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뒤흔든 경제 대통령들
"과거를 모르거나 제대로 활용하지 않으면 세상은 아이같이 유치한 수준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키케로
이론과 현실에는 큰 차이가 있다. 정치학을 전공한 나는 정책에 관심이 많았다. 대학교에서는 정책이 어떤 과정을 통해 만들어지는지, 왜 특정 정책들이 도입되는지, 정책입안자들이 겪는 갈등과 이해관계의 충돌, 그리고 정책들의 사회적 영향 등을 공부했다. 많은 동기들이 정책 관련 일을 하고 싶어서 공무원이 되었다. 나도 한때 비슷한 진로를 꿈꿨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몇년이 흐른 후 그 길을 가지 않은 것이 잘한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정책의 효과는 예측 불가한 경우가 많고, 좋은 정책이 만들어지기까지는 방대한 양의 리서치와 복잡한 의사결정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정책관련 일을 했던 경제학과 출신 친구는 곧 이러한 점에 지쳐서 다른 일을 찾아갔다.
"위대한 경제학자들을 기록한 책은 많지만 경제 이론을 현실 정책에 접목시켜 많은 사람들의 인생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장관 등 경제정책을 주도한 사람들을 다룬 책은 찾아 보기가 힘들다." <세계를 뒤흔든 경제 대통령들>의 저자 유재수는 지금까지 역사적으로 경제에 큰 영향을 미쳤지만 잘 다루어지지 않았던 정책입안자들을 파헤친다. 미국의 중앙은행 설립, 금본위제와 브레튼우즈 시스템의 도입에 영향을 끼친 인물들부터 시작해서 대공황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인물, 그리고 국민건강보험 제도 등 사회 안전망 구축에 힘쓴 정책입안자들까지. 긍정적이던 부정적이던 지금까지의 경제 역사에 한 획을 그은 18명의 인물들이 소개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인상 깊었던 인물 두명은 영국 복지제도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와 세제 개혁을 한 앤드류 멜런이다.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는 1863년 영국 맨체스터에서 태어났다. 그는 땅값 상승으로 불로소득을 얻고 있는 귀족들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가졌다. 그는 1인당 소득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나라에 많은 빈민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고 사회복지 체계를 세우기로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상무 장관에 취임한 그는 매우 빠른 속도로 업무를 파악했고 엄청난 양의 정보를 쉽게 받아들였다. 그는 노동자의 처우를 개선하기 위해 사용자와 노조들 간 협상 테이블을 꾸려 타협을 모색하고 사회복지 혜택을 늘렸다. 또 약자, 고아, 어린이, 병자, 과부, 실업자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전면적인 복지제도를 도입한다.
복지 예산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그는 말한다. "이것은 전쟁 예산이다. 즉 빈곤과 무관심을 상대로 한 전쟁 예산이다. 한때 숲 속을 창궐하던 늑대가 사라진 것처럼 이 예산은 빈곤과 인간의 타락이 사라지는 시대로 나아가는 큰 걸음이 될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죽은 경제학자의 살아있는 아이디어>에서 사회적 약자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고민했던 경제학자들을 보았다면, 이 책에서는 그 아이디어를 실현하기 위해 현실세계에서 이에 반대하는 사람들과 용감히 맞서 싸운 사람들이 나온다. 이들이 없었더라면 위대한 아이디어도 기득권을 지키려는 세력들에 의해 무너졌을 것이다. 정말로 세상을 바꾸는 사람들은 정책을 만드는 사람들이다. 귀족들의 힘이 강했던 영국에서 국민건강보험이라는 혁신을 현실화시킨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가 대단하게 느껴진다.
또 한명의 흥미로웠던 인물은 감세를 주장한 앤드류 멜런이다. 그는 제 1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에서 등장한 거부이자 재무장관을 지낸 인물이다. 또한 세율을 인하하면서도 세수를 증대해 소위 '공급주의 경제정책'을 최초로 현실에 성공적으로 적용했던 인물이다. 그의 다른 정책들은 논란이 많지만 세금 제도에 대해 획기적인 역발상을 내놓아 성공한 점만은 생각해볼 만하다. 그는 세율이 지나치게 높으면 부자들이 절세상품으로 이동하기 때문에 오히려 세수가 줄어든다는 것을 파악했다. 따라서 세율을 낮춰서 자금을 생산적인 투자로 유인하면 경제의 생산성을 높이고 더 많은 세수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생각은 적중했고, 정부는 한계세율은 낮추었지만 세수는 늘릴 수 있었다. 하지만 이와 관련해서 논쟁도 끊이지 않았다. 멜런의 친기업적인 정책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대공황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인물로 지목했다. 아직도 감세 관련 논쟁은 끊이지 않고 있다. 예산 마련과 복지정책을 좌지우지하는 세수 마련을 어떻게 할 것인가는 경제학자들과 정책입안자들이 영원히 해결해야 할 수수께끼인 것 같다.
경제정책 결정자들이 떠안아야 하는 책임감은 말그대로 어마어마하다. 한번의 의도치 않은 실수로 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히고 역사에 오점을 남긴 사람으로 영원히 기억될 수도 있는 자리가 바로 경제 정책입안자인 것 같다. 다른 한편으로는 경제 정책이 개선될 수 있는 기회를 준 그들의 실패가 다행스럽기도 하다. 경제 정책을 만드는 사람들은 정치와 역사, 심리 등 여러 분야에 평균 이상의 능력을 갖추고 있는 '종합예술가'가 되어야 하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