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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동사무소가 AI 개발사가 되다

딥시크가 쏘아올린 작은 공, 풀뿌리 AI 혁신 전쟁

by 서지삼

"부산 사하구가 AI를 900만 원에 직접 만들었다?"

이 문장을 처음 들었을 때, 많은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했을 것입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AI를 행정 현장에 도입한다는 것은 거대한 예산과 복잡한 절차가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는 수억 원대의 예산을 들여 외부 업체에 발주하는 것이 당연했고, 기초지자체가 자체적으로 AI를 개발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상황이 달랐습니다. 공무원 네 명이 직접 설계와 개발을 맡아, 외부 서버가 아닌 내부망에서 안전하게 작동하는 AI 업무 비서를 완성한 것입니다. 그것도 1천만 원도 안 되는 예산으로 말입니다.

https://news.kbs.co.kr/news/pc/view/view.do?ncd=8327387

이 사건은 단순한 지방정부의 IT 실험을 넘어섭니다. AI 혁신이 이제 중앙부처나 대기업의 영역을 넘어, 행정의 가장 말단까지 닿을 수 있는 시대가 도래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 변화의 밑바탕에는 2025년 초 전 세계를 뒤흔든 '딥시크(DeepSeek) 충격'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딥시크 충격 – 글로벌 AI 판도의 균열

중국의 AI 기업 딥시크가 발표한 R1 모델은 글로벌 AI 시장의 판도를 바꿔놓았습니다. 강화학습을 활용해 고도화된 추론 능력을 갖춘 이 모델은, 여러 벤치마크에서 미국 OpenAI의 o1과 유사한 수준의 성능을 보여주었습니다. 기술적으로 눈에 띄는 점은 단순히 성능만이 아니었습니다. 딥시크는 모델 가중치와 학습 세부 내용을 함께 공개하는 오픈웨이트 전략을 택했습니다. 이로 인해 전 세계의 연구자와 개발자들이 모델을 자유롭게 재사용하거나 튜닝할 수 있게 되었고, AI 기술의 재현 가능성이 한층 높아졌습니다. 여기에 더해, API 단가를 기존 미국 모델 대비 한 자릿수, 많게는 수십분의 1 수준으로 낮췄습니다. AI를 쓰고 싶어도 비용 장벽 때문에 주저했던 기관과 기업들에게는 엄청난 가격 파괴였습니다.

물론 이 과정에서 논란도 있었습니다. 일부에서는 미국 모델의 추론 기능을 '복제'했다는 의혹을 제기했고, 기술적으로는 '증류(distillation)'에 해당한다는 분석도 나왔습니다. 하지만 법적으로 확정된 사실은 아니었고, 오히려 중요한 것은 이 사건이 "고성능 AI는 비싸고 폐쇄적이어야 한다"는 기존 상식을 무너뜨렸다는 점입니다.


미국 AI 기업들의 전략 변화

딥시크의 등장은 미국 AI 기업들의 전략에도 변화를 강요했습니다.

첫째, 최고 성능의 프론티어 모델을 무분별하게 공개하던 관행이 사라졌습니다. 오히려 기술 유출과 복제 위험을 경계하며, 내부 검증과 제한적 공개를 택하는 경향이 강해졌습니다.

둘째, 가격 경쟁이 본격화됐습니다. OpenAI와 Anthropic은 정부와 교육 시장을 대상으로 파격적인 초저가 공급 정책을 내놓았고, ChatGPT API 가격도 인하했습니다.

셋째, 부분적 개방 전략이 확산됐습니다. OpenAI는 오픈웨이트 모델을 공개하며 온프레미스 수요를 흡수했고, 이는 보안이 중요한 기관에서 환영받았습니다.


글로벌 변화가 동사무소까지 연결되는 이유

세계적인 AI 가격 경쟁과 공개 전략의 변화가, 왜 동사무소 같은 가장 말단 행정 현장에까지 영향을 줄까요? 얼핏 보면 거리가 먼 이야기 같지만, 사실은 매우 직결된 문제입니다.


첫째, 가격 하락입니다. 불과 1~2년 전만 해도 최신 AI 모델을 쓰려면 매달 수백만 원, 혹은 수천만 원의 예산이 필요했습니다. 이 정도면 동사무소 단위에서는 엄두도 못 냈습니다. 그러나 딥시크 이후 촉발된 글로벌 가격 경쟁으로, 이제는 한 달에 수십만 원, 심지어는 무료에 가까운 비용으로도 모델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이 변화만으로도 동사무소는 더 이상 "예산이 없어서 못 한다"는 말을 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둘째, 오픈웨이트 공개입니다. 과거의 AI 서비스는 대부분 외부 클라우드에서만 작동했기 때문에, 개인정보나 민감한 행정 데이터를 다루는 동사무소 업무에는 적용이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모델 가중치가 공개되어, 동사무소 내부망에 직접 설치해 운영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주민등록, 기초생활보장, 복지급여와 같은 민감한 데이터도 외부로 나가지 않고 내부에서만 AI 분석과 처리가 가능해집니다. 이건 행정 보안 규정상 매우 큰 의미를 가집니다.


셋째, 개발 장벽의 해소입니다. AI 모델과 함께 동봉되는 설치 매뉴얼, 예제 코드, 샘플 데이터, 튜토리얼 영상이 전 세계적으로 공유되면서, 전문 프로그래머가 아니어도 현장 직원이 AI 시스템을 구현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과거에는 코딩 언어와 서버 구축 지식이 필수였지만, 이제는 '노코드 툴'이나 '간단한 설정 메뉴'만 익히면 됩니다. 덕분에 동사무소의 행정직원도 '현장 문제 해결사'이자 AI 서비스 기획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세 가지 요소(가격 하락, 오픈웨이트 공개, 개발 장벽 해소)가 맞물리면서 AI는 중앙부처나 대기업의 전유물이 아니라, 동사무소와 같은 행정 말단까지 내려올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이 환경이 만들어지는 순간, 행정 혁신의 속도와 폭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커집니다.


동사무소는 AI 혁신의 최적 무대

동사무소는 행정의 '마지막 접점'이자 '최전선'입니다. 주민등록 등·초본 발급, 전입·전출 신고, 각종 복지 서비스 신청, 기초연금과 아동수당 지급, 민원 상담, 지역 안전 관련 신고 접수, 각종 증명서 발급까지, 하루에도 수백에서 많게는 수천 건의 업무를 처리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업무들이 사람의 삶과 가장 밀접하게 연결된 케이스라는 점입니다. 복지, 환경 민원, 재난 신고, 주차 문제, 소음 민원 등 업무 분야가 매우 다양하고, 동시에 처리해야 할 사례 수도 많습니다. AI 입장에서 보면, 이런 환경은 '문제 정의'의 보고(寶庫)입니다. 현장에서는 매일 새로운 유형의 사례가 등장하고, 그 사례를 해결하기 위한 절차와 규칙이 축적됩니다.


예를 들어, 한 동사무소에서 '기초연금 신청서 누락 방지 AI'를 만든다면, 이는 바로 현장에서 필요한 기능이자 다른 동사무소에서도 재활용 가능한 솔루션이 됩니다. 이런 실험과 적용이 가능하다는 점이 동사무소의 강점입니다. 중앙부처나 광역단체는 제도 설계와 예산 조정에 집중하지만, 동사무소는 매일 부딪히는 문제를 곧바로 AI로 풀어볼 수 있는 '테스트 베드' 역할을 합니다.


즉, 동사무소는 다양한 문제, 즉시 실행, 직접 검증이라는 세 가지 조건을 모두 갖춘, AI 혁신에 가장 적합한 행정 현장입니다. 기술이 값싸고 쉽게 설치 가능해진 지금, 동사무소는 그 누구보다 빠르게 AI를 활용해 행정 효율과 주민 서비스를 개선할 수 있는 위치에 있습니다.


탑다운 방식의 한계

과거에는 이런 혁신이 쉽지 않았습니다. 행정 혁신은 대부분 중앙에서 기획해 전국에 똑같이 적용하는 탑다운 방식이었습니다. 물론 이런 방식은 규모의 경제와 표준화를 가능하게 하지만, 지역별 특수성을 반영하기는 어렵고 속도도 느렸습니다. 현장과 개발 조직 사이의 거리는 멀었고, 자동화 프로젝트는 종종 마지막 10%의 완성도를 채우지 못한 채 마무리되었습니다.


사하아이 : 혁신의 신호탄

부산 사하구의 '사하아이'는 이러한 한계를 정면으로 깨뜨린 사례입니다. 국산 오픈웨이트 모델인 EXAONE 3.5를 기반으로, 약 900만 원의 예산과 내부 인력만으로 구축되었습니다. 문서 요약, 쪽지 작성, 질의응답 등의 기능을 수행하며, 내부망에서 작동해 데이터 보안까지 확보했습니다. 외부 의존도를 최소화하고, 무엇보다 다른 지자체에서도 재현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 점이 중요합니다.


비개발자 개발 시대의 도래

예전에는 AI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서는 고급 프로그래밍 언어를 다루고, 복잡한 데이터 처리 과정을 설계하며, 서버와 네트워크까지 직접 설정할 수 있는 전문 개발자가 필요했습니다. 동사무소 같은 행정 현장에서는 이런 인력을 상시로 확보하기 어렵고, 외부 용역에 의존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첫째, 로우코드(Low-code)·노코드(No-code) 툴의 확산입니다. 로우코드 툴은 드래그 앤 드롭 방식의 화면 구성과 간단한 설정만으로, 복잡한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게 해줍니다. 노코드 툴은 아예 프로그래밍 언어를 몰라도 됩니다. 마치 엑셀로 계산표를 만드는 것처럼, AI 챗봇, 민원 접수 앱, 업무 자동화 절차를 구성할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행정직 공무원도 "기획자이자 개발자" 역할을 겸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둘째, 오픈웨이트(Open-weight) 모델의 내부망 배치가 가능해졌습니다. 과거에는 대형 AI 모델이 모두 외부 클라우드에서만 작동했기 때문에 개인정보나 민감한 데이터가 외부로 나갈 수 있다는 우려가 컸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모델의 가중치와 구조 자체를 내려받아 동사무소 내부 서버에서 실행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 행정 데이터는 절대 외부로 나가지 않으면서도 AI 분석과 예측 기능을 활용할 수 있습니다. 주민등록, 복지 수당 지급, 기초연금 관리 같은 업무를 안전하게 자동화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셋째, 업무 전반의 AI 지원 범위 확대입니다. 초기에는 AI가 단순한 질의응답과 번역, 문서 요약 정도에 머물렀지만, 이제는 행정 업무 전체를 지원하는 '전용 에이전트(Agent)'로 진화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동사무소 민원창구에 '복지 민원 전담 AI'를 두면, 민원인의 기초정보와 요청 사항을 확인해 적절한 복지 서비스 항목을 추천하고, 신청서 작성까지 안내할 수 있습니다. '문서 처리 전담 AI'는 하루 수십 건의 보고서를 자동 작성하거나 분류해 담당자 검토 시간을 절반 이상 줄여줍니다. '정책 자료 검색 AI'는 방대한 법령과 지침에서 필요한 문장을 바로 찾아내 회신 문안을 초안 형태로 제공합니다.


결국, "비개발자 개발" 시대의 핵심은 기술이 아니라 환경입니다. 값싸고 접근하기 쉬운 AI 모델, 내부망에서 안전하게 운영할 수 있는 오픈웨이트, 그리고 사용자가 직접 만들 수 있는 로우코드·노코드 플랫폼이 결합되면서, 동사무소 같은 말단 행정 현장에서도 스스로 필요한 AI 도구를 기획·개발·운영할 수 있는 여건이 갖춰진 것입니다. 이 변화는 행정의 속도를 높이고, 주민 서비스의 품질을 향상시키며, 중앙정부 의존도를 줄이는 중요한 전환점이 될 것입니다.


동사무소 AI 발전 로드맵

만약 지금의 변화가 꾸준히 이어진다면, 동사무소의 AI 활용은 점차 체계적인 단계로 확장될 수 있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문서 요약과 검색을 돕는 단순한 챗봇 형태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주민이 제출한 서류를 자동으로 분류하거나, 담당자가 필요한 규정 조항을 몇 초 만에 찾아주는 방식입니다. 업무량은 줄고, 민원 응대 속도는 빨라질 것입니다.


그 다음 단계에서는 부서별 특화 AI 에이전트를 두는 모습이 그려집니다. 예를 들어 복지팀에는 복지 서비스 안내와 신청서 작성 지원을 전담하는 AI, 민원팀에는 민원 유형을 즉시 분류하고 처리 절차를 안내하는 AI가 자리 잡는 식입니다. 각 부서가 다루는 특수한 업무에 맞춘 AI가 맞춤형으로 배치되면, 동사무소 내부에서 AI는 '팀원'처럼 활동하게 될 것입니다.


세 번째 단계에서는 AI가 동사무소의 물리적 환경과도 연결될 수 있습니다. 센서와 카메라, 각종 행정 시스템과 실시간으로 연계된 '상황 인지형 서비스'가 확산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폭우가 쏟아질 때 하천 수위 센서 데이터가 AI로 전달되고, 해당 AI가 위험 지역 주민 명단을 조회해 즉시 연락망을 가동하는 식입니다.


마지막 단계로는, 지속적으로 학습하고 개선되는 '지역 맞춤형 운영 AI'를 상상해볼 수 있습니다. 주민 민원 패턴, 계절별 행정 수요, 재난 대응 경험 등 축적된 데이터를 AI가 분석하고,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업무 절차를 제안하는 것입니다. 이때의 AI는 단순 보조 도구를 넘어, 동사무소의 운영 방식 전반을 함께 설계하는 파트너가 될 수 있습니다.


중앙정부 역할과 과제

이런 변화가 현실이 되려면 중앙정부의 역할도 지금과는 달라져야 할 것입니다. 먼저, 전국 어디서나 AI를 안전하고 효율적으로 도입할 수 있도록 공통 기반 인프라를 마련해야 합니다. 표준 아키텍처, API, 데이터 스키마 같은 요소들이 사전에 구축·배포된다면, 각 동사무소는 복잡한 기술 설계 없이도 AI를 바로 적용해볼 수 있습니다.


또한, 중앙정부가 직접 나서서 현장의 아이디어를 발굴하는 장을 만드는 것도 중요합니다. 지역별 해커톤, 공무원 AI 경진대회, 현안 해결 프로젝트 등을 열어 동사무소 직원들이 자유롭게 시도하고 실패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한다면, 행정 현장 안에서 혁신적인 서비스가 자생적으로 나올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마지막으로, 이렇게 발굴된 우수 사례를 빠르게 전국으로 확산시키는 구조가 필요합니다. 기술적·법적 검토를 거쳐 안정성이 확보된 AI 서비스는 표준 모듈과 조달 가이드 형태로 배포해, 다른 동사무소에서도 '원클릭'으로 설치·운영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한 지역에서 시작된 작은 혁신이 순식간에 전국으로 번져나갈 수 있습니다.


리스크와 대응 전략

물론 리스크도 있습니다. 데이터 보안 문제를 해결하려면 내부망, 접근 통제, 로깅과 같은 안전장치를 기본값으로 설정해야 합니다. 저가 모델의 품질에 대한 우려는 해당 기관의 데이터로 모델을 튜닝하고, 성능 평가 지표를 설정함으로써 해소할 수 있습니다. 법적 논란은 저작권과 개인정보 보호 규정을 준수하며 사전 검토를 거치는 방식으로 예방해야 합니다.


드디어 시작되는 아래로부터의 혁신

딥시크 이후 촉발된 가격 하락과 오픈웨이트 확산은, AI 혁신의 주도권을 중앙에서 기초지자체와 현장 공무원에게까지 내려보냈습니다. 앞으로는 수백 개의 기초지자체, 수만 명의 행정 일선이 각자 '킬러 행정 서비스'를 개발하는 시대가 옵니다. 중앙정부는 인프라를 깔고, 실험을 장려하며, 우수사례를 표준화해 전국에 확산시키는 AI 촉진 플랫폼으로 전환해야 합니다. 혁신의 방향은 위에서 아래가 아니라, 아래에서 위로 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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