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고도를 기다리며> 후기
저게 뭐지 싶은 대화가 내내 이어진다. 극은 고고와 디디라는 두 부랑자가 하염없이 고도를 기다리는 모습을 통해 인간의 존재와 삶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고도는 실체도 없고 존재 여부도 불확실하다. 고도는 매일 이곳저곳을 떠도는 고고와 디디에게 아늑한 공간이나 배를 불릴 음식이 될 수도 있다. 혹은 그런 물질적인 것을 넘어선 안정과 같은 상태가 될 수도 있으며 긴 기다림 끝에 얻게 될 어떤 깨달음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환희이기만 하지는 않다. 어쩌면 고도는 죽음일 수도 있다. 내일도 고도가 오지 않으면 그들은 목을 매자고 다짐한다. 디디는 고도가 오면 살 것이라 하지만, 고도는 소년을 통해 내일 오겠다는 전언만 남길뿐 영영 오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고고와 디디는 목을 매지도 못한 채 사라질 것이다. 존재는 영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가자.”
“안 돼.“
”왜?“
“고도를 기다려야지.“
“아, 그렇지!“
극에선 자꾸만 고도를 기다리고 있음을 잊는 고고와 그걸 상기시키는 디디의 대화가 반복된다. 인간의 삶은 끝없는 기다림의 반복이고, 우리는 그걸 종종 잊는다. 내일은 괜찮아질 거라고 위안하며 다시 실체 없는 무언가를 기다린다. 태어난 이상 잘 살아내고 싶기에 우리는 끝없이 욕망하고, 하나의 욕망이 채워지면 더 큰 욕망을 품는다. 고도가 어느 하나로 해석되지 않듯 저마다의 고도는 다르겠지만, 고도가 영영 나타나지 않음은 똑같다. 욕망하지 않으면 기다림도 없으니 보다 편안할까 싶지만, 쇼펜하우어는 인간은 존재하는 한 끝없이 갈구하며 아무것도 욕망하지 않는다면 권태로워지기 때문에 고통스럽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근원적으로 괴로운 존재인 걸까, 라고까지 질문이 이어지면 결국 현존에서 답을 찾게 된다. 아래 키르케고르의 글을 덧붙인다.
기쁨이란 무엇인가? 혹은 기뻐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기 자신에게 진정으로 현존하는 것이다. 그런데 진정으로 자기 자신에게 현존한다는 것은 바로 오늘에 존재하는 것, 진정으로 오늘에 존재하는 것이다. 오늘에 존재하면 할수록, 오늘에 존재함으로써 자기 자신에게 온전히 현존하면 할수록 내일의 슬픔은 줄어든다. 기쁨은 현재에 있다. ‘현재’에 있다.
<왜 살아야 하는가> (by 미하엘 하우스켈러), 쇠렌 키르케고르 챕터에서 인용.
고고와 디디는 하염없이 고도를 기다리지만 기다림을 종종 잊기도 하고, 싹이 튼 나뭇가지를 보며 기뻐하기도 한다. 그들이 마냥 슬프거나 한심해 보이지 않는 건 이 때문일지도 모른다.