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에서의 셋째날. 이날은 오스트리아의 인스부르크에 당일치기로 다녀오기로 했다. 내 여행에 "거기는 하루면 다 봐", "당일치기로 충분해"라는 말은 없지만, 그래도 뮌헨에서의 5박이 영 부담스러웠는지 이번에는 속는 셈 치고 그 말을 한번 믿어보기로 했다. 인스부르크는 알프스 산맥에 있는 도시로, 해발 2256m의 하펠레카르에 올라 내려다보는 산맥과 시내 전경이 아름다운 곳이다. 오스트리아에서 5번째로 큰 도시이고, 독일 남부 쪽에 가까워서 뮌헨에서 버스로 2시간 조금 더 걸리는 거리에 있다. Flixbus라는 유럽의 도시를 이동하는 버스를 타고 가기로 했다.
아침 7시 반 버스여서 일찍 일어나 호텔 조식을 먹고 뮌헨역 버스터미널로 향했다. 국경을 넘는 거라 여권이 필요하다는 글을 얼핏 봐서, 전날 밤 동생에게 여권을 챙기라고 하고 잠들었다. 그런데 아뿔싸, 내가 여권을 홀랑 빼놓고 간 것이다. 은근슬쩍 버스에 탑승하려는데 표를 검사하는 사람이 막아섰다. 너무나 강경한 태도에 알겠다고 하고 발걸음을 돌렸다. 동생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으면서 그래도 자기가 안 놓고 와서 정말 다행이라고 했다. 언니가 펄펄 뛸 생각을 하니 아찔하다며. 와 내 동생 정말 보살이구나. 그러게 나였다면... 가만두지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숙소에 가서 여권을 가지고 와서는 9시 버스를 탔다. 이미 한시간 반이 늦어진 상황. 우리가 인스부르크를 온전히 누릴 수 있는 시간은 여섯시간이 채 되지 않았다.
시내 중심부를 통과해서 의회 쪽으로 가면 하펠레카르에 오를 수 있는 케이블카를 탈 수 있다고 해서 거기로 곧장 가기로 했다. 아기자기한 길의 상점가도 구경하고, 무슨 동상과 마켓 플랏츠 등 시내 볼거리들도 구경했다. 케이블카로 향하는 길에 접어들자 옥빛의 '인 강'이 도시를 감싸고 빠르게 흐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인스브루크라는 도시의 이름이 '인(inn) 강이 흐르는 다리'라는 말에서 왔듯, 인강은 이 도시의 핵심이다. 하늘이 흐리긴 했지만 아직 비가 오지도 않았는데 어찌나 물살이 빠르던지, 가던 길을 멈추고 넋을 놓고 바라보게 되었다.
인강을 구경하며 10분 남짓 걸으니 케이블카를 타는 곳이 나타났다. 어 저거 어디서 많이 보던 건데.. DDP? 맞다. 이 곳도 DDP를 설계한 자하 하디드가 설계했다. 친숙함과 반가움을 느끼며 케이블카를 타러 갔다. 가장 높은 해발 2256m의 하펠레카르까지 오르는 데는 860m의 홍게르부르크와 1905m의 제그루베를 경유하고, 그때마다 케이블카를 갈아타야 한다.
제그루베에서 내려다본 전경. 스키장으로도 유명한 곳이다. 겨울에 오면 설산이 아주 멋질 것 같다.
홍게르부르크에서 내리자마자 다음 케이블카를 놓치지 않으려고 시내 전경을 내려다보지도 못한 채 제그루베로 향하는 케이블카를 탔다. 마침 점심시간이 지나갈 무렵이라, 제그루베 전망대에 위치한 레스토랑에서 간단히 식사를 하고 나머지를 오르기로 했다. 우리의 목적은 물론 식사보다는 산 중턱에서 마시는 생맥주였다.
꼬르동 블루라는 슈니첼 안에 치즈가 가득 들은 음식과 알프스 빙하 맥주로 유명한 질러탈(zillertal) 맥주를 시켰다.
알프스 자락의에서 내려다다 보며 마시는 알프스 빙하 맥주. 맥주 맛 돋고요.
꼬르동 블루 - 안에 치즈 줄줄 들은 슈니첼. 다른 곳에서도 슈니첼을 시킬 때마다 항상 딸기잼을 내어줬는데, 참 잘 어울렸다.
바람이 많이 불어 음식이 식으면 어떡하나 했는데 맥주 사진을 다 찍고 나니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잘됐다 싶어 안에 들어가서 바깥의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보며 느긋하게 먹었다. 식사를 마치고 남은 고지를 향해 마지막 케이블카를 타러 향했다. 점점 거세지는 바람에 케이블카가 흔들거리기는 했지만, 비만 많이 안 오면 됐지 하는 마음이었다. 케이블카를 내려 정상으로 향하는데 빗방울이 조금 더 세졌다. 같이 케이블카에서 내린 사람들은 정상까지 오르기를 포기한 듯, 오르는 사람은 동생과 나 둘 뿐이었다. 후딱 갔다 오자는 마음으로 동생의 발걸음을 재촉했다.
바람으로 두들겨 맞고 있는 동생. 합성 같네..ㅋ
드디어 도착한 정상. 생애 최고로 높은 곳에 오른 게 1950m의 한라산이니 해발 2256m의 하펠레카르로 최고 기록을 갱신했다. 조금 더 가장 높은 곳에서의 기분을 만끽하고 싶었지만, 비바람이 점점 심해져서 정말 정상을 찍었다는 느낌만 내고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아 근데 이 사진만 다시 봐도 정말 겨울에 눈 쌓인 모습은 더 장관일 것 같다.
여기는 하늘이 맑은데 금세 하늘이 어두워졌다
황급히 내려가는 케이블카를 타러 갔지만 천둥번개가 치는 상황까지 되어버려 잦아들 때까지 연기한다고 했다. 아직 인스부르크 시내 구경할 게 잔뜩 남았는데... 스와로브스키 매장 가야 하는데.. 우리 뮌헨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는데 40분 정도 지났을까, 케이블카 운행이 재개되었고 무사히 지상으로 내려올 수 있었다. 감사, 또 감사한 마음이었다.
스와로브스키 매장의 미키, 키티, 백설공주
뮌헨으로 돌아가는 버스 시각은 5:15. 남은 시간은 한시간 남짓이었고, 우리가 택한 곳은 스왈로브스키 매장이었다. 스와로브스키가 오스트리아 것인지도 이때 처음 알았다. 요새는 손목시계 외에는 액세서리를 일절 안 하지만 그래도 스왈로브스키의 본고장에 왔으니 싸게 득템 해가지 않을까 해서 가보기로 했다. 한시간 남짓 떨어진 곳에 스왈로브스키 월드라는 테마파크도 있는 모양이었는데 반일 일정밖에 소화할 수 없는 입장에서는 감히 꿈꿀 수 없었다.
여기 매장 가면 중국인들이 다 쓸어간다더니 듣던 대로 중국인들이 가득 차 있었다. 좀 예쁘다 싶은 것들은 할인을 대체로 안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쇼케이스 안에 있는 팔찌가 예뻐 보여 보여달라고 했더니 라스트 원이란다. 라스트 원... 사야지요. 팔에 차보니 체인 길이도 조정되고 예뻐서 샀다. 동생과 사이좋게 하나씩 사고는 매장을 나왔다.
버스 타러 가는 길에 발견한 황금지붕
이 도시를 제대로 음미하지 못한 기분에 버스를 타러 가는 발걸음이 너무 아쉬웠다. 길거리를 다닐 때도 황급히 다녔고, 어디 건물 안을 들어간 것은 상점 밖에 없었다. 비 때문에 가장 높은 곳에서도 쫓기듯 내려왔다. 그나마 지그루베 전망대에서 사진 찍고 맥주 마시며 여유 부렸던 것, 난간에 기대서서 빠르게 흐르는 인강을 멍하니 바라본 것, 마켓 플랏츠에 가서 현지 과일과 식재료 구경하고 맛본 것,... 쓰고 보니 좋은 것도 많긴 했다. 길거리에 있는 건물들도 뮌헨이랑은 다른 느낌으로 아기자기해서 좋았고, 건물 사이로 보이는 웅장한 산도 멋있었다. 정상에서 내려다본 도시 전경과 도시를 가르는 강도 한눈에 다 담겨서 좋았다. 1박 하며 이 도시의 밤과 이른 아침까지 맞이 할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려면 짐을 싸서 옮겨 다녀야 했으니 그건 또 피곤했겠지 싶으면서도 못내 아쉽다. 남이 아무리 '볼거리가 시내에 모여 있어서 도보로 이동 가능하고 하루면 볼 건 다 보는 도시'라고 말한 들, 역시 나는 당일치기 타입은 아니다. 어쩔 수 없이 약간의 아쉬움을 남겨 두고 뮌헨으로 돌아가는 버스에 올랐다. 돌아가는 버스에서는 옆자리의 독일인 두 명(서로 처음 보는)이 두 시간 내내 큰 소리로 떠드는 소리를 들으면서 가느라 그 아쉬움이 많이 사라지긴 했지만 말이다.
플릭스버스 - 돈 좀 더 주고 2층 맨 앞자리로 예약했다. 풍경을 걸리는 것 없이 그대로 맞이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