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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라토너 Sep 15. 2019

멈추지 못하는 사람들

제사는 계속된다

할아버지를 떠올리면 흰색 도포를 입고 붓글씨를 쓰고 입만 떼면 유교의 말씀을 했던 기억이다. 사람들에게 서예를 가르치고 좋은 말씀들을 알리느라 그 옛날에도 농사하나 짓지 않으시고 입으로만 아들들에게 밭 갈고 소를 키우게 하신 분이었다. 엄마는 할아버지와의 통화만으로도 치를 떨었다. 내가 어릴 때 서예학원을 다니고 휘호대회에서 상을 받아와도 탐탁해하지 않을 정도였다. 이런 할아버지는 3년 전에 돌아가셨다. 이번 추석에 엄마에게 이제 제사 가지고 뭐라고 할 사람도 없는데 그만해도 되지 않냐고 물었다. 안 그래도 큰엄마에게 슬쩍 운을 띄워봤었는데 대답을 전해 듣곤 할 말을 잃었다.

"아버님이랑 약속했다"

명절 때면 튀김 한 소쿠리, 전 한 소쿠리, 부침개 한 소쿠리는 기본으로 나온다. 찌고 말린 각종 생선도 제사상에 한 줄을 자리한다. 제사상에 오르지 않는 삶은 문어, 상어고기, 소갈비도 빠지면 섭섭하다. 채 열명이 되지도 않는 사람들이 먹을 양이다. 이것들은 고스란히 큰엄마와 우리 엄마의 몫이다. 예전에야 사촌언니들, 결혼 안 한 막내 고모, 나와 동생까지 둘러앉아 그들의 손이 되어주곤 했다. 시간이 지나 사촌언니가 출가했고,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시자 굳이 고모는 시골에 내려오지 않았다. 나도 피곤하다는 핑계로 몇 년 전부터 튀김 전쟁에 참전하고 있지 않다. 결국 하씨들은 다 빠지고 김씨와 박씨 며느리만 음식 가짓수와 양을 줄이지 않은 채로 열심히 만들어낸다.

아 튀김만 두 소쿠리구나..

이렇게 탄생한 음식들은 추석 당일 아침 차례상에 오른다. 여자들은 부엌에서 쉼 없이 음식을 내 오고, 남자들은 홍동백서니 어동육서니 하는 원칙에 입각하여 제기에 음식을 올려 차례상을 만들어낸다. 차례상이 완성되면 흰색 두루마기와 바지를 입은 남자들이 순서에 맞추어 조상님들 드시기 좋도록 음식을 떼 놓고 술도 따른다. 남자들이 절을 하고 난 뒤 여자들까지 같이 절을 한다. 차례상을 정리하고 다시 아침 밥상을 상다리가 부러지게 차린다. 이날이 아니면 언제 이렇게 먹겠나, 죄책감 없이 마음껏 먹는다.

"아, 사람이 옛날보다 줄었는데 음식 양이랑 가짓수 좀 줄이지. 기름 먹은 튀김 집에 싸가서 데워 먹어봐야 맛도 없구만"
"옛날에야 다들 못 사니까 명절 때라도 음식 많이 해서 배 터지게 먹고 나눠먹고 한 건데 요새 세상에...(말잇못)"

나의 투덜거림에 아빠까지 저렇게 말을 했다. 하씨도 이렇게 생각하는데 왜 김씨가 하씨 조상을 못 모셔서 안달인 것인가. 할아버지, 할머니 다 안 계신데 굳이 시골 내려와서 제사 지내야 하나, 큰아버지네 집에서 간소하게 하지 라고 했더니 그 집 식구들이 시골을 너무 좋아한단다. 사촌언니네 부부도 좋아해서 휴가 내고 와서 논다고 했다. 결국에는 자기네들 시골에서 명절 분위기 내는 것에 우리가 장단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그럴 거면 조연인 우리는 동의만 구하고 빠져도 되지 않는가. 하지만 엄마는 아마 말하지 못할 것이다. 그 말을 떼는 게 쉽지 않을 것임을 안다. 30년 넘게 해 왔기에 하지 않을 이유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나는 요즘 들어 당연하게 여기는 것에 대해 한 발 떨어져서 바라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중이다.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다, 그렇기에 명절 때마다 치르는 이 일련의 것들도 당연하지 않다. 엄마도 생각해봤으면 좋겠지만 생각의 주체가 그럴 마음이 없으면 내가 강요할 권리는 없다.

큰엄마의 음식 스케일과 취향에 대해서 얘기하다가 이번 동그랑땡이 한우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어차피 갈아버릴 고기에 한우라니. 우리 큰엄마 손 큰 거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 말을 듣고 밥 먹을 때 동그랑땡을 집어 먹었던 감각을 떠올려보니 예전 것보다 씹는 식감이 고급진 느낌이었던 것 같았다. 엄마에게 이번에는 진짜 튀김 안 가져갈 거라고 큰소리쳤는데, 그래도 없으면 서운하다며 싸는 엄마의 곁에서 한우 동그랑땡을 몇 개 더 집어넣었다. 비싸고 좋은 재료를 많이 쓰니 음식이 맛은 있다는 본인에게 전해지지 않을 칭찬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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