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 조앙 피레스 리사이틀 후기
아침부터 비가 내렸고 뭉근하니 두통이 느껴졌다. 이런 날은 공연장에 가는 것부터가 고역이다. 차분한 몸/마음가짐으로 공연을 맞이하고 싶은데 집을 나서는 때부터 진이 빠지기 때문이다. 사실 비 소식도, 그 정도가 꽤 된다는 것도 예보로 이미 알았다. 웬만한 공연이면 수수료를 감안하고 취소했을 법하다. 그러나 이 공연은 웬만하지 않았으므로 궂은 날씨도 무거운 몸도 모른 척하기로 했다.
어쩌면 한 번의 고비가 있었다. 지난달 22일, 이 공연의 프로그램이 변경됐다는 문자를 받았다. 드뷔시와 슈베르트에서 쇼팽과 모차르트로 바뀌었다고 했다. 슈베르트 즉흥곡(D.899)을 엄청 기대했었다. 변경 레퍼토리는 내 생각에 원래의 레퍼토리보다 연주효과가 덜하다. 클래식 애호가들이 모인 웹사이트엔 취소를 고민한다는 글들이 올라오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도 모른 척했다. 공연 기획사에 따르면 이번 공연은 ’피레스의 마지막 내한 리사이틀‘이었다. 가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실제로 보니 더 아담했던 피레스는 80세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의 연주를 들려줬다. 그가 연주한 모든 쇼팽 녹턴은 첫 음부터 너무 강렬했다. 음반으로 수없이 예습했는데 그걸 다 무용하게 만드는 음색. 그 감정과 여운을 끌어올리는 파지올리 피아노에 오늘 완전히 반했다. 인터미션 없이 진행된 후반부 모차르트 연주는 음반과 비교한다면 명징함과 템포 측면에서 아쉽다는 평이 나올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교본 같지 않아 긴장감보단 여유로움이 아우른 연주는 기대 이상으로 담백했고 그래서 감명 깊었다. 특히 느린 악장들이 내겐 오늘의 킥이었다. 공연장 오는 길을 힘들게 했던 궂은 날씨와도 무척 잘 어울렸다. 방음이 덜 되어 빗소리가 섞여든대도 그저 낭만적이기만 할 것 같던 감성.
얼마 전 넷플릭스가 공개한 <흑백요리사: 요리 계급 전쟁>엔 한식 고수와 떠오르는 신예 요리사가 대결을 펼치는 에피소드가 나온다. 식재료로는 매력이 없다는 우둔살을 주재료로 고수는 매우 소박한 곰탕을, 신예는 화려한 전골을 선보였다. 승리는 고수가 가져갔다. 넘치는 화려함은 소박함을 넘지 못하고, 덜어냄은 채움보다 꽤 자주 멋스럽다는 걸 나는 또 이렇게 깨닫는다. 단조로움을 염려한 내 얕은 식견을 피레스의 실연을 보고 나서야 인지한다.
모차르트 K.330과 K.333의 느린 악장에 비의 느낌을 더하고 싶어서 오늘 밤은 릴리 크라우스의 모노 레코딩을 듣기로 한다. 숨을 죽이면 진짜 빗소리가 음악에 섞여드는 낭만적인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