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일 년에 두 번 풀코스 마라톤을 뛰고, 4번 정도 하프마라톤을 뛴다. 그리고 시간이 될 때, 몸이 조금 무겁다고 느껴질 때 마라톤 대비를 겸한 조깅을 한다. 그 누구도 나에게 달리라고 강요하는 사람은 없어서 오로지 내가 뛰고 싶을 때 뛴다. 그래서 한여름에는 뛰지 않는다. 초저녁이면 괜찮지 않냐고 할 수도 있지만 지면이 머금은 열기가 채 가시지 않아 대낮에 뛰는 것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시원한 공기를 가르며 달리는 것이 제맛이라는 생각을 가진 나로서는 30도가 넘는 대낮에 그늘 하나 없는 도로를 달리고 싶지는 않다. 그런데 이 날, 뮌헨에서의 둘째 날(사실상 첫째 날) 오후 열두 시를 갓 넘어 태양이 최고조로 이르고 있을 때 저 멀리서 사람들이 한 무더기로 뛰어가는 모습을 목격했다. 참고로 6월 말, 유럽에는 때 이른 폭염이 찾아왔고 40도까지는 아니었지만 독일도 예외는 아니었다.
마라톤 동호인으로서 이런 광경을 그냥 지나칠 수 없어 펜스 근처로 다가갔다. 가까이 다가가 뛰는 사람들을 쳐다보니 티셔츠로 가리지 못한 살갗들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이 대회는 10km 단일코스였던것 같은데도 뛰어오는 사람들의 얼굴이 너무나 괴로워 보였다. 왜 아니겠는가. 아침 10시에 호텔에서 나오면서 미술관으로 향하는 1km 남짓한 거리를 걸으며 덥다고 짜증을 낸 걸 생각하니 부끄러워졌다. 한편으로는 내가 뮌헨에서 여행하는 동안 이런 마라톤 대회가 있는 걸 알았으면 나도 신청하는 건데!!라는 생각도 잠시 들었다.
"아 이런 거 있는 거 알았으면 나도 뛰는 건데!!"
"진짜가??"
"..... 아니 죽을 일 있나..."
그 생각은 뛰는 사람들을 5분 남짓 구경하고서는 사라졌지만 말이다.
가만히 서서 결승점을 향해 질주하는 사람들의 모습과 역시나 땡볕에 늘어서서 주자들을 응원하는 사람들의 표정을 바라보았다. 강렬한 햇빛에 인상은 찌그러져 있었지만 밝은 표정만은 숨길 수 없었다. 우리는 원래 이 길을 지나갈 계획이 없었다. 원래 점심 맥주를 마시러 가기로 한 곳으로 버스를 타고 가다가 반대로 타고 간 것을 깨달았다. 내려서 반대방향으로 가는 버스를 탔는데 내려야 할 곳을 한 정거장 지나쳤고 그럴 바에는 다른 비어가든으로 가자고 타협하고 그곳으로 향하는 도중이었다. 서로 짜증이 올라온 상황에서 나의 최대 관심사인 마라톤 대회가 눈 앞에 펼쳐지고 있으니, 동생이 그래도 버스 잘못 탄 덕에 외국에서 마라톤 하는 것도 구경한다며 농을 쳤다. 나도 "맞다, 이거 볼라고 일부러 반대로 탔다"며 응수했다.
내가 뛴 것도 아닌데 결승점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평화가 찾아왔다
11시에 시작되어서 12시가 넘은 시점에는 많은 사람들이 뛰어 들어오고 있었다. 골인지점을 지나가며 사람들이 목에 건 메달을 보는데, 까만색 바탕에 귀여운 글자가 쓰여있는 메달이 너무 예뻤다. 역시 오기 전에 찾아보고 뛸 걸 그랬다.
완주를 축하합니다!
호수 반대편에서 바라본 비어가든
마라톤 대회장을 지나 조금을 더 걸으니 우리의 목적지가 나왔다. 바로 영국정원에 있는 비어가든이었다. 이 곳은 <독일에 맥주 마시러 가자> 책에서 저자가 언급했던 곳으로, 저자가 가려고 세 번을 시도했는데 과음으로 매번 가지 못하고 마지막 날에 오픈 전의 고요한 모습만 보고 갔다고 했다. 저자도 못 간 곳을 내가 가보다니, 더 설렜다. 가게 안으로 들어가 테라스 자리로 나가서 어디 자리가 호수가 직빵으로 보이는 자리인지 눈에 불을 켜고 찾았다. 하지만 너무 대낮이었고, 호수가 눈 앞에 보이는 곳은 그늘이 없었다. 그래도 독일에서의 제대로 된 첫 맥주인데 뷰를 포기할 수 없어서 바람에 따라서 그늘이 왔다 갔다 하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이 곳에서 취급하는 맥주는 파울러너였다. 파울러너는 우리나라 편의점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맥주다. 간혹 생맥을 파는 맥주집도 있긴 하지만 가격이 터무니없이 비싸다. 이 곳에서는 파울러너 생맥주를 우리나라보다 저렴하게, 다양하게 마실 수 있다! 너무 기대됐다. 이 비어가든의 시스템은 책에서 언급되어있지 않았기에 주문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서 허둥대다가 사람들이 하는 걸 관찰하고는 따라했더니 자연스럽게 됐다. 트레이를 들고 음식을 파는 곳에서 음식을 주문하고 바로 음식을 받은 뒤, 맥주를 받는 곳으로 이동해서 맥주를 받아 출구에서 계산을 하고 나가서 자리를 잡고 앉는 방식이었다. 커리부어스트와 헤페바이젠과 라거 한잔씩을 시켰다. 독일에서 처음 맛보는 소시지는 탱글탱글하니 맛있었다. 조금 짠 감이 있었는데, 감자튀김이 덜 짜서 서로 잘 어울렸다. 무더위에 돌아다니다가 맛보는 생맥주여서 그랬을까, 독일의 생맥주여서 그랬을까. 너무 맛있었다. 특히 바이젠은 바나나향이 코로 입으로 훅 올라왔다. 한국에서 맛본 적 없는 진한 바이젠의 맛이었다. 여행이 끝날 때쯤 되어서 동생에게 이제껏 먹은 맥주 중 BEST 바이젠이랑 라거를 꼽으라고 했더니 바이젠은 이 곳에서 마신 헤페바이젠을 꼽았다. 그늘이 왔다 갔다 해서 덥다가 안 덥다가 했지만, 호숫가에 발을 담그는 사람을 구경하기도 하고 수첩에 각자 그림을 그리기도 하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그 사이 둔켈 한잔을 더 시켜 나눠 마시기도 했다. 한 번에 세 가지 맥주를 맛볼 수 있다니, 둘이 가면 좋은 점 중 하나다.
비어가든에서 나와 호텔로 가는 버스 정류장에 와서 기다리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버스가 오지 않았다. 주위의 안내문을 살펴보니 아까 우리가 본 마라톤 때문에 18시까지 도로 통제를 한다고 적혀있었다. 대회 시간은 11시부터 14시까지였는데 어째서 18시까지 도로 통제를 한다는 거지?? 했는데 걸어가다가 발견한 대회장을 보고는 그 이유를 알았다. 사람들이 세월아 네월아 하며 그때까지 느긋하게 정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나라 같았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어이가 없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러너로써 부럽기도 했다. 그렇게 더위가 채 가시지 않은 무더위 속을 걷고 지하철을 타서 숙소에 도착해서 한숨 잠이 들었다.
일어나니 저녁때가 되었다. 나는 당연히 동생에게 아까 못 간 곳으로 맥주 마시러 가자고 할 참이었는데, 동생이 속이 좋지 않아 내가 세상모르게 잘 때도 한숨 못 자고 괴로워했던 모양이다. '네가 아프다고 나까지 숙소에 처박혀서 같이 괴로워할 수 없지 않겠니 동생아? 그럼 나라도 먹고 올게' 하면서 트램을 타고 마리엔 광장으로 나갔다. 우리가 원래 가려던 곳은 '호프브로이하우스'로 큰 건물에 사람들이 꽉 차 있고 밖에서도 시끌벅적하기 짝이 없는 곳이었다. 뮌헨의 상징적인 곳이기도 하고, 왠지 혼자 가면 쓸쓸할 것 같아 거기로 가는 건 동생이랑 같이 가기로 미뤄두고 맞은편의 아잉거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이 곳 역시 <독일에 맥주 마시러 가자> 책에서 언급했던 곳이라 낯설지 않았다. 헤페바이젠과 연어, 소고기 타다키 등이 나오는 플래터를 시켰다. 헤페바이젠을 한 모금 마시니 바나나향을 위시한 향긋함이 내 입안 가득 메웠다. 와 너무 맛있다!! 이게 뮌헨의 바이젠이구나 감동했다. 바이젠을 금세 비우고는 라거를 한잔 시켰는데, 라거는 바이젠에 비해 크게 감흥이 없었다. 독일에서 계속 다양한 맥주를 마시고 나서 보니, 초반에는 한국에서 마셔온 라거에 비해 탄산감이 많지 않아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잉거 레스토랑에서의 맥주는 분명히 놀랄 정도로 맛있었지만, 파울러너를 마실 때보다는 덜 즐거웠다. 아마도 호텔에서 배를 앓고 있을 동생을 두고 혼자 나와 마셔서 미안한 마음과, 혼자 마시고 있는 쓸쓸한 마음이 섞여서였을 것이다. 두 잔을 그런 마음으로 마시고는 동생이 기다리고 있는 호텔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