


유배 순교자 기념물  - 기념관 입구


기념관의 내부로 안내하는 육중한 시멘트 블록은 무거운 무게를 지탱하며 아슬하게 떠 있다.


감히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희생자들이 견디어야 했던 고통과 아픔은 거대한 시멘트 블록보다 무거웠을 테다.


비시 정권 하에 학살된 16만 명의 프랑스인들의 기록


기념공간은 두 개의 층으로 이루어진다. 첫 번째 층에선 나츠바일러-슈트루토프수용소 수감자들의 무덤과 전쟁 중 희생된 16만 명의 프랑스인들의 이름이 빽빽이 기록된 추모비를 만난다. 그리고, 이어지는 다음 층은 전쟁과 학살의 기록을 대면하는 공간이다.


각 지역에서 희생된 프랑스인의 숫자가 지도에 기록되어 있다.


수전 손택(susan sontag)은 저서 '타인의 고통'에서 우리가 분쟁지역의 사진을 보면서 전쟁을 이해한다고 착각한다는 점을 지적하며 그들의 고통을 일종의 스펙터클로 소비하고 있지는 않은지 질문한다.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런 고통을 가져온 원인에 연루되어 있지는 않다고 느끼는 것이다. 우리가 보여주는 연민은 우리의 무능력함 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도 증명해 주는 셈이다. 따라서 연민은 어느 정도 뻔뻔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타인의 고통'-수전 손택)


'타인의 고통'보다 먼저 출간한 '사진에 대하여'에서는, 스펙터클이 아닌 실제의 세계를 지켜내야 한다는 주장과 함께 이미지의 용도와 의미, 전쟁의 본성, 연민의 한계, 그리고 양심의 명령까지도 고민하길 부탁한다.


수전 손택의 글은 불편했고 충격적이었다. 스스로의 뻔뻔함과 거만함을 자각하는 과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타인의 고통을 마주한다는 것이 무서웠다. 그래서 대면하지 않으려 애를 쓰기도 했고 대면하게 되는 상황에선 나의 위치를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 그들의 고통을 어떻게 응시하고 마주해야 하는지_ 질문하고 고민했다.


최소한의 양심 같은 것이었을까_ 타인의 고통을 스펙터클로 가볍게 소비하거나 이용하고 싶지는 않았다. 당신의 아픔을 모두 이해한다는 듯 거만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나, 어렵고 조심스럽다.




'유배 순교자 기념물' 역시 여느 전쟁 기념관들처럼 폭력적이고 참혹한 순간들을 기억하는 사진의 자료들이 전시되어있다. 내가 아닌 그들의 고통, 나와는 시간적, 물리적, 역사적, 관계적으로도 거리가 먼 타인의 고통이다. 그러나 이곳에서 만나는 사건의 자료들을 가볍게 소비할 수도 무관심할 수도 없다.


'유배 순교자 기념물'의 <공간>은 가슴을 울리는 방법으로 다가갈 수 없는 타자에게 다가가도록 우리를 이끈다. 그리고, 그 <공간>에서 경험하는 시간과 역사의 체험은 과거의 불행한 사건이 재현되지 않도록, 지금의 관점에서 사건을 새롭게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내어준다.


유배 순교자 기념물


이제 다시 기념관 밖으로 나가쟈.


바깥세상과 단단히 단절시키려는 듯 느껴지던 높은 콘크리트 벽의 답답함보다 넓은 하늘, 흐르는 강물, 시원한 바람 그리고 자유롭게 비어진 장소의 공간감이 먼저 가슴을 두드린다.


이상한 일이다. 분명 같은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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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죽음의 시간을 대면한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안도의 감정을 느낀다.




‘아, 다행이다, 나는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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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온 반대편 쪽의 계단으로 올라간다. 다시 한번 작은 공원과 담을 지난다. 노트르담 대성당이 보인다. 파리 시민들, 각국에서 모여든 관광객들의 모습이 분주하다. 자동차와 자전거가 차도를 채우고 행위 예술가들과 음악가들이 거리를 채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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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tre la vie et la mort.

삶과 죽음의 경계.



기념공간은 : 장소의 선정, 공간의 높이 또는 넓이, 빛, 동선, 소리, 조형물의 설치.. 등 여러 효과를 활용하여 사건이 발생했던 당시의 고통을 재현하는 방법으로 애도의 메시지를 전하려 노력한다.

'유배 순교자 기념물'은 보이지 않는 건축의 힘을 증명하며 침묵과 형상의 공간 그리고 체험의 공간으로 우리를 이끎으로써 추방당한 프랑스의 순교자들의 운명을 함께 비탄하고 기억하고자 한다.

그들을 되살릴 수는 없지만, 그들의 아픔을 완벽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념공간은 역사적 진실을 만나기 위한 노력이며 위로와 희망을 위한 공동의 의지이다.



따라서, 추모 건축(mémorial)은 중요하고 반드시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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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그냥 스쳐 지나버릴 수도 있는, 그리고_ 우리에게 꽤 의미가 있는, 파리에서 만나볼 수 있는 기념비(mémorial) 한 가지를 더 기록해 본다.


주소 : La place du Bataillon Français de l’ONU en Corée 75004 Paris


파리 지하철 7호선 pont marie역에서 도보 2-3분, '유배 순교자 기념물'에서도 그리 멀지 않은 곳에, 특별하거나 웅장하지는 않지만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거리를 지키는 익숙한 모형의 기념비가 있다.


 '한국전쟁 참전 용사 기념비(Mémoire du bataillon Francais en Corée)'이다.


한국전쟁 참전 용사 기념비 (Mémoire du bataillon Francais en Corée)


'한국전쟁 참전 용사 기념비(Mémoire du bataillon Francais en Corée)'는 한국 전쟁(la guerre de Coréé 1950-1953), 인도차이나 전쟁(la guerre d'Indochine 1953-1954), 알제리 전쟁(la guerre d'Algérie 1955-1962)에서 희생된 프랑스 군인들을 기리기 위하여 1989년, 유엔(organization des Nations Unies)에 의하여 건립되었다.


Véterans de la Guerre de Corée, vous serez toujours nos héros. 한국전의 베테랑들, 당신들은 영원한 우리의 영웅일 것입니다.


단지, 전쟁에서 희생된 프랑스 군인들을 위한 추모비라 생각할 수도 있으나, 남과 북이 합쳐진 한반도 모양으로 제작된 기념비는 이미지 만으로도 충분히 반가울 뿐 아니라 우리의 역사를 되돌아보게도 한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6.25전쟁)이 발발하자 프랑스 정부는 유엔군 산하 프랑스 대대(le Bataillon Français de l’ONU)라는 이름으로 지상군을 파견했다. 기념비가 위치하는 장소의 길 이름 역시 한국전에 참전한 프랑스 대대명을 그대로 가져와 사용 중이다. :  La place du Bataillon Français de l’ONU en Corée.


프랑스는 제2차 세계 대전의 후유증으로 전쟁에 대한 혐오와 부정적 이미지가 사회 전체에 퍼져있었다. 그럼에도 한국전쟁 참전을 결정하게 되었고, 군인들의 자발적인 의사로 파병이 이루어졌다.


1950년부터 3년 동안 3천400명의 프랑스 군인이 한국전쟁에 참전하였으며, 262명이 전사, 1천여 명이 부상당했다.


매년, 프랑스 한국전쟁 참전협회(ANAAFF)는 파리 '한국전쟁 참전 용사 기념비'에서 한국전쟁에 참전한 프랑스 군인들에게 감사의 뜻을 표하고 참전의 의의를 기리는 추모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Le Lapin - 토끼


여담으로, 프랑스인들에게 '한국전쟁 참전 용사 기념비'는 르 라팡(Le Lapin-토끼)으로 불리어진다. 기념비의 모양이 토끼처럼 보이기 때문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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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라고 했다. 전쟁에는 승자도 패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진리를 잘 알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우리는 전쟁의 위협 속에 살아간다. 심지어 전쟁으로 인류가 발전한다라는 논리까지 주장되고 있으니 씁쓸하고 안타깝다.




전쟁은 그 어떠한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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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리얼에 대한 이야기를 적어두기 때문일까. 얼마 전, 4번째의 416이 지났기 때문일까.


세월호 4주기 - google

 

생각한다.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


잊지않겠습니다.

기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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