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의존”을 외면할 때, 기술 강국은 모래 위의 성이 된다
지금 세계는 눈에 보이지 않는 전쟁을 치르고 있습니다. 총과 탱크 대신 데이터와 알고리즘이 무기가 되는 전쟁, 바로 소버린 AI를 둘러싼 기술 주권 경쟁입니다. 유럽연합은 이미 2020년부터 '디지털 주권'을 외치며 미국 빅테크 의존도를 줄이기 위한 구체적인 로드맵을 실행하고 있고, 중국은 자체 AI 생태계 구축에 연간 수백조 원을 쏟아붓고 있습니다. 일본은 소프트뱅크를 중심으로, 프랑스는 미스트랄 AI를 통해 유럽형 대규모 언어모델 개발에 나섰습니다.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인공지능 서비스가 어느 날 갑자기 멈춘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금융 거래가 마비되고, 의료 진단 시스템이 작동을 멈추며, 자율주행차는 길에서 멈춰 설 것입니다. 이것은 공상과학 소설이 아닙니다. 한국어 데이터는 전체 학습 데이터의 0.01%도 안 되는 극소량에 불과하고, AI 연산의 핵심인 GPU는 엔비디아가 전 세계 시장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으며, 기초 모델 기술은 오픈AI, 구글, 앤트로픽 같은 소수 기업의 전유물입니다. 우리는 AI 강국을 외치지만, 실상은 타인이 만든 인프라 위에 간신히 집을 올리고 있는 형국입니다. 더 우려스러운 것은 이러한 의존 구조가 단순한 기술적 종속을 넘어 경제 안보와 국가 경쟁력의 근간을 흔들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이 모습이 낯설지 않습니다.우리 반도체 산업도 정확히 같은 길을 걸었습니다.
그때의 이름은 초순수였습니다.
반도체 공장에서 물은 단순한 물이 아닙니다. 웨이퍼 한 장을 만드는 데 2,000리터가 넘는 물이 필요하고, 이 물은 불순물이 1ppb, 즉 10억분의 1도 허용되지 않는 극도로 정제된 상태여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초순수입니다. 일반 수돗물을 거르고 또 거르고, 역삼투압과 이온교환, 자외선 살균과 한외여과막을 거쳐 만들어지는 이 물은 말 그대로 반도체의 혈액이자 생명수입니다. 초순수의 순도가 조금만 떨어져도 수십 나노미터 공정에서는 치명적인 불량이 발생하고, 수율은 곤두박질치며, 결국 공장 전체가 멈춰 설 수 있습니다.
그런데 1983년 삼성전자가 64K D램을 개발하며 한국 반도체 신화의 첫 페이지를 쓰던 그 순간부터, 2024년까지 무려 41년 동안 우리는 이 초순수를 만드는 핵심 기술과 설비를 일본 기업에 전적으로 의존해왔습니다. 오르가노, 쿠리타, 노무라마이크로사이언스 같은 일본 기업들이 설계하고 시공한 시설에서만 초순수가 공급되었고, 핵심 부품인 이온교환수지, RO막, UF막 등도 모두 일본산이었습니다. 세계 메모리 반도체 시장의 60% 이상을 장악하고, 시스템 반도체에서도 빠르게 성장하던 한국이 정작 가장 기초적인 물 하나를 독립적으로 만들지 못했던 것입니다.
물 정도야 금방 만들 수 있지 않겠느냐고 생각하기 쉽지만, 현실은 전혀 달랐습니다. 일본은 1960년대부터 초순수 기술 개발에 투자하기 시작해 전 세계 관련 특허의 71%를 보유하게 되었고, 핵심 소재와 부품 시장의 90% 이상을 장악하며 완벽에 가까운 독점 체제를 구축했습니다. 초순수 플랜트는 단순한 정수 시설이 아니라 수백 개의 공정이 유기적으로 연결된 복잡한 시스템이며, 각 공정마다 축적된 노하우와 데이터가 필요합니다. 이 기술 장벽은 너무 높아서 후발주자가 따라잡기는 거의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지금 AI 시장에서 미국 빅테크가 GPU와 기초 모델, 클라우드 인프라를 장악하고 있는 모습과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습니다.
2019년 7월 1일, 일본 정부가 한국에 대한 반도체 핵심 소재 3개 품목의 수출을 규제한다고 발표했을 때, 우리 산업계는 패닉에 빠졌습니다. 포토레지스트, 에칭가스,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단 세 가지 품목이었지만 이것들 없이는 반도체도, 디스플레이도 만들 수 없었습니다. 특히 EUV용 포토레지스트는 일본 기업이 전 세계 시장의 92%를 차지하고 있었고, 고순도 불화수소는 일본산이 아니면 대체재를 찾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그때 우리는 뼈아픈 질문 앞에 섰습니다. 과연 우리는 진짜 기술 강국인가, 아니면 핵심 부품과 소재를 남에게 의존하는 조립 공장에 불과한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인텔을 제치고 세계 반도체 시장을 주도한다고 자부했지만, 기초 소재 몇 가지에 산업 전체가 인질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순간이었습니다. 당시 삼성전자는 긴급히 소재 재고를 확보하고 대체 공급선을 찾느라 분주했고, 정부는 100대 핵심 전략품목을 선정해 국산화에 나서는 등 대응에 나섰지만, 이미 드러난 구조적 취약성은 쉽게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단지 반도체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오늘날 AI 산업에서도 똑같은 그림이 그려지고 있습니다. 네이버와 카카오가 아무리 혁신적인 AI 서비스를 만들어도, 그 바탕이 되는 GPU는 엔비디아에서 수입해야 하고, 기초 모델은 오픈AI나 구글의 것을 가져다 쓰거나 막대한 비용을 들여 따라 만들어야 합니다. 한국어 특화 모델을 만든다 해도, 학습에 필요한 컴퓨팅 자원부터 프레임워크, 심지어 학습 데이터 처리 도구까지 모두 외국 기업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2019년 일본의 수출 규제가 우리에게 던진 경고는 여전히 유효합니다.
그리고 2024년 12월, 마침내 역사적인 순간이 찾아왔습니다. SK실트론 구미2공장에서 국산 기술로 설계하고 국산 장비로 구축한 초순수 생산 시설이 본격 가동을 시작한 것입니다. 하루 1,200톤의 초순수를 생산할 수 있는 이 시설은 설계부터 시공, 운영까지 100% 국내 기술로 이루어졌고, 핵심 기자재의 70%를 국산화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41년간 이어진 일본 의존의 고리를 마침내 끊어낸 것입니다.
https://www.mk.co.kr/news/business/11212957
이 성과가 더욱 의미 있는 것은 단순히 기술적 성취를 넘어 생태계 전체의 변화를 이끌어냈다는 점입니다. 삼성엔지니어링이 설계와 시공을 맡았고, 코오롱인더스트리가 역삼투막을, 에코니티가 이온교환수지를, 퓨어스피어가 필터를 공급하는 등 국내 기업들이 협력해 완전한 국산 공급망을 구축했습니다. 더 나아가 이들 기업은 초순수 기술을 바탕으로 해외 시장 진출까지 모색하고 있습니다. 특히 대만과 미국에서 새로 짓는 반도체 공장들이 초순수 공급 파트너를 찾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 기업들이 새로운 기회를 잡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이 성공 뒤에는 보이지 않는 노력과 투자가 있었습니다. 2019년 일본 수출 규제 이후 정부는 소재·부품·장비 국산화에 5년간 20조 원을 투자했고, 기업들은 당장의 수익성보다 장기적 기술 자립을 선택했습니다. 초순수 국산화 과정에서도 초기에는 일본 제품 대비 성능이 떨어지고 가격도 비쌌지만, 국내 반도체 기업들이 꾸준히 테스트베드를 제공하고 피드백을 주며 기술 개선을 도왔습니다. 이러한 민관 협력과 장기적 관점의 투자가 없었다면 오늘의 성과는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초순수 국산화 사례는 단순한 산업 기술의 성취를 넘어 소버린AI 전략 수립에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합니다.
첫째, 공급망 전체를 아우르는 통합적 시야가 필요합니다. 초순수 사례는 기술 주권이 눈에 보이는 최종 제품만이 아니라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모든 요소를 포함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AI 분야에서도 화려한 애플리케이션이나 서비스 개발에만 집중할 것이 아니라, 데이터센터 인프라, AI 가속기 칩, 메모리와 스토리지, 네트워킹 장비, 심지어 전력 공급과 냉각 시스템까지 전체 스택을 고려해야 합니다. 특히 AI 모델 학습에 필수적인 대규모 컴퓨팅 클러스터 구축 기술, 분산 학습을 위한 고속 인터커넥트 기술, 효율적인 데이터 처리를 위한 스토리지 아키텍처 등 보이지 않는 인프라 기술이 진정한 경쟁력의 원천이 될 수 있습니다.
둘째, 현실적이고 단계적인 접근이 중요합니다. 초순수도 처음부터 100% 국산화를 달성한 것이 아니라 핵심 기자재 70% 국산화부터 시작해 점진적으로 자립도를 높여가고 있습니다. 소버린AI 역시 모든 것을 한 번에 독립시킬 수는 없습니다. 우선 한국어 데이터와 한국 특화 모델 개발처럼 우리가 경쟁 우위를 가질 수 있는 영역부터 시작하고, 점차 추론용 칩, 엣지 AI 디바이스, 특정 도메인 전문 모델 등으로 영역을 확장해 나가는 전략이 필요합니다. 동시에 국제 협력이 불가피한 영역과 반드시 자립해야 할 영역을 명확히 구분하고, 한정된 자원을 전략적으로 배분해야 합니다.
셋째, 위기를 혁신의 기회로 전환하는 리더십과 의지가 필요합니다. 2019년 일본의 수출 규제가 없었다면 초순수 국산화는 훨씬 더 늦어졌을 것입니다. 위기가 닥쳤을 때 단기적 대응에만 급급할 것이 아니라,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는 장기 전략을 수립하고 실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현재 AI 분야의 미국 의존도가 높은 상황도 역설적으로 우리만의 차별화된 AI 생태계를 구축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거대 언어모델 경쟁에서는 뒤처졌지만, 제조업 AI, 의료 AI, 도시 인프라 AI 등 특화 영역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만약 반도체 공정에서 초순수 공급이 하루만 끊겨도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웨이퍼 생산이 중단되고, 수천억 원의 손실이 발생하며,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 전체가 영향을 받게 됩니다. 초순수처럼 평소에는 당연하게 여겨지던 것이 사라질 때 비로소 그 중요성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AI 시대에도 이런 보이지 않는 의존성은 도처에 존재합니다. 파이썬 라이브러리 하나, 오픈소스 프레임워크 하나가 갑자기 사용 제한되거나 라이선스가 변경되면 수많은 AI 프로젝트가 멈춰 설 수 있습니다. 실제로 2023년 허깅페이스가 일부 모델의 라이선스를 변경했을 때 많은 기업들이 혼란을 겪었고, 엔비디아가 CUDA 사용 조건을 강화했을 때 대안을 찾느라 분주했던 사례가 있습니다. 클라우드 서비스 제공업체가 가격을 인상하거나 서비스 지역을 제한하면 AI 서비스의 수익성과 접근성이 크게 달라집니다.
더 근본적으로는 AI 모델 학습의 기반이 되는 인터넷 데이터 자체가 특정 언어와 문화에 편향되어 있다는 문제도 있습니다. 영어 중심의 데이터로 학습된 모델을 한국에 그대로 적용하면 문화적 맥락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잘못된 판단을 내릴 수 있습니다. 의료 AI가 서구인 중심 데이터로 학습되어 아시아인 진단에서 오류를 보이는 사례, 채용 AI가 특정 성별이나 인종에 편향된 결정을 내리는 사례 등이 이미 보고되고 있습니다. 이런 문제들은 단순히 모델을 개선한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데이터 수집부터 라벨링, 검증, 평가까지 전 과정에서 우리의 관점과 가치를 반영해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소버린AI는 단순히 AI 소프트웨어나 모델 개발의 문제가 아닙니다. 초순수가 인내와 노력 끝에 국산화에 성공했듯이, 진정한 기술 주권은 눈에 보이는 성과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기반까지 치밀하게 챙기는 세심함과 장기적 관점에서 완성됩니다.
초순수 국산화가 보여준 것처럼, 기술 자립의 길은 멀고 험하지만 불가능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당장의 효율성과 편의성에 안주하지 않고, 미래의 위험을 직시하며, 꾸준히 투자하고 협력하는 것입니다. 정부는 장기적 비전과 일관된 정책으로 뒷받침하고, 기업은 단기 수익을 넘어 기술 축적에 투자하며, 연구기관과 대학은 기초 연구와 인재 양성에 매진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실패를 용인하고 재도전을 격려하는 문화가 필요합니다. 초순수 국산화 과정에서도 수많은 시행착오가 있었지만, 그 경험이 축적되어 결국 성공으로 이어졌습니다.
반도체 강국에서 AI 강국으로 도약하려는 지금, 초순수 국산화의 교훈은 우리가 나아갈 방향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남들이 만든 기술 위에 잠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기반을 다지고 생태계를 만들어가는 것, 그것이 진정한 소버린AI의 길입니다. 초순수가 반도체의 보이지 않는 기반이었듯이, 우리가 지금 구축하는 AI 인프라와 생태계가 미래 세대의 디지털 주권을 지키는 보이지 않는 기반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