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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빗장이 풀린다. AI, 정부라는 미지의 영역으로

그들이 노리는 것은 데이터인가, 아니면 공공의 질서 그 자체인가.

by 서지삼

거대한 체스판 위에서 누구나 예상했던 바로 그 한 수가 두어졌습니다. 고요하던 판에 조용한 균열을 일으킨 것은 두 개의 뉴스였습니다. 하나는 오픈AI, 구글, 앤트로픽이 미국 연방정부라는 '성채'의 문을 열었다는 소식, 다른 하나는 이 거인들이 동시에 한국을 향해 깃발을 꽂았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미국 연방총무청(GSA, General Services Administration)이 Gemini, Chat GPT, Claude라는 이 시대의 AI 3대장에게 ‘다중수상일정(MAS, Multiple Award Schedule)’ 자격을 부여했습니다. 대한민국에서는 오픈 AI(Chat GPT)와 Anthropic(Claude)이 한국 사무소를 열기로 했습니다. 이 두 사건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이것은 민간 시장이라는 익숙한 전쟁터를 넘어, '공공 데이터'라는 무기와 '글로벌 영토'라는 새로운 왕좌를 차지하기 위한 AI 전쟁의 2막이 올랐다는 선전포고입니다.

https://www.fnnews.com/news/202508061409362426


정부데이터 개척시대가 열리다

미국 연방총무청이 AI 3대장에게 ‘다중수상일정(MAS, Multiple Award Schedule)’ 자격을 부여한 것은, 단순히 정부에 물건을 팔 수 있는 ‘판매 허가권’이 아닙니다. 다중수상일정(MAS)은 정부가 사전에 여러 공급업체와 특정 제품 및 서비스에 대한 계약을 미리 체결해 놓는 제도로, 각 정부 기관이 복잡한 입찰 과정 없이 신속하게 검증된 서비스를 구매할 수 있도록 만든 일종의 '정부용 온라인 쇼핑몰'입니다. 이는 한국의 조달청이 운영하며 '나라장터 종합쇼핑몰'을 통해 제공되는 '다수공급자계약' 제도와 사실상 동일한 개념입니다. 이 목록에 포함되었다는 것은 곧 미국 정부 전체를 대상으로 한 초고속 공급망에 올라탔다는 의미입니다. https://techcrunch.com/2025/08/05/us-adds-openai-google-and-anthropic-to-list-of-approved-ai-vendors-for-federal-agencies/


이것은 민간에서는 결코 손에 넣을 수 없는 최고급 공공 데이터라는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황금 열쇠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국세청(IRS)의 수십 년간 축적된 세금 데이터, 질병통제예방센터(CDC)의 방대한 의료 기록, 국립해양대기청(NOAA)의 정밀한 기후 데이터까지. 이 데이터들은 정부가 관리하는 만큼 정확도와 신뢰도가 민간 데이터와는 비교 불가하고, 국가 단위로 수집되어 그 양부터 차원이 다르며, 오직 정부만이 접근할 수 있는 완벽한 독점성을 가진 그야말로 '황금 데이터'입니다. 이제 이 데이터를 먹고 자란 AI는 어떻게 될까요? IRS의 데이터로 파인튜닝된 금융 AI는 월스트리트의 그 어떤 모델보다 정확한 예측을 내놓을 것이고, CDC의 데이터로 학습한 헬스케어 AI는 신약 개발의 패러다임을 바꿀 것입니다. 이것은 공정한 경쟁이 아니라, 최신예 스텔스 전투기와 구식 프로펠러기의 싸움과도 같습니다.


'신뢰'라는 이름의 월드-워런티

오픈AI와 앤트로픽이 미국 정부의 승인을 받으면서 동시에 한국 시장의 문을 두드린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미국 연방정부의 공식 인증은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한 ‘신뢰 보증수표’나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과거에는 ‘더 뛰어난 성능’이 유일한 기준이었다면, 이제는 ‘신뢰와 안전’이 새로운 평가 기준이 되고 있습니다.


마치 잘 짜인 각본처럼 움직입니다. 첫째, "세계 최강대국 미국 정부가 인정한 기술력과 보안"이라는 타이틀 하나만으로 다른 국가 정부와 기업들을 설득하는 데 드는 시간과 비용이 극적으로 줄어듭니다. 둘째, 안정적인 정부 계약은 막대한 현금 흐름을 만들어내고, 이는 곧 해외 시장 개척을 위한 ‘실탄’이 됩니다. 셋째, 미중 기술 패권 경쟁 속에서 ‘미국 정부의 파트너’라는 지위는 서방 동맹국 시장에서 그 어떤 마케팅보다 강력한 무기가 됩니다. 특히 한국은 챗GPT 유료 구독자 수가 전 세계 2위에 달하는, 놓칠 수 없는 핵심 시장입니다. 이들은 정부 인증이라는 ‘신뢰 자산’을 바탕으로 한국 시장을 완벽히 장악하고, 이를 아시아 전체로 뻗어나가는 전략적 교두보로 삼으려는 것입니다.


가장 조용한 전쟁, '표준'을 지배하는 자

사실 AI 3대장은 민간 시장에서는 이미 사실상의 '표준'과 같은 지위를 차지했습니다. 이제 그들의 다음 목표는 명확합니다. 바로 공공 분야입니다. 정부 승인을 발판 삼아, '규제 표준의 내부자 효과'를 통해 공공 영역의 법률, 제도, 규제라는 더 높은 차원의 게임에서까지 승기를 잡으려는 것입니다. 이번 정부 승인은 바로 이 거대한 전략의 핵심이며, AI 경쟁의 룰 자체를 바꾸고 있습니다.


여기서 가장 주목해야 할, 어쩌면 가장 무서운 점은 바로 ‘규제 표준의 내부자 효과’입니다. 아주 간단히 말해, 맨 처음 경기에 참여한 선수가 직접 경기 규칙을 만드는 것과 같습니다. 가장 먼저 정부의 신뢰를 얻은 기업들은 미래의 AI 관련 법과 제도를 만드는 과정에 깊숙이 관여하며 사실상의 '룰메이커(Rule-maker)'가 됩니다. 이들의 기술이 표준이 되고, 이들의 윤리 가이드라인이 업계의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이는 후발 주자들에게 보이지 않는 거대한 장벽을 쌓아 올리는 효과를 낳습니다. 후발 주자들은 이미 자신들의 최대 경쟁자가 설계한, 완벽하게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싸워야 하는 불리한 처지에 놓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경쟁이 아니라, 이미 정해진 승패를 따라가는 것에 가깝습니다.


기로에 선 한국, ‘데이터 식민지’ 혹은 ‘디지털 주권국’

이제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국가들은 피할 수 없는 선택의 기로에 섰습니다. 압도적인 성능과 안정성을 갖춘 글로벌 표준에 탑승할 것인가, 아니면 험난하더라도 우리만의 ‘디지털 주권’을 지켜낼 것인가? 딜레마는 명확합니다. 자체 AI 역량을 키우기엔 시간과 돈이 부족하고, AI 3대장의 서비스는 너무나도 매력적입니다. 심지어 미국 정부라는 막강한 보증까지 등에 업었습니다. 단기적으로는 이들의 서비스를 적극 활용하되, 한국 내 데이터센터 설립이나 고용 창출과 같은 ‘반대급부’를 고려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이들과의 협력을 통해 기술과 노하우를 흡수하며, 중장기적으로는 오픈소스 생태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우리만의 AI 생태계를 구축하는 투트랙 전략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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