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양탕국 May 27. 2024

일과 연애 모두 잡아야 성공이라는 낡은 공식

<플러스 사이즈 그녀의 생존기>

적지 않은 나이의 싱글 여성. 정형화된 미의 기준에 한참 어긋나는 모습. 애매한 커리어. 잠재된 능력이 있지만 아직은 말 그대로 ‘잠재된’ 상태다. 뭘 해보려고 열심히 노력하지만 언제 빛을 볼 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런 그녀에게 어느 날 나타난 사랑. 이 사랑이란 놈은 너무나 막강하다. 그동안 꾹꾹 눌러가며 쌓아만 왔던 능력이 하나씩 봉오리를 맺고 틔우며 전문성과 타인의 인정까지 획득하지만, 사랑이 없다면 이 성취가 다 무슨 소용인가 싶다. 내 커리어는 승승장구인데 왜 공허할까. 하지만 한숨을 푹푹 내쉬던 날들도 안녕이다. 사랑마저 안정권에 진입! 일과 사랑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그녀는 이제 ‘진정한 행복’을 찾은 듯 크게 기뻐한다.


어디선가 많이 본 이야기다. 우리나라에서는 <내 이름은 김삼순>으로 대표되는, 그러니까 벌써 20년은 된 낡은 드라마 공식이다. 한 여성의 성장을 조명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한지 사랑까지 쟁취하고야 마는 것이다. 그런데, 그때는 통했지만 아직까지 계속되는 건 좀 시대착오적이지 않은가? 자칫하면 기껏 잘 쌓아둔 성장 서사마저 희미해질 수 있다.



[플러스 사이즈 그녀의 생존기. Survival of the Thickest. 2023]


사회적 이슈? 무겁지 않게 보여줄게!


바디 포지티브(body positive). 자신의 몸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자는 ‘자기 몸 긍정주의’를 뜻한다. 넷플릭스 드라마 <플러스 사이즈 그녀의 생존기>는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듯 바디 포지티브를 전면에 내세운다. 어릴 적부터 몸이 크다는 소리를 들은 스타일리스트 메이비스는 본인의 몸은 물론 스타일링해주는 다른 이들의 몸도 “있는 그대로 사랑할 것”을 주문한다. 이때 등장하는 인물들의 면면도 다양하다. 플러스 사이즈인 주인공 메이비스를 비롯해 드랙퀸, 트랜스젠더 등 자신의 몸을 한 번쯤 의심하거나 부정했을, 혹은 사회적 '아름다움'의 기준과 거리가 있는 사람들이 메이비스의 고객으로 등장한다.


주요 출연진들이 흑인인 만큼 인종차별 이야기도 놓치지 않는다. 뚱뚱한 흑인 여자 메이비스는 어린 시절부터 사회의 차별로 인해 마음에 생채기가 난 사람이다. 그러나 그 이야기들을 아주 자세하게 그려내지는 않는다. 깊이보다는 언급 그 자체에 의미를 두는 듯하다. 사회적으로 ’정상화‘의 범주를 벗어난 이들이 대거 등장한다는 점, 그들이 단순 코미디 요소가 아닌 사회적 이슈를 드러내기 위한 존재라는 점에 의의가 있다. 또한 이 드라마는 전형적 미의 기준을 벗어난 몸, 인종차별, ‘소수자'의 이야기를 우울하게 비추지 않는다. 메이비스가 제 몸과 타인의 몸을 긍정하듯 이 드라마에 나타나는 삶에 대한 전반적인 태도도 사뭇 긍정적이다. 그래서 드라마를 보는 동안 이 여자 메이비스를, 그 주변인들을 응원하게 된다.


스타일리스트로서 홀로서기한 메이비스 / 이미지 출처: imdb


일도 사랑도 회복(?)하는 성장 서사


첫 에피소드에서 메이비스는 5년 동안 함께한 연인과 이별한다. 남자친구 자크는 잘 나가는 포토그래퍼로, (잠재된) 능력을 갖춘 스타일리스트인 메이비스에게 일자리를 소개해주거나 업계 사람들에게 메이비스를 칭찬하며 그녀의 커리어에도 도움을 주던 존재였다. 그녀의 능력을 높이 사고 그녀에게 사랑을 속삭이던 자크는 메이비스와 정반대라 할 모습을 갖춘 늘씬한 모델과 바람을 피우고, 그 현장을 메이비스에게 들키기까지 한다. 그 자리에서 이별을 고한 메이비스는 자크와 함께 살던 아파트를 떠난다.


자크는 메이비스를 계속 잊지 못한다. 메이비스가 스타일리스트로 홀로서기를 하며 차근차근 성장하고 있을 때 자크는 커리어적으로 더 도움을 주겠다며 다시 만나기를 원하지만 메이비스는 거절한다. 같이 살던 집에 외간 여자를 불러 바람을 피운 주제에 네 커리어에 도움을 줄 테니 재결합하자고? 이 뻔뻔한 놈 좀 보게나! 그러나 분노할 겨를도 없이 메이비스는 단칼에 전 연인의 청을 거절한다.


사실 메이비스에겐 새로운 남자, 이탈리아에서 온 루카가 있다. 잘 나가던 전 남자친구 자크에 절대 떨어지지 않는 남자다. 장거리 연애를 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지만 그래도 메이비스와 루카는 서로에게 끌리는 마음을 접지 못한다.

메이비스가 새로운 사랑을 만나게 되는 건 예상 가능한 일이었다. 첫 회에서 믿었던 남자친구에게 배신을 당하고 갈 곳마저 없어진, 애매한 커리어마저도 남자친구와 연결점이 있어 미래가 더욱 막막한 메이비스의 상황이 그려졌기 때문이다. 주인공이 이것들을 하나씩 회복해 가며 성장하는 이야기를 그릴 것이라면 새로운 커리어에 새로운 사랑도 빠질 수 없다.


어머니(가운데)에 의해 교회에 끌려 간 메이비스(우)와 루카(좌) / 이미지 출처: imdb


일과 사랑 모두 완벽해야 진정한 성공일까?


행복한 일만 가득할 것 같았던 메이비스에게도 어려움은 닥친다. 홀로서기는 성공적이지만 일에 몰두하느라 자신을 돌보지 못하게 된 것이다. 에너지 넘치던 메이비스의 모습은 점차 희미해진다. 보수적인 어머니의 눈총에도 꿋꿋이 이어온 새로운 사랑, 루카와의 관계에도 의구심을 갖게 된다. 다른 연인과 달리 쉽게 만날 수 없는 장거리 연애는 힘든 메이비스를 더욱 피로하게 만든다. 루카는 깜짝 이벤트로 이탈리아행 비행기 티켓을 보내지만 메이비스는 본인이 갈 수 없는 상황을 몰라주는 것만 같은 루카에게 되려 짜증을 낸다. 그리고 메이비스는 먼저 이별을 고한다.


문제는 여기부터다. 일 때문에 사랑을 포기하기로 한 메이비스는 다시 일에 집중한다. 그러나 일적으로 승승장구하는 와중에도 공허하고 우울해 보인다. 그토록 원했던 홀로서기인데, 능력을 인정받게 된 지금 그녀는 기쁘지 않다. 왜? 사랑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물론 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충분히 슬퍼할 수 있고 그렇게 하는 게 보통 우리들의 모습이다. 그러나 시종 공허한 메이비스의 표정, 심지어 전 연인 자크와 다시 만나기로 한 결정을 보면 마치 초반에 강조된 스타일리스트로서의 성취가 무용해지는 기분마저 든다.


결국 메이비스는 자크와 다시 헤어지고 이탈리아로 날아가 루카의 품에 안긴다. 일이 너무 바빠 이탈리아엔 갈 수 없다던 메이비스는 사랑을 위해 바다를 건너 다른 대륙으로 향한다. 사랑의 불완전성, 아니 불안정성에 휘둘리던 메이비스는 비로소 안정권에 진입한 사랑을 확인한 후에야 ‘진정한 행복’을 얻은 듯 크게 기뻐한다. 이 드라마의 마지막 장면(이 글을 쓰는 때엔 시즌1까지 나왔으므로 마지막 회차는 시즌1의 8회를 의미함)에서 메이비스는 지난 몇 회차에서 보인 우울함과 공허함은 까맣게 잊은 듯 행복해하며 루카와 포옹한다.


연인과 헤어지며 시작한 드라마가 새로운 연인을 만나며 마무리를 짓는 ‘수미상관적’인 양상은 이해가 가는 바이다. 그런데 한편 이런 의문이 들기도 한다. 사회가 요구하는 모습에 그대로 순응하지 않고 제 몸과 제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던, 주변인들에게도 그리 하라고 주문하던 메이비스는 왜 연애가 빠진 삶, 그것도 커리어를 위한 연애 없는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할까?

성장 드라마의 전형적인 양상을 따르면서 ‘일과 사랑 두 마리 토끼’ 공식마저 그대로 따라버린 안일함 탓에, 바디 포지티브를 넘어 ‘라이프 포지티브’를 보여주던 이 드라마의 전체 메시지까지 안일해진다. 무엇보다도 사랑이 없는 메이비스의 모습을 마치 진정한 성공과 행복을 이루지 못한 것처럼 그린 것이 못내 아쉽기만 하다. 소비자는 구시대적 메시지를 곁들이지 않은 새로운 메시지만으로 가득한 드라마를 즐길 소양을 충분히 갖추고 있는 데 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캄캄한 어둠 속 희망을 바라는 간절함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