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기린 홀딩스가 지난달부터 'CoreMate'라는 AI 임원을 경영전략회의에 참여시키고 있다는 소식이 화제입니다. 12개 전문 분야별 '가상 인격'이 마케팅부터 법무, ESG까지 담당하며 경영진에게 객관적 데이터 기반의 논점을 제시합니다. "기후변화를 고려한 원료 조달도 함께 논의해야 합니다", "해당 브랜드의 국내 시장 존재 의미를 재검토해보겠습니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https://www.newsis.com/view/NISX20250804_0003277936
이 혁신적 시도를 보며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질문이 있습니다. 기업이 AI를 의사결정 테이블에 앉힐 수 있다면, 정부도 AI 보좌관을 국무회의에 배석시킬 수 있지 않을까요? 물론 실제 사람이 아닌 AI 시스템이 참석하는 형태가 될 것입니다.
우리나라에도 이와 같은 중요한 회의가 있습니다. 바로 국무회의입니다. 헌법 제88-89조에 따르면 국무회의는 "정부 권한에 속하는 중요 정책을 심의"하는 행정부 최고 의사결정 기관입니다. 예산안, 법률안, 조약안 등 국가 운영의 핵심 사안이 모두 이곳에서 결정됩니다.
흥미로운 점은 국무회의에 표결권을 가진 국무위원(장관) 외에도 '배석자'라는 독특한 참여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대통령령 「국무회의규정」 제8조는 대통령비서실장, 국가안보실장, 국무조정실장 등 12명을 상시 배석 대상으로 정하고, 대통령이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다른 고위공무원이나 전문가도 임시로 부를 수 있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배석자는 표결권은 없지만 발언권은 있습니다. '결정권 없이 영향력을 행사하는 고위 정책 자문 채널'인 셈입니다. 실제로 배석자들은 정책 형성 단계에서 전문적 설명과 부처 간 조정 기능을 수행하며, 의사결정에 실질적 영향을 미칩니다.
그렇다면 AI 보좌관이 바로 이 '배석' 지위로 참여한다면 어떨까요?
국무회의장, 모든 카메라가 돌아가는 생중계 상황을 상상해보겠습니다.
부동산 정책 현안에 대해 질문이 던져집니다.
"신축 아파트 분양가상한제 적용 기준이 정확히 어떻게 되나요?"
회의실에 잠깐의 침묵이 흐릅니다.
"음... 공시지가 기준으로..."
"조정대상지역에서는..."
하지만 구체적인 수치나 정확한 기준을 즉석에서 답하지 못합니다.
결국 "정확한 기준을 확인해서 다시 보고해 주세요."라는 말이 나옵니다.
회의는 잠시 어색한 분위기가 됩니다.
질문과 동시에 명확한 답변이 가능했을 것입니다. "주택법 시행령 제73조에 따르면 분양가상한제는 조정대상지역 내 공시지가 1㎡당 370만원 이상 지역에서 연면적 85㎡ 초과 주택에 적용됩니다. 현재 서울 25개구 전체와 경기 13개 시·군이 해당되며, 평균 분양가 인하 효과는..."
회의 흐름이 끊기지 않고, 더 깊이 있는 정책 논의로 자연스럽게 이어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물론 우려되는 지점들도 만만치 않습니다.
책임성의 딜레마가 가장 심각합니다. AI 보좌관이 잘못된 정보를 제공하거나 편향된 분석 결과를 내놓았을 때 누가 책임을 질 것인가요? AI 시스템을 개발한 업체인가요, 아니면 데이터를 제공한 해당 부처인가요? 특히 AI의 조언에 기반한 정책 결정이 국가적 손실을 초래했을 때의 책임 소재는 여전히 모호합니다.
기술적 한계와 편향성은 더욱 복잡한 문제입니다. 아무리 객관적이라 해도 AI는 결국 인간이 만든 데이터로 학습합니다. 만약 과거 정책 데이터에 성별·지역·계층별 편향이 숨어있다면? AI는 그 편향을 고스란히 학습해 재생산할 위험이 있습니다. 더욱이 "국민 정서"나 "시대적 분위기" 같은 미묘한 정치적 맥락을 AI가 제대로 읽어낼 수 있을지는 여전히 미지수입니다.
보안 리스크는 국가 존립과 직결됩니다. 국무회의에 참석하는 AI는 당연히 국가 최고기밀에 접근하게 됩니다. 만약 해킹이나 사이버 공격으로 이 시스템이 뚫린다면 어떨까요? 경제정책 방향, 외교 전략, 국방 계획까지 모든 것이 적국에 노출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AI 시스템 자체가 조작당해 잘못된 정보를 제공한다면 그 파급효과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이런 우려들을 해결하는 핵심은 소버린 AI(Sovereign AI) 구축입니다. 우리 국정 운영을 아무 AI에게나 맡길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무엇보다 국산 AI 모델 개발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데이터 주권, 알고리즘 투명성, 보안 통제권을 완전히 확보한 상태에서만 AI 보좌관 도입을 논의할 수 있습니다. 국산 대규모언어모델(LLM)을 정부 특화 버전으로 발전시키는 것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AI 보좌관의 국무회의 배석은 불가능한 일일까요?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다만 비공개 회의부터 시작하는 단계적 접근이 현명할 것입니다.
1단계로 내부 정책검토회의부터 시작할 수 있습니다. 언론에 공개되지 않는 비공개 정책조정회의에서 AI 분석관이 참여해 실시간 데이터 분석과 정책 시뮬레이션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정치적 부담 없이 실제 효과를 검증할 수 있습니다.
2단계는 경제관계장관회의 등 분야별 회의 확대입니다. 비교적 기술적이고 데이터 중심적인 경제·산업 분야 회의에서 AI의 역할을 점진적으로 늘려볼 수 있습니다. "AI가 분석한 경제지표에 따르면..."이라는 식으로 자연스럽게 녹여내는 것입니다.
3단계에서는 공개 회의 시범 참여로 발전시킵니다. 충분한 내부 검증을 거쳐 국민들에게도 "AI가 이런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는 점을 자연스럽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내부에서 차근차근 시도 해보고, 익숙해지면 공개하기" 방식이라면 리스크는 최소화하면서도 혁신의 실익은 충분히 취할 수 있습니다.
기린 홀딩스 사례에서 가장 주목할 점은 최고 경영진이 직접 AI를 경영전략회의에 참여시켰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실무진이 AI 도구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최고 의사결정 테이블에 AI를 앉힌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AI 혁신의 시작점입니다.
조직 변화 이론에 따르면, 혁신적 기술 도입은 반드시 "위에서부터의 변화(Top-down Change)"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아무리 좋은 기술이라도 최고 리더가 직접 사용하지 않으면 조직 전체는 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냥 유행 따라 하는 것 아닌가"라는 의구심만 키울 뿐입니다.
AI가 인간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보완하는 역할로 정부에 참여하는 것은 더 이상 SF 영화 속 이야기가 아닙니다. 기린 홀딩스가 보여준 것처럼, 이미 현실이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점진적 변화만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디지털 대전환 시대에 필요한 것은 과감한 결단입니다. 기린 홀딩스도 CEO가 직접 AI를 경영진 회의에 참여시키는 파격적 결정을 내렸기 때문에 주목받을 수 있었습니다.
빠른 변화는 큰 충격에서 시작됩니다. 세계가 AI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앞다퉈 변화하고 있습니다.
AI 보좌관의 국무회의 배석, 이제는 '만약에'가 아닌 '언제'의 문제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